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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쓸모 있는 베토벤 잡학사전

베토벤이 없었다면!


“그 녀석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야. 나를 가지고 놀고 우리를 모두 죽일거야.

어떻게 그런 즉흥 연주를 할 수 있을까!”

1794년 빈에서 베토벤의 즉흥 연주를 듣고 피아니스트 겔리네크가 쓴 편지 중


베토벤은 독일 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다 스물두 살에 빈으로 유학을 떠났고, 죽을 때 까지 35년 동안 살았습니다. 오직 빈이 그를 성장시켰고 환영했으며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3대째 음악 가문을 이어가야 해!


베토벤의 증조할아버지 미카엘 판 베토벤은 벨기에의 중산층이었습니다. 사업으로 크게 번창했다가 안타깝게도 빚더미에 앉게 되었는데요. 이를 해결하고자 독일의 본으로 온 가족이 야반도주 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웃을 수만도 없는 베토벤 가문의 슬픈 역사네요. 뭐 이런 일즈음이야, 지구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지만요!


이 작은 시골마을 본에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년 12월 17일~1827년 3월 26일)이 태어났습니다. 당시의 관례는 아기가 태어난 지 24시간 안에 성당에서 세례를 받아야 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진짜 베토벤의 생일은 12월 15일이라고 추정합니다. 그와 친했던 사람들이 생일마다 보낸 축하 편지들의 날짜가 증명해주기도 하고요. 당시 베토벤이 평생 존경했던 할아버지(베토벤과 이름이 같습니다)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그의 아버지 요한 판 베토벤은 대를 이어 당시 쾰른 대주교였던 킬레멘트 아우구스트가 관할하는 본 궁정 소속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요. 태어나보니 모든 가족이 음악가네? 베토벤은 그런 환경에서 컸습니다. 음악을 먹고 보고 자랄 수밖에 없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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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궁정 소속 음악가로 활동했습니다. 베토벤은 3대째 음악 가문을 이어받을 운명이었을까요?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 폰 베토벤과 어머니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입니다. ©wikipedia


가장 역할 저버리고, 술주정뱅이로 살았던 베토벤의 아버지


베토벤의 어린 시절 기록과 전기 작가들의 여러 의견을 종합해보면. 베토벤은 어린 시절 학대받은 정황이 상당합니다. 이 모든 결과는 비뚤어진 망상에 사로잡혔던 그의 아버지 때문인데요. 노력 없는 성공에 대한 욕심이 너무 과했던 사람이었고, 강압적이고 자녀에게 폭력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밤늦게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와 잠자는 베토벤을 깨웠고요. 피아노 앞으로 끌고 가 밤새도록 연습을 시켰다고 훗날 베토벤이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베토벤이 얼마나 아버지를 증오했을지 상상되시죠? 그의 어머니도 마음 고생이 무척 심했겠죠. 그는 어머니를 안쓰러워했습니다.


게다가 베토벤의 할아버지이자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거의 술에 취해 지냈다고 하고요. 그로 인해 궁정 음악가로의 일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는데요. 이 세상에 땅 파서 월급 주는 사람은 없잖아요.


결국 대주교는 베토벤의 아버지에게 급여를 주지 않거나 최소한만 주었습니다. 생활비도 제대로 가져오지 못하는 가장이자 술주정뱅이인 아버지와 살았던 어린 베토벤이 참 안쓰럽네요. 어쩔 수 없이 베토벤은 16세부터 생계를 위해 연주를 했다고도 하니 말 다 했죠.



베토벤의 아버지는 망상에 사로잡혀 아들의 나이를 두 살이나 어리다고 속여 홍보했습니다. 모차르트 같은 음악 신동으로 만들고자 했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죠.


제2의 모차르트로 만들고자 나이까지 속여

그러던 중 베토벤의 아버지는 최고 신동으로 큰돈도 벌고 유명세를 떨친 모차르트 가족을 롤 모델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베토벤의 나이를 진짜 나이에서 2살 어리게 꾸밉니다. 아무래도 한 살이라도 어린 아이가 연주를 잘 해야 신동으로 소문이 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겠죠. 이 비극은 베토벤이 불혹을 지난 후에야 끝이 납니다. 그는 마흔 살이 넘어서야 자신의 진짜 나이를 알게 되었다고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불행하게도 나는 내가 몇 살인지도 모르고 살아왔다네.

