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1일 목요일 날씨: 창문을 조금 열었더니 찬공기에 화들짝
“오늘부터 난 일곱 살이야.”
20년생 딸 포도는 눈을 뜨자마자 환호했다. 이 정도로 좋은 일인가.
“일곱 살이 좋아?”
너무너무 좋대.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포도는 제 발을 내 얼굴 앞에 휙 갖다 댔다.
“이것 봐. 발이 조금 커졌어.”
어제 발이나 오늘 발이나 거기서 거기겠지만, 엄마로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신들린 맞장구를 쳐내야지. 조금이 아니라 많이 커졌다고, 너는 지금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고 대꾸해 줬다.
포도는 일곱 살이 되어서 왜 좋을까. 도대체, 왜. 좀 더 형님이 되고 곧 초등학교에 갈 수 있어서 좋단다. 그래, 너는 좋겠다. 너는 늙는 게 아니라 크는 거고, 크면 너를 받아주는 곳이 저절로 생기니까. 나는, 84년생이면서 스스로에게 스물일곱 살이라고 공갈치는 이 애미는, 크는 게 아니라 무럭무럭 늙고 있다. 늙을수록 나를 받아주는 곳은...... 글쎄다. 어젯밤에는 여기저기 채용 공고를 뒤졌다. 새해 첫날 전야에 내가 한 일은 구인구직 사이트 순례 되시겠다.
한 시간에 만 원, 하루 두 시간씩 일주일 일하면 십만 원, 한 달이면 사십만 원. 나는 따지기 시작했다. 하루 두 시간씩 주식 투자에 매달리면 한 달에 팔십만 원은 벌지 않을까. 단타치는 지인이 말해줬다. 130만 원만 있으면 20억을 벌 수도 있다고(책 대형주 추세추종 투자법칙을 읽으면 그 방법을 알 수 있다고도 했다!). 어딘가에 메이기 시작하면 아픈 아빠에게 바로 출동할 수도 없다. 혹시 포도가 아파서 유치원에 결석해야 하는 날에는 어쩔 수 없이 결근해야 하고, 그건 너무 민폐다. 돈, 시간, 기회비용과 위험요소까지 계산한 후 결국은, 또, 선택했다. 취업하지 않기로.
그래서 오늘 더 신나게 집안일했지. 이게 돈이 얼마야. 경주 시댁 밭에서 뽑아온 대파 한 포대기를 다듬었다. 마트에서 산 파는 금방 손질할 수 있는데, 얘는 굵은 뿌리에 흙까지 물고 와서 내 입에 ‘대파 지옥’이라는 말을 튀어나오게 했다. 점심에는 시어머님이 손수 만들어주신 도토리묵으로 묵밥을 해 먹었고, 이어서 호박을 장만했다. 누런호박처럼 생겼지만, 색은 단호박에 회색 물감을 몇 방울 떨어뜨린 것 같은, 시중에서는 천지 볼 수 없는 ‘오살호박’을 다듬었다.
“자, 들어봐라. 윽씨 무겁째? 이거를 오살이라 칸다.”
“오살? 오살이 뭐예요?”
“오월에 일찌기 심은 호박. 이 호박은 더 두껍고 달대이.”
두꺼워서 진심으로 좋았다. 힘껏 힘을 줘가며 자르고 껍질을 벗기니 과육이 잔뜩 쌓였다. 절반은 찌개, 국, 밥에 넣을 수 있게 토막을 냈고, 절반은 호박전을 할 수 있도록 채를 쳤다. 나무 도마에서 채썰기는 늘 소꿉놀이 같다. 칼이 탁탁탁탁 리듬을 타면 덩달아 활기차진다. 탁탁탁탁, 쏴라있네, 쏴라있어. 냉동실 한 칸이 대파와 호박으로 가득 찼다. 아오, 이게 전부 돈이 얼마야. 내일 마트에 가서 계산해 봐야겠다.
내가 집안일을 해내는 동안 남편은 책장 정리를 했다. 우리 남편도 ‘정리’라는 걸 할 줄 아는 인간이었어. 올해 결혼 17년 차. 이 정도 살면 평생 정리를 해본 적 없는 놈도 ‘스스로, 알아서, 아내가 화를 내지 않아도’ 정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참으로 큰 깨달음이다. 다른 일도 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더 기다리겠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그리고 포도는 뭐하며 놀았는지 모르겠다. 기억나는 건, 춤추는 모습을 찍어달라기에 동영상을 찍어줬고, ‘엄마, 지금 나랑 얘기 좀 할 수 있어?’하기에 대파를 썰며 대화를 나눴고, 신나는 재즈를 틀어달라기에 크게 틀어줬다. 노상 흐느적거린 걸까. 그리고 ‘일곱 살 포도 사전’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책<아홉 살 느낌 사전>을 읽어주기도 했다.
2026년 새해 첫날이라고 해봐야 특별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남편의 정리는 당연한 일이고. 이제는 좀 해야지!).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작은 칸들이 채워졌다. 냉동실 한 칸, 책장 한 칸, 포도의 하루 한 칸. 그리고 내 마음속에 오늘도 잘 살았다는 문장 한 칸. 알차게 채운 오늘 덕분에 주식책을 한 장이라도 더 읽을 동기가 생겼고, 대파를 소금 쓰듯이 쓸 수 있게 되었으며, 늙은호박전을 계란처럼 구워낼 수 있게 되었다. 어지러워 들어가기 싫었던 그 방은 내게 새로운 독서 장소가 될 것이다. 우리 포도는 오늘 푹 쉬었으니 내일 씩씩하게 등원할 수 있겠지.
앞으로 펼쳐질 2026년에도 특별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처럼 매일 작은 칸을 알차게 채우며 살겠다. 살아낸 덕분에, ‘덕분에 이렇게 되었다.’고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대차게해봄>
오늘 제 글을 읽어주신 덕분에
내일의 저는 또 쓸 수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
인플루언서가 아닌 순수한 전업주부는
요리하다가 사진 찍는 일이
사실은 제일 귀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