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친구 엄마에 대하여

2026년 1월 7일 수요일 날씨: 하루 종일 키카에 있어서 모름

by 대차게해봄

“자기야, 오늘은 도저히 밥을 못 하겠어. 저녁밥은 갈비탕집에 가자.”

포도를 낳은 여섯 해 만에 처음으로, 내가 밥을 못할 정도로 힘든 날이 왔다. 파스를 5개나 붙인 무릎 때문은 아니었다. 기가 빨렸다.

“포도 밥은 자기가 먹여줘. 손이 너무 떨려. 나부터 먹......”

나는 내 말을 끝낼 수 없었다. 고기와 밥과 깍두기를 쑤셔 넣어야만 했다. 비행기가 추락할 때 산소마스크는 보호자부터 착용하라고 했던가. 그 심정이었다. 나부터 살아야 했다.


맞다. 오늘 별일은 없었다. 즐거운 하루였다. 그런데 나는 기가 빠졌다. 유치원 방학 첫째 날을 맞이하여, 포도 친구 16명과 그들의 엄마와 함께 키카(키즈카페 줄임말)에 갔는데, 갔는데, 갔는데. 오전 10시에 입장해서 오후 5시까지 포도는 즐거웠겠지. 나는, 아이고. 16명의 포도 친구 엄마와 하루 종일 앉아 대화하는 게 힘들었다. 지금 피곤해서 그런지 희한하게 대화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혹시, 듣자마자 바로, 내 뇌가 본능적으로 기억하지 않기로 한 걸까.


오늘 어쩌면 내게 친구 같은 포도 친구의 엄마를 사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렴풋이 알게 됐다. 포도 친구의 엄마는 내게 친구가 되기 어렵다는 걸. 우리는 공감대가 없었던 게 아니라 공감대가 똑같았다. 자녀의 나이가 같고, 그 자녀가 똑같은 유치원에 다닌다는 건 엄마의 역할이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는 뜻이다. 친구가 되려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하는데, 오늘의 우리는 종일 엄마라는 직함만 붙들고 있었다. 서아 엄마, 지우 엄마, 연아 엄마, 도윤 엄마. 정작 엄마의 실명은 서로 나누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16명의 엄마 중 누구 하나 ‘저는 요즘 무엇에 관심이 많아요. 저는 뭘 좋아해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학원, 동네 맛집, 어느 마트에는 뭐가 싸다, 다른 유치원은 뭘 해준다더라. 알면 좋고 몰라도 그만인 정보가 7시간 동안 여러 입에서 끊이지 않고 나왔다. 하긴, 나도 그랬다. 저는 요즘 주식에 관심이 많고요,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고요, 소설 <여름>에 빠졌는데 내 핏속에도 사랑이 즐겁게 춤추는 것 같아요, 푸하하. 이런 얘기는 절대 근처에도 안 갔다. 그저, 유치원 운영위원장으로서 병설/단설 유치원의 장점을 늘어놓았다. 홍보대사인 줄.


모두 착하고 선하고 성실하며 예쁘기까지 한 포도 친구 엄마였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삼라만상이었는데, ‘나’를 드러내는 대화는 하나도 없었다. 아이를 중심으로 모인 관계라 그럴까. 아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만 굴러갔다. 누구나 들어도 좋아할만한 안전한 주제, 안전한 정보, 안전한 유머. 큰 소리로 많이 웃었는데 뭐 때문에 깔깔깔 거렸는지 모르겠다.


포도 친구 엄마도 아마 지금의 나처럼 고될 것이다. 하루 종일 제 역할을 얌전하게 수행한다고. 전화번호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카톡을 보낼 수는 없는 사이다. 그래서 여기에 적어 둔다. 오늘 키카에서 고생했다고. 내일은 쉴 수 없어도 악착같이 쉬라고. 애가 심심해하는 게 나쁜 게 아니라고. 심심함은 사고의 발화점이라고.


나는 내일 포도를 심심하게 할 참이다. 키카도 없고, 이벤트도 없고, 계획도 없는 하루. 포도가 지루함 속에서 자기 생각을 스스로 꺼낼 수 있도록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나도 포도를 핑계로 좀 심심해지고 싶다. 그래야 내 마음이 들리니까. 오늘은 정보가 너무 많아서 나를 전혀 돌보지 못했다.


<대차게해봄>

내일은 포도를 심심하게 만들겠음

애가 심심해야~

생각하기 시작한다고 믿는 엄마임!

+

제일 마지막에 내 손으로 끌고 나온 포도. 오늘은 포도 인생 다섯 번째 키카였다. 햇빛 한 점, 바람 한 모금 들어오지 않는 키카가 나는 좋은지 모르겠다. 밖이 아무리 추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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