단지 하늘만이 내가 몇 살인지 안다네.”

베토벤이 친구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 중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어린 베토벤은 모차르트만큼의 유명세나 인기 그리고 돈을 벌지는 못했습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을 저울에 잴 수는 없지만요. 그건 옳은 비유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 베토벤은 신동으로의 운이 안 따라주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모차르트처럼 왕성한 연주 활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귀족 사이에서 유행하던 살롱 음악회나 제후 앞에서의 연주 등에 출연했는데요.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음악사의 거목으로 천천히 성장한 것입니다.


또 베토벤은 주도적으로 모차르트의 음악을 공부하는 일에 매진했는데요. 그의 음악 선생이던 크리스찬 고틀로브 네페의 영향이라고 하는데요. 훗날 빈에서 베토벤이 모차르트를 대신할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치게 된 것 또한 오랜 시간 모차르트를 연구하고 공부한 베토벤의 노력 덕분이겠죠!


하이든의 초청으로 빈 유학 생활 시작


베토벤이 빈에서 살게 된 것은 오직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덕입니다. 하이든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베토벤은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이든은 베토벤의 음악적 가능성을 알아봤고, 곧 자신의 모든 부자 인맥을 총동원했습니다. 이를테면 빈의 막시밀리안 선제후 같은 사람이죠. 하이든이 베토벤의 경제적 지원을 위해 썼던 편지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베토벤은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음악가입니다. 그는 빈에 더 머물러야 합니다.

베토벤이 어떤 상황에서도 그의 음악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매달 1,000플로린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이든이 막시밀리안 선제후에게 쓴 편지 중


이러한 하이든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베토벤은 1792년 11월의 어느 날부터 빈에서의 유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땔감, 가발 제조기, 구두, 피아노, 탁자, 양말 등을 구입했다는 베토벤의 메모도 전해집니다. 그런데 빈에 적응하기 시작할 무렵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편지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베토벤이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해서 누가 그를 흉볼 수 있을까요? 이렇게 빈에서의 삶은 강해야만 했습니다.


“어떤 연주가도 베토벤의 연주를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조용함, 우아함, 아름다움이 있으며 사소한 흐트러짐도 없다. 마치 예언자의 태도같다.”

카를 체르니가 남긴 편지 중


베토벤이 빈에 살던 시기는 음악 부흥 절정기


빈은 지금도 그렇지만 모차르트가 살던 시절에도 또 베토벤이 유학의 푸른 꿈을 안고 살던 때에도 음악으로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귀족들은 음악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고, 자신들의 거실과 서재를 연주자들에게 내어주었습니다. 그곳에서 음악가는 작품을 발표했고 연주자는 연주 실력을 뽐냈고요. 오늘날로 치면 야구를 좋아하는 재벌이 구단을 만들어 구단주가 되었다, 뭐 이런 비유를 할 수 있겠네요. 귀족들은 자신이 운영하는 오케스트라, 실내악단 등을 창단하는 것이 문화였습니다. 그것은 당시 음악가들은 어쩌면 지금보다 먹고 살기 편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빈에서 수많은 음악사의 명작품이 쏟아진 것도 이러한 환경 덕분입니다.

베토벤도 이러한 빈의 음악적 윤택함에 매료되었습니다. 스물두 살 시골마을의 촌뜨기였던 그는 이를 악물고 여러 스승에게 음악을 배웠습니다. 그의 스승 중에는 모차르트의 살인범으로 지목된 바 있는 살리에리도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베토벤은 스물다섯 즈음부터 빈에서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빈의 모든 귀족은 베토벤을 섭외하려 혈안이 되었다고 하고요. 무엇보다 그가 승승장구 할 수 있던 요인은 1791년 모차르트가 사망한 것도 한 몫 했습니다. 모차르트의 빈자리에 베토벤이 성공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가졌던 바람이 한 템포 늦게 이뤄지긴 했네요. 결국 될 놈은 된다, 그겁니다.



베토벤은 여행을 좋아했습니다. 취직 조건으로 창작 여행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요구할 정도였거든요. 그가 사랑한 도시는 프라하, 가장 싫어한 나라는 네덜란드라고 합니다.


