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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수지향 Jun 14. 2017

먹고 먹히는 관계

불평등의 먹이사슬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 대해서는 강자이다.

나에게 매달리는 이성친구에게 강자이고,
어머니의 무한사랑 앞에 강자이고,
레스토랑에서 무릎 꿇고 메뉴를 주문받는 알바에게 강자이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강자이고,
길 가다 내 앞에서 느릿느릿 걸어가는 노약자, 장애인, 어린아이에게도 강자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모두 다 약자이기도 하다.

목숨같이 지켜내고 싶은 사람에게 약자이고,
자식들의 무심한 한마디에 약자이고,
직장에서 상사에게 약자이고,
트럼프 대통령 같은 사람에게는 유색인종이라 약자이다.

미선이 효순이가 죽었을 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내가 외치는 것이 무엇을 위함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동갑내기 여자아이들의 잔혹한 죽음에 정의를 찾으러 거리로 나갔고  
함께 뜨거운 촛농을 흘리던 사람들의 멱살이 잡아채여 끌려가는 것을 눈 앞에서 보았다.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눈물에도 결국, 정의의 여신은 머리카락 한올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죽을만 해서 죽은게 아니었다는 사실은
끝내 미군들의 비웃음 속에 '사과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판결되었고
누구도 그 죽임에 대한 죄값은 치르지 않았다.  

미국과 한국 사이 절대적인 관계의 강약,
그 무기력한 현실의 짠 맛을 알게 된 것이다.



눈물은 짜다.
이 말이 사실인 것 처럼 세상 모든 관계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도 사실인 듯 하다.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그러하다는 자명한 사실조차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던 나는
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자들은 다른 이에 비해 약자이고,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구역질나도록 싫었다.

하지만 어떠한 선입견과 편견, 차별들과 마주할 때 마다 내 머릿속에서는
미선이와 효순이를 위해 거리에 나서던 그 날,
곤봉을 든 경찰들이 사람들을 질질 끌고 가는 난리통에
아 집에 좀 가자고요! 하고 외치며 그 거친 장갑들을 뿌리치던 기억이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확실히 그 날의 경험은 약자의 위치가 어디쯤이라는 것을
내 인식 속에 강하게 새겨넣게 된 일이었던 것 같다.

불평등이라는 놈의 존재감은 내가 약자일 때 뿐 아니라
강자인 순간에도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고,

고뇌해 봤자 변하지 않는 상황들은 내게
무기력한 현실의 그 짜디 짠 맛을 더욱 진하게 머금게 할 뿐이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 대해서는 강자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모두 다 약자이기도 하다.

짜디 짠 눈물을 흘린 만큼,
삼시 세끼 수 그람의 염분을 먹어치운다.

무기력한 현실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대형 시나리오 속에서
강자와 약자를 번갈아가며 맡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스토리가 아닐까.

그 먹고 먹히는 관계를 가만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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