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의 먹이사슬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 대해서는 강자이다.
나에게 매달리는 이성친구에게 강자이고,
어머니의 무한사랑 앞에 강자이고,
레스토랑에서 무릎 꿇고 메뉴를 주문받는 알바에게 강자이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강자이고,
길 가다 내 앞에서 느릿느릿 걸어가는 노약자, 장애인, 어린아이에게도 강자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모두 다 약자이기도 하다.
목숨같이 지켜내고 싶은 사람에게 약자이고,
자식들의 무심한 한마디에 약자이고,
직장에서 상사에게 약자이고,
트럼프 대통령 같은 사람에게는 유색인종이라 약자이다.
미선이 효순이가 죽었을 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내가 외치는 것이 무엇을 위함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동갑내기 여자아이들의 잔혹한 죽음에 정의를 찾으러 거리로 나갔고
함께 뜨거운 촛농을 흘리던 사람들의 멱살이 잡아채여 끌려가는 것을 눈 앞에서 보았다.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눈물에도 결국, 정의의 여신은 머리카락 한올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죽을만 해서 죽은게 아니었다는 사실은
끝내 미군들의 비웃음 속에 '사과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판결되었고
누구도 그 죽임에 대한 죄값은 치르지 않았다.
미국과 한국 사이 절대적인 관계의 강약,
그 무기력한 현실의 짠 맛을 알게 된 것이다.
눈물은 짜다.
이 말이 사실인 것 처럼 세상 모든 관계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도 사실인 듯 하다.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그러하다는 자명한 사실조차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던 나는
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자들은 다른 이에 비해 약자이고,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구역질나도록 싫었다.
하지만 어떠한 선입견과 편견, 차별들과 마주할 때 마다 내 머릿속에서는
미선이와 효순이를 위해 거리에 나서던 그 날,
곤봉을 든 경찰들이 사람들을 질질 끌고 가는 난리통에
아 집에 좀 가자고요! 하고 외치며 그 거친 장갑들을 뿌리치던 기억이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확실히 그 날의 경험은 약자의 위치가 어디쯤이라는 것을
내 인식 속에 강하게 새겨넣게 된 일이었던 것 같다.
불평등이라는 놈의 존재감은 내가 약자일 때 뿐 아니라
강자인 순간에도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고,
고뇌해 봤자 변하지 않는 상황들은 내게
무기력한 현실의 그 짜디 짠 맛을 더욱 진하게 머금게 할 뿐이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 대해서는 강자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모두 다 약자이기도 하다.
짜디 짠 눈물을 흘린 만큼,
삼시 세끼 수 그람의 염분을 먹어치운다.
무기력한 현실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대형 시나리오 속에서
강자와 약자를 번갈아가며 맡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스토리가 아닐까.
그 먹고 먹히는 관계를 가만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