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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미 Oct 21. 2024

자기계발을 그만두고 책을 정리하다

다시 현재로, 나에게 '책의 의미'를 물었던 정리 컨설턴트님의 질문으로 돌아가본다. 나에게 책이란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고, 강박적으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행위에 집착해왔다. 그 결과는? 앞서 말했듯 집에 책이 넘쳐났고, 심한 압박감을 느꼈고, 폭식 행위가 반복되었다.


이대로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모든 행위에 기권을 선언했다. 자기계발서의 입장에서 보자면 끝까지 해내지 못한 것이고, 의지력이 약했거나 환경 설정을 잘못한 것이고, 중도 하차라는 나약한 선택을 한 것이다.


사실 우리를 사지로 몰아가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면의 심판자. 이 모든 행위를 그만두는 결심을 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존재했다.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불안들. 정말 괜찮을까? 발전하지 않는 삶이라니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사회에서 '발전해야 한다'는 가스라이팅을 끊임없이 당하며 살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막상 자기계발을 그만두겠다고, 발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나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기권하기로 했다. 멋진 척 썼지만 사실은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책을 읽지 않으면, 강의를 듣지 않고, 공부를 멈추면 어떻게 될까?






참가하고 있던 모든 스터디를 우선 그만두었다. 동시에 환경의 변화가 필요했다. 우선 '책집'이 되어버린 집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정리 컨설턴트님은 나에게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을 하나하나 다 꺼내서 한 번 만져봐주세요. 그 책을 만졌을 때 내 감정이 어떤지. 설레는지, 아니면 아무 느낌이 없는지 느껴보고, 설렌다면 왜 설레는지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지 한 번 생각해보시는 거에요. 중요한 건 내가 그 책을 샀을 때의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거에요. 그걸 알아야 다음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됩니다."라고 말씀해주셨다.


책꽂이 깊숙한 곳까지 차 있던 책을 하나하나 다 꺼내 정리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중간에 형부와 조카가 서울에 놀러와 도와준 덕분에 생각보다 더 수월하게 책을 꺼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 10월 초에 휴일이 많아 책 정리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사실 책을 꺼내면서 깜짝 놀랐다. 내가 이런 책을 샀었다고? 하는 것들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구입된 사실마저 잊혀진 채 챚꽂이 구석에 쳐박혀 있던 책이라니.. 그 처지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집을 방치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이는 부분만 깔끔하게 유지하고 청소하는 것이 집을 가꾸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어떤 물건에 둘러쌓여 살아가고 있는지, 그 물건에 대한 나의 감정은 어떠한지를 직접 느껴보는 것 또한 너무나 중요한 부분이었다.


책을 하나하나 만져가며 목차를 읽어보기도 하고, 중간 중간에 관심이 가는 페이지를 읽어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사놓고 한 번도 들여보지 않았던 책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고, 그 때는 좋아서 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다시 들여다보니 절대 읽지 않을 것 같은 내용의 책이 있기도 했다. 책을 정리하는 내 기준은 이랬다.



(1)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는가 (필요성)

지금 당장 읽지는 않더라도 꼭 소장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책은 남기기로 했다. 예를 들어 리더십에 관한 책들. 지금 당장은 내가 피플 리더는 아니지만 연차가 쌓이면서 더 알아야 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향후에 필요성이 더 높아질 것이라 봤다. 이 과정에서 같은 카테고리의 책이 여러권 있다면 그 중에서 내 기준으로 최대한 읽기 편하고,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남기고 나머지는 처분하기로 했다.



(2)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인가 (소중함)

어떤 책은 필요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혀 들어맞지 않지만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슬램덩크를 좋아해서 일본에서 사온 일러스트 집이나 원서 만화책, 싱가폴 여행 때 국립 박물관에서 샀던 도록, 도쿄 워케이션 때 롯폰기에서 샀던 마티스의 책이라던지. 나의 추억과 감정이 어려있는 책들은 소중히 간직하기로 했다.



(3) 이 책은 다시 읽고 싶은가 (인생책)

한 번 이상 읽은 책들에 대한 정리 기준은 다시 읽고 싶은가 그렇지 않은가로 정했다. 몇몇 책은 너무 좋아서 아끼고 아끼며 읽었던 것들이 있었다. 지금 당장 다시 읽지는 않겠지만 두고두고 보관하고 싶은 것들은 잘 보이는 책꽂이에 꽂아 볼 때마다 조금이라도 행복을 느끼고자 했다.


처분되는 책들은 주로 (1) 타인의 기준으로 산 책(필독서 혹은 추천받은 책) (2) 사야 할 것 같은 의무감으로 산 책(깊게 생각하거나 학습에 대한 동기 없이 구입한 책) (3)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서, 그냥 소비한 책(일본 원서나 희귀한 책)이 많았다. 향후에는 어떤 책을 구입해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도 필요해보였다.






책을 분류하는 데만도 꼬박 3일이 걸렸다. 남기고 싶은 책들을 정하고 나서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책꽂이의 카테고리를 분류해서 포스트잇을 붙여주고, 심사에서 통과한(?) 책들을 하나하나 꽂아나갔다. 예전에 비해 군데군데 여백이 보이는 책꽂이에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었다.


정리를 마치고 정리 컨설턴트님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더니, 그녀는 "어떤 공간에서, 어떤 물건에 둘러쌓여 살고 싶은지 단미님의 이상적인 집을 생각해보세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쌓여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 부분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해요."라며 귀중한 조언을 전해주었다.


그 질문을 듣고 나서 다시 한 번 집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벽지 색깔에 맞춰서 산 화이트 책상은 사람들이 퀄리티가 좋다고 추천해줘서 산 브랜드의 제품이었고, 의자 또한 의자 중에서 가장 좋다는 얘기를 듣고 큰 맘 먹고 산 고가의 제품이었다. 그 밖에 벤치의자, 원형 탁자도 있었는데 이는 사람들이 놀러왔을 때 사용할 수 있도록 구비한 제품들이라 혼자 있을 때는 거의 쓰지 않았다.


내가 좋아서, 설레서 산 것들은 벽에 붙은 포스트 카드 몇 장밖에 없었다는 것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집에 '나'의 색깔이 없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깔끔하고 깨끗해보였을지언정, 좋아하는 마음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어디에 살아왔던 것일까? 이 공간을 다시 '나'의 공간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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