여행광 베토벤


클래식 음악사에 기록된 여러 내용을 살펴볼 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연주를 위해서든 창작을 위해서든 음악가들이 여행을 다닌 기록인데요. 당시의 음악가는 하인의 신분이었고, 군주의 허락 없이 주거지를 떠날 수 없었거든요. 음악가는 연주, 자신이 작곡한 작품의 초연이나 감독 등을 위해 당시의 큰 극장이 있던 도시로 일종의 출장을 갔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 여행의 목적이 무엇이든 집을 떠난다는 일만으로도 무척 행복했을 것 같습니다. 여행의 즐거움이 그런 거니까요.


베토벤도 여행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연주 여행을 위해 네덜란드에 갔는데요. 네델란드에 대한 인상이 무척 안 좋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두 번 다시 네델란드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실제로도 그걸 지켰다고 합니다. 반면 그는 프라하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가 얼마만큼 여행을 좋아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이 있는데요. 그가 취직할 때 미래의 군주에게 요구한 문서의 몇 가지 내용을 소개해드립니다.


첫째. 앞으로 연봉을 4,000플로린 이상 보장할 것

둘째. 창작 여행을 자유롭게 보내줄 것

셋째. 새 작품을 많은 관객 앞에서 연주하게 기획할 것


이 정도면 여행광이라 부를 만 하죠? 군주는 이러한 그의 요청을 모두 승낙했다고 하네요. 말과 하인들을 거느리고 살 정도로 큰돈을 번 베토벤. 그는 빈에서 인생의 모든 성공을 다 거머쥐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청력 이상으로 작곡에 매진할 수밖에


베토벤의 비극은 청력 이상에서 시작됩니다. 연주자가 자신의 소리를 희미하게 듣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생명이 끝났다는 선고와 같으니까요. 베토벤은 엉망진창으로 연주한 어느 날의 무대를 끝으로 작곡에만 매진합니다. 이 시기부터 그의 진정한 걸작이 빈의 하늘을 수놓는 폭죽처럼 터집니다. ‘운명 교향곡’, ‘영웅 교향곡’ 등이 대표적인데요.


그의 이러한 변화를 눈치챈 친구나 주변 사람들은 그와 대화하기 위해 작은 수첩을 사용했는데요. 베토벤에게 할 말을 적어 건네주면 거기에 대해서 베토벤이 글을 적는 등 오고 가며 대화를 나눴던 것입니다.

마흔을 넘어서 더 심해진 청력 손실은 정말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상황까지 진행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작곡한 작품을 연습하는 악단에게 이 부분이 틀렸다거나 저 부분을 다시 연주해보라는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과연 악성다운 일화이기에 충분합니다. 연주자의 몸짓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연주되는 음을 파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빈의 슈바르츠스파니어하우스 2층에서 영원히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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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은 심한 복수와 황달의 여러 합병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삶을 달걀 이외의 음식을 먹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와인을 마셨다고도 하는데요. 아마 그의 아버지가 남긴 애주가의 피가 베토벤에게도 흘렀던 것 같네요. 그 또한 술을 좋아했고 이로 인해 여러 구설에 휘말린 것도 많았습니다. 가령 술에 취해 여성을 집에 데려와서 다음 날 기억을 못 한다거나 하는 식의 에피소드도 적지 않거든요.

그는 세상을 떠나기 3일 전 쓴 유서에 사랑하는 조카 카를에게 모든 재산을 주겠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장례식에서 그가 만든 <피아노 소나타 12번>을 연주해달라는 부탁을 남겼습니다. 그의 바람은 모두 지켜졌고요.


그의 장례식은 당시 빈의 많은 사람을 슬프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례 인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다치기까지 했다고 하네요. 베토벤을 열럴히 사랑했던 슈베르트는 그의 장례식 행사에서 횃불을 들었고, 심지어 베토벤 묘지의 옆에 안장되고 싶다는 바람까지 이뤘습니다.


빈에서 살았던 베토벤의 인생 이야기는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우울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빈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자신감과 에너지를 불어넣어준 것이 분명합니다. 또 평생 결혼하지 않았지만 늘 사랑에 빠졌던 그에게 사랑과 실연의 장소이기도 할테지요. 이렇게 베토벤은 빈의 가장 유명했던 음악가이자 위인으로 기억되고 존경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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