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운세를 보고
연말에 지인들과 모이면 내년 운세가 화두에 꼭 자리한다. 명리학이나 특별한 카드를 사용해서 운의 흐름을 보는 지인들과 함께하는 자리라서 이번 모임은 특히나 더 그랬다.
한 명씩 돌아가며 사주를 보고, 카드도 함께 읽어가면서 저마다 굴곡 있고, 고민 많던 일이 마무리되고 내년에는 대운이 들어온다니 내가 다 기분이 좋았다. 허허, 그런데 내 차례가 되니, 풀이가 특별할 것 없이 마무리된다. 특별한 것이라고 한다면, 밋밋하고 심심하다고 할 만한 운세에 왠지 시무룩해진 내 반응이었다. 운전하며 돌아오는 길에 앞 차의 꽁무니를 들여다보는 만큼 이 별난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유아기에 자의식이 생성되고 나와 너를 분리하게 되면서 관계의 욕구도 자라나지만, 단독자로서의 삶에 대한 욕망이 커지는 게 본능이다. 삶은 자조의 능력을 키워 세상과 부딪혀야 하는 것이 숙명이다. 독립적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 더 나아가 ‘너’보다는 특별하게 살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다. 그것은 기질, 양육자의 세계관 또는 조금 더 좋은 결과를 내었던 삶의 경험에 의해 강화된다. 탁월함, 특별함은 남에게 인정을 받는 수준을 뜻하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증명해내고자 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을 가진다. 기준을 넘어설 때 자아존중감은 더욱 확고해질 거라는 확신도 생겨난다. 청년기에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세상의 많은 것을 탐닉하면서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장래에 더욱 탁월한 사람이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당시의 시선은 늘 미래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보통은 살 수 있는 날에서 이미 살아온 날의 비율이 커지면서 그 믿음은 점차 흔들린다. 과연 나는 특별한 사람이 맞을까? 언젠가는 정말 특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마음은 점점 조급해지고 시선은 이전의 미래보다 조금 더 가까운 미래로 후퇴해있다. 그러다 보면 특별함을 잘못 해석해서, 남과 다른 것에 대한 건강하지 못한 집착이 시작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불행도 경쟁한다고들 하지 않나.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나는 죽을 뻔했어. 하면서 좋지 않은 일에서조차 특별함을 가지려고 한다.
객관적으로 보기에 평이한 어린 시절에 대한 철없는 생각으로 몸살을 앓을 때가 있었다. 내가 특출 난, 비범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건, 그만큼의 시련이 오지 않아서일까, 하고 다른 이의 불행을 부러워했던 거다. 손톱 아래에 가시가 박히는 아픔에도 쩔쩔매는 나는 심장이 조여들 고난 따위를 받아들일 담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의 진폭이 큰, 굴곡진 인생이 특별하고 값지다는 생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위인전을,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일까.
30대가 되면서 ’ 너보다 특별한’에 대한 욕심은 점점 잦아들고, ‘너와는 다른 나’의 내면으로 집중하기 시작한다. 이 사고의 전환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의 변환과 같다. 이전까지는 이젤 위에 세워져 있는 캔버스 위에 나와 세상을 그리는 작업을 했다면, 이때부터는 캔버스를 바닥에 누이고 작업을 한다. 수평 바닥에서 그려지는 세상에서는 위와 아래라는 개념이 지워지고, ‘다름’만이 존재한다. 있는 그대로-. 다만 다름을 인정하면 움켜쥐고 있던 손가락들이 펴진다. 솟아오른 어깨가 이완된다. 마치 준비되어있던 수순처럼 저절로 그래지고, 또 그래야만 했다. 비교를 할수록 내 몸만, 내 마음만 손해라는 걸 영민하게 깨달은 걸까.
그럼에도,
오늘의 이 마음은? ‘관성’ 때문이다. 칸트가 말하는 ‘경향성’. 이론과 실천에는 약간의 괴리가 존재한다. 실행이 없이 절로 미래를 ‘획득’할 것만 같은, 다른 사람들의 사주의 괘와 카드가 주는 내러티브에 특별함을 탐하던 나의 과거가 잠시 깨어났다. 한편 나의 별일 없을 ‘내일’을 보여주는 운세에서, 그동안 나의 ‘내일’들이 욕망에 미치지 못하는 ‘오늘’이 되었음이 떠올랐다. 시무룩한 나는 습관처럼 비교를 한다. 특별함을 ‘획득’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당장 오늘 손에 잡히는 것이 없고, 점점 공허해진다는 것을, 앎에도 생각을 끊어내지 못한다. 어깨는 긴장하고, 핸들을 쥔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전환의 과정에 서있다는 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