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좋아해 왔던 것들이 있다. 보통은 그 대상을 더 열렬하게 좋아하는 열정적인 사람을 옆에 둔 경우 상대적으로 그런 착각을 하기가 쉽다. 생각하지 못했다 보다는 인정하지 못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인 듯하다. 나의 경우에는 노래 듣기가 그랬다. 한국 사람 대부분이 노래를 들을 때 사용하는 수박 친구(멜-)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다. 노래를 들으면서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길을 걸을 때는 대부분 혼자 공상을 하거나 중얼거리지 노래를 듣지는 않았다. 주변에 다양한 장르를 맛보며 자기만의 취향을 찾아가는 친구들이나 신곡 리스트를 들으며 빠르게 귀를 업데이트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았기에, 나 정도는 노래 듣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랫동안 해온 은밀한 사생활이 하나 있다. 주기적으로 90년대, 2000년대 댄스곡을 들으며 신나게 따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다. 우연한 기회로 신규 입주하는 최신곡들도 있지만 극히 드물다. 음악과 춤이 함께 어우러진 나만의 레퍼토리는 과거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
남자친구의 음악 취향은 꽤 품격 있었다. 우리가 정말 다른 나라 사람이 맞는구나 싶을 정도로 다른 색깔의 노래들을 들었다. 다른 노래를 듣는다고 해서 취향이 고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아주 오래된 음악들, 전통악기를 사용한 음악들을 듣기도 했고, 발칸반도나 이란, 아랍 지역의 노래를 듣기도 하는 등 음악 스펙트럼이 아주 넓었다. 마음속으로 어린 시절 듣던 K-pop에 멈춰 있는 투박한 내 취향과 슬쩍 비교하며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 같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나의 은밀한 사생활을 숨겼다. 듣고 싶은 노래나 자주 듣는 노래 있으면 틀어도 된다는 그의 말에 언제나 똑같이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원래 노래를 안 들어…"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더 이상 취미를 숨겼다가는 스트레스를 풀지 못할 것 같았다. 정확히 3달이 지나고 나서야 선언했다.
"고백할 게 있어. 나 케이팝 좋아해. 특히 케이팝 들으면서 미친 듯이 춤추는 거 엄청 좋아해. 한국에서는 혼자 노래방도 엄청 자주 가. 춤추고 싶어서 노래방 가는 거야."
그는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말하면 자기가 싫어할 것 같았냐고 물었다. 사실 계속 이상했다고. 본인이 잠깐 나갔다가 들어올 때면 갑자기 꺼지는 음악소리. 뭔가 하고 있었던 것만 같은데 어정쩡하게 방 한가운데에 서서 미어캣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불안한 동공. 숨기는 게 있음이 분명한데 그게 뭔지 짐작 가지 않았으나 이제야 알았다고 속 시원해했다.
고백하고 나니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지금은 편하게 음악을 틀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을 추곤 한다. 자주 불러 댄 탓에 한국어를 모르는 남자친구 조차 쿨의 <애상>, 싸이의 <어땠을까> 등을 허밍으로 따라 부른다. 어느 날은 산책을 하다가 그 남자(싸이)가 코러스로 부르는 부분 가사가 뭐냐고 묻기에 “어땠을까”라고 알려주니, 흥얼거리는 K-pop에 코러스까지 붙여준다.
미국 어느 대학의 입학 지원서에는 좋아하는 음반 5가지를 적는 란이 있다고 한다. 이 질문을 두고 예술에 관심을 꾸준히 두어야 하는, 즐겨 듣는 클래식 음반 정도는 있어줘야 하는, 그런 고상한 사람을 뽑기 위함이라는 트위터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냥 단순히 음악 감상 취미를 궁금해할 수 있냐고 할 수 있지만 “음반”이라는 표현에서 K-pop 가수 앨범을 원하는 것은 아님을, 원하는 답변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대학 원서에서 조차 무슨 음악을 듣는지가 그 사람의 취향과 품격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꼈다.
BBC News Korea와의 인터뷰에서 김이나 작사가는 말했다.
“취향이라는 건 단순히 여가와 취미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의 방향성에도 큰 영향을 끼치거든요."
취향은 중요하다. 하지만 취향은 개인이 걸어온 인생과 경험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시골에서 상경하신 부모님께서 단칸방에서부터 시작한 우리 집에서는 어렸을 적부터 재즈, 클래식 등 고급 취향의 음악이 소비된 적이 없었다. 차에 타면 언제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트로트 모음집이 흘러나왔고, 텔레비전을 틀면 나오는 90년~2000년대 가요가 음악 경험의 전부였다. 대학교를 가고 나서 취향에도 격이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자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를 굳혀 버렸다. 그때가 취향을 발견할 가장 좋은 시기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포기해버렸던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지금의 나를 가장 들뜨게 하는 K-pop에 더 당당해져 보려고 한다.
이제 우리 방에서는 K-pop이 흘러나온다.
이미지 출처: 연합뉴스 기사 내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