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에베레스트 등반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나를 살린 독서
며칠 전 읽은 한재우 작가의 [노력이라 쓰고 버티기라 읽는] 책을 필사하면서 이 책이 나에게 참 알맞은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책도 아니다. 나 또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기 전까지 이 책을 몰랐다. 제목에 이끌리고 목차에 관심이 생기고 프롤로그에 푹 빠져서 읽게 된 책이다. 읽을수록 너무나 마음에 드는 책이다.
여러 번 많은 것에서 실패한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을 이야기해 준다. 마흔 중반, 워킹맘으로서의 나의 고민과도 닿아 있어서 무척이나 공감하며 읽었다.
작가들이 글을 쓸 때는 그 이유가 있었으리라. 한편으로는 베스트셀러의 꿈도 있었겠지. 베스트셀러가 가장 높은 산에 등반하는 것이라면 나같이 이 책의 소중함을 알아주는 독자들이 생긴 책이라면 동네에 있는 산은 등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베스트셀러를 목표하기보다 자신과 같은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동네 뒷산, 옆 동네 뒷산 오르듯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자신이 넘을 수 있는 산들을 등반하는 것을 선택한 것 같다.
작가들이 꼭 수준 높은 책, 레퍼런스가 많은 책을 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한재우 작가의 글처럼 내 삶에 닿아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간 자의 책이 어쩌면 레퍼런스 많은 책 보다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어려운 지식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 간극을 채워주는 책이 이런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평범한 우리들에게는 이런 책이 오히려 더 필요하고.
우리는 자녀들이 좋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을 갖는 것을 바란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학급을 둘러보면 공부를 아주 잘하는 아이와 평범한 아이들 그리고 못하는 아이들을 볼 수가 있다. 평범한 아이들이 가장 많다. 이 아이들을 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것에 한계를 우리 모두 느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서로 묵인한 채 사교육으로 겨우겨우 채워가면서 아이들에게 더 좋은 성적을 요구하고 있다. 물고기, 독수리에게도 달리기를 강요하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한재우 작가는 서울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군에 다녀오고 나서 공정무역 카페를 운영했었다. 그 후 독서교육 회사에 들어가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부지런히 책을 읽는 생활을 했다. 지금은 도서관으로 출근하며 하루 종일 읽은 책을 유튜브에서 나누고 있다고 한다.
작가의 삶은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공부를 잘했고 지금도 책을 읽어서 살고 있지만 가운데의 삶에서는 나름의 방황을 했다. 그런 방황들, 시련들 덕분에 이렇게 생각이 깊고 단단한 책이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너무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조심히 건강한 생각을 건넨다. 작가의 건전하고 바른 생각들이 좋다.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좋은 성적,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좋은’의 기준은 무엇일까? 좋은 성적,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이 에베레스트 등반이라면 우리 아이들에게 ‘모두가 에베레스트 등반을 할 필요는 없단다’라고 알려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지금 좀 더 너를 찾아보고 방황해도 된다고 건강한 너의 방황을 응원한다고 말해주면 안 될까?
사실 이 말은 나에게도 하는 말이다. 나는 무엇이 두려워서 아이의 모습을 보고 걱정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급에서 만나는 아이들 중 어떤 아이들은 그 모습이 너무나 반듯하고 기특해서 ‘이 녀석은 뭘 해도 될 녀석’이라는 생각이 드는 아이들이 있다. 공부를 잘하지 않아도, 조용해도 그 아이의 그 아이다움이 느껴져서 지금은 평범해 보여도 ‘넌 될 놈’하며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내 마음속 생각이다.
그런데 나는 왜 내 아이에게 그런 생각을 못하고 있나 생각해 보았다. 분명 학급에서 만났다면 이 아이를 칭찬하고 더 격려했을 텐데... 생각해 보니 엄마로서의 욕심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그랬다. ‘이 정도는 해야지’ 하는 마음이 너무 크니까 그 정도를 못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내 욕심이 문제였다. 좋은 성적,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이라는 신기루 같은 것에 내 아이를 재단하는 내 문제였던 것이다. 아이의 씨앗이 무엇인 줄 알고 내가 재단하려 했을까.
모든 사람이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꽃이 피면 꽃을 보러 갈 수 있는 동네 뒷산이 나를 더 풍요롭게 해 주기도 한다. 거기에 만족이 안 된다면 다른 동네의 산, 더 마음에 드는 산을 골라 올라가면 된다. 하지만 동네 뒷산이 좋다면 그 동네 뒷산에서 기쁨을 더 많이 찾아봐도 된다고 생각한다.
산은 많다. 모든 산마다 각각의 특색이 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의 산을 등반한다는 생각으로 우리 삶도 그렇게 내 마음에 들게 골라서 해보는 것은 어떨까. 가다가 아닌 것 같으면 내려오면 되지 않는가. 그 산을 올라가는 동안 체력이 더 길러졌을 테니 나에게 알맞은 산을 찾으면 더 잘 올라갈 것이다.
뛰어나지 않은 상태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모두가 최상위의 구간을 바라며 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힘들다면 그림의 떡인 그 최상위보다는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누리며 삶을 정복할 수 있는 산을 골라가는 건 어떨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그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에베레스트일 수도 있는 것이고, 누군가는 설악산, 또는 동네 뒷산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꼭 한 가지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했으면 좋겠다.
내 생각이 휘발되기 전에 이 생각을 글로 기록하고 싶었다. 메모로는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서 필사를 하다 말고 한글 문서를 열었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는 힘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나의 억울함을, 나의 간절함을, 내 삶의 무게감을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처음에는 그런 감정들이 나의 글의 동력이 되었다.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것도 있고 글을 쓰며 눈물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시간들을 지나서 지금은 힘을 조금씩 빼고 있다. 과연 그 감정이 맞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좀 더 차분하게 바라보려고 한다.
운다고 해결되는 게 없는 것처럼 감정이 휘몰아쳐서 써진 글은 내 문제를 크게 해결해 주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의 감정의 해소는 가능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잠시 내려놓는 시간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도 글을 더 쓰면서 변할지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알아 온 것만을 글로 이야기할 뿐이니까.
나의 글도 동네 뒷산 정도이길 바란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꼭 필요한 몇 사람에게 동네 뒷산 정도의 등반이길 바란다. 나도 그렇게 산을 오르는 중이니까. 딱 그 정도만 되어도 나는 기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