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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교사 정쌤 Nov 16. 2024

피디수첩을 보고... 운이 너무 크게 좌우하는 교직

피디수첩 [아무도 그 학부모를 막을 수 없다]를 드디어 봤다. 제목만 봐도 너무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아서 볼 수 없었다. 피디수첩 후기만 읽으면서 정보를 취했다. 그런데 어제는 이젠 봐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이젠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대로 봐야 한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놓치는 부분이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피디수첩 [아무도 그 학부모를 막을 수 없다]를 봤다.


전교생 50명 정도의 학교, 각 학년마다 한 반이다. 한 반 10명이 안 되는 학생들 사이에서 두 명의 학생과 학부모가 그 학교에 민원을 넣고 있다. 119일 등교하는 동안 한 학부모는 110건 이상, 또 다른 학부모는 60건 이상의 민원을  담임교사와 교감선생님, 교장선생님 모두에게 했다. 그리고 5학년 학생들의 담임교사는 7번째 바뀌었다. 


제일 처음 담임은 14년 차의 남자 선생님. 자신이 하던 대로 진심으로 학생들을 대하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고 관리자의 설득을 받아들여 담임을 맡았다. 하지만 수개월 동안의 민원과 7월 장문의 민원은 그가 담임교사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두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은 날은 민원을 받았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아이들의 표정을 살피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자신이 공정하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 교사는 자신을 너무 많이 자책했다고 한다. 왜 이 학교에 왔을까부터 5학년 담임을 수락한 것, 모든 것들을 자책했다고 한다. 


교감선생님은 너무 많은 민원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안면마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진행된 안면마비는 쉽게 호전되지 않을 거라고 한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도 눈이 떠지지 않길 바란 적이 있다는 인터뷰를 했다. 피디수첩에 나온 선생님들 모두 너무 괴로워하고 힘들어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화면 속의 모습보다 실제 그분들은 상상이상의 고통을 겪고 있으리라는 것을. 그 고통은 철저히 개인의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알아준다고 한들 자책감과 자괴감으로 내 능력을 의심하게 되고 교사로서의 자긍심이 사라진 상태의 자신을 감당하는 것은 오롯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안타깝고 화가 난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앞으로도 일어날 일들이다. 교직 환경이 바로 좋아지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변화가 생긴 것은 10여 년 전부터다. 씨앗이 이미 뿌려진 것이다. 10여 년 전부터 열매가 하나씩 나오던 것이 이제 잘 여물어서 여기저기서 아우성치는 중이라 생각한다. 해결책을 찾아서 지금 씨앗을 심어야 열매를 맺으면서 조금씩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것을 보면서 생각한 것은 학부모의 인성이 교사의 한 해를 결정짓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가 아무리 잘해도 학부모, 학생 잘못 만나면 교사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런 경우 교사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교사가 마무리를 못하고 병가와 병휴직을 들어간다는 것은 참을 때까지 참고 들어가는 것이기에 그 반에 있는 다른 학생들은 이미 많은 피해를 보고 있다는 뜻이다. 학부모들은 내 아이에게 직접 피해가 없다면 괜찮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학생들은 교실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작은 폭력을 배우는 중인 것이다. 어떤 학생은 저렇게 하면 안 되겠다를 배우고 어떤 학생은 저렇게 해도 되는구나를 배운다. 그리고 많은 학생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당연히 받아들이며 지낸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가장 많이 안타깝다. 피해자가 되었음에도 피해를 이야기하지 않고 가해자들이 큰 소리를 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피디수첩에 나온 정서학대로 고소당한 이야기들, 상을 주지 않았다고 정서학대, 전체 앞에서 아이를 크게 호명했다고 정서학대, "야", "너", 목소리가 크다고 정서학대... 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요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힘들었던 게 어떤 것이었는지 피디수첩을 보며 알았다. 목소리 높이지 않고 기분 상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하기에 학생들의 잘못된 행동을 이야기할 때 항상 벽을 마주했다. 안 하는 학생을 지도할 방법이 없다. 학생이 힘들어하는 학습지를 풀게 하는 것도 정서학대로 고소를 하니 말이다. 내가 힘들었던 것은 날마다 '나는 할 수 없다'와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안다. 


나는 할 수 없다. 지도는 하되 큰소리로 말하지 않고 사과도 내가 시키면 안 된다. 학습지도를 하되 학생이 안 하겠다 하는 것을 끝까지 시킬 수가 없다. 안 하고 버티는 것을 내가 어찌할 수가 없다. 나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나는 할 수 없다'와 마주할 수밖에 없으니 목에 가시가 걸린 느낌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피디수첩을 보면서 가시 걸린 그 느낌이 명확해졌다.


나는 여전히 잘하고 싶다. 수업도 잘하고 싶고 아이들과 즐겁게 학급경영도 하고 싶다. 학교생활을 신명 나게 하고 싶다. 아이들을 더 이뻐해 주고 더 칭찬해 주고 사랑해 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절제하며 가르치지 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목소리가 커지고 끝까지 하라고 에너지를 쏟을 것이라는 것을. 그러면 어떤 학부모의 민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건 구더기가 생기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교사가 정서학대 고소를 당하면 아무리 무혐의 처리가 나도 그 시간까지 교사의 영혼이 엄청난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교사로서 교단에 설 때 몸이 불편한 것보다 영혼의 상처가 더 큰 피해를 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일은 자긍심을 가져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자의 내면이 건강할 때 자긍심은 생긴다고 생각한다. 교사가 건강한 영혼을 가졌을 때 학생들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치고 바른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또한 교사의 건강한 영혼은 아픈 학생들을 치유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하지만 교사가 안에서 곪아있으면 지식은 전달해도 다른 것들은 힘들다. 내가 지금까지의 교직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그것이다. 그렇기에 교사로서의 삶을 잘 살아가려면 몸과 마음의 건강은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결론을 내릴 수도 어떤 다짐도 할 수도 없다. 다만 나는 여전히 잘하고 싶다는 것, 그것을 알게 되었다. 날마다 마주하는 벽들로 괴로운 날들 속에서 '나는 여전히 소망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잘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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