세 개의 오렌지를 위한 사랑9

아내는 자유로웠다.

by Hugo

-열일곱 번째 날-


이른 아침, 곤히 자고 있는 혜인을 깨우지 않고 조용히 호텔을 나섰다.

마무리를 지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낯선 여자와 이대로 언제까지 동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산타와 마리아가 있다는 성당도,

투우사의 날카로운 창끝에 상처 입은 소에게 안전지대가 된다는 퀘렌시아도 헛된 환상에 불과하다.

“행복한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세요!”

투우장 앞을 서성이던 길거리사진사가 나를 붙잡아 세운다.

그러더니 사진첩을 펼쳐들고 자신이 찍은 작품들을 자랑하기 시작한다.

사진들 속에는 모델같이 세련되고 우아한 포즈로 영원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내 아내도 보인다.

성난 황소가 꽃밭을 뭉개고 달려드는 데도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펼쳐 든 우산을 타고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아오를 듯하다.

아내는 자유로웠다.


-열여덟 번째 날-


다시 비가 내린다.

음울한 불면을 예고하듯 바깥의 빗소리는 새벽의 푸른 어둠을 뚫고 쏟아져 들어온다. 벌써 몇 시간째 나는 오도카니 호텔 방 창가에 앉아 아내의 사진만 들여다보고 있다.

어제 길거리사진사에게 흥정도 없이 부르는 값 그대로 계산을 치르고 샀던 것이다.

사진 속 아내는 아직 그 모습 그대로다.

방 저편 침대에서는 낯선 여자의 새근거리는 고른 숨소리가 평화롭다.

“내 아내는 잔소리가 참 많았어요. 뭐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을까 할 정도로 사소한 것 하나까지 지적을 하는 사람이었죠.

그러다보니 가끔은 그 사람한테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여행하는 상상을 했답니다.

그런데 내 아내가 먼저 떠나버렸네요.”

혜인은 내 말에 들은 척도 않는다.

저녁을 먹을 때 내 강요에 못 이겨 스프를 한 술 뜬 것 말고는 온종일 누워만 있다.

낯선 이국땅에서 겨울우기의 찬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감기라도 걸린 모양이다.

그녀가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내야할 때가 왔다.


-열아홉 번째 날-


당연한 사실이지만 론다의 산타마리아 성당에는 산타가 없었다.

마리아는 굳이 있다면,

성당 내벽의 아담한 사이드 채플에 안치된 흰옷 입은 성모상을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다.

혜인은 이번엔 바르셀로나로 가자고 했다.

스페인에서 우울함은 없는 유일한 도시라는 것이었다.

나는 햇볕이 화창해서 싫다고 했다.

말은 안했지만

오렌지 향 가득한 가로수 사이로 유리구슬처럼 맑은 하늘을 보면 왠지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그러면 “안녕”이란 마지막 말을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 바르셀로나는 공항이 있고 나는 그녀를 추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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