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미 Oct 20. 2024

불안으로 시작된 폭식, 그리고 귀국

어떤 행위가 불안 위에 성립되었다면 그것이 좋은 종류의 것이든 나쁜 종류의 것이든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리스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을 읽는 것도, 사는 것도 나에게 있어서는 생존에 대한 불안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또한 언제든 무너질 수 있었다.


내 경우 이 '무너진다'는 결과는 이상한 곳에서 나타났다. 일본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면서 머지 않아 폭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먹는 것에 대해 불편한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살이 엄청 쪄본 적도, 음식을 통제하지 못한 적도 없었던 사람이 아무리 먹어도 배부름을 느끼지 못하다가 갑자기 배가 찢어질 듯이 아파 치욕스럽게 변기에 머리를 박고 먹은 것을 게워내던 모든 순간들이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 당시에는 수술 이후 페스코 비건이 되면서 영양소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삶에 대한 공허감이 더 큰 원인이었던 것 같다.


남자친구 없이 처음으로 혼자 시작한 일본 생활. 아침에는 집 근처 강변을 달리고 출근해 회사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강박적으로 책을 읽고 온라인으로 자기계발 강좌를 들으며 자기 전까지 무언가를 하는 '행위'에 집착하던 나날이었다. 스스로 정말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폭식이 찾아왔을 때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한 달만에 살이 10kg가 불었다. 생전 처음 본 몸무게였다. 거울 속 내가 낯설어 거울을 잘 쳐다볼 수가 없게 되었고, 회사에도 나가지 않았다. 재택근무가 자율제였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나는 점점 넓디 넓은 도쿄 내에서 작고 작은 자취방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폭식은 괜찮아졌다가 다시 또 시작되며 간헐적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 사이에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내 몸이 제어되지 않는 두려움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절망스러운 것이다. 그 와중에 갑작스럽게 큰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외국에 살며 10년간 한 번도 뵌 적 없는 친척이 돌아가시는 상황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슬픔을 느꼈고, 나의 상황과도 맞물려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 살기 위해서 책을 읽고 공부를 했는데, 다시 살기 위해서 일본에서 이뤄온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니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커리어고 뭐고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누구보다 절실했기에 그 때의 결심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감사하게도 바로 새로운 직장을 찾았다. 일본 회사에서만 5년을 일했는데, 이번엔 미국 회사였다. 모든 환경을 바꿨다. 새로운 도시, 새로운 집, 새로운 회사, 새로운 업계, 그리고 새로운 포지션까지. 모든 게 새로웠다. 매우 체계적인 일본 회사에 비해 인수인계가 원활하지 않아 처음에 적응하는 게 힘들긴 했지만 매일 야근을 해도 행복했다. 그 힘들었던 일본에서의 폭식 생활을 벗어나 가족을 더 자주 볼 수 있게 된 것이 그저 감사했다. 처음에는 회사 일을 따라가기에도 벅차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일에 매달렸다.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되려고 노력했다. 체중도 자연스럽게 다시 줄어들었다.


일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또 다시 자기계발을 시작했다. 독서 모임에 나가고, 인문학 스터디에 들어가고, 동시에 책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바쁜 게 좋았다. 아무 생각 없이 해야 하는 것들(내 스스로 하면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쳐내고 나면 하루하루를 잘 살고 있다는 뿌듯함마저 느꼈다. 그러다 외할머니가 췌장암 말기로 돌아가시면서 다시 그 친구가 찾아왔다. 폭식이라는 친구가.


또 다시 살이 쪘다. 일본에 있었을 때와 비슷할 정도로. 책을 읽는 사람은 책을 읽으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나 또한 폭식을 해결하고 체중을 돌리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었다. 건강해지는 방법이라며 소개하는 방법 중에 안 해본 것이 없었다. 과일채소식도 해보고, 페스코 비건으로도 살아보고, 한식으로 건강하게 먹어보기도 하고, 저탄고지, 간헐적 단식 등 할 수 있는 건 다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폭식은 멈추지 않았다. 끝이 없는 미로에 갇힌 것처럼 나는 점점 지쳐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 구입과 불안의 상관관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