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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파티쉐 Jul 16. 2020

나는 방랑고양이

개과 집사가 고양이와 사는 법

냐아 냐아~ 소리가 들리면 어김없이 5시 30분 정도의 이른 시간이다.  오늘은 남자친구의 출근으로 훨씬 더 이른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났다.  '루키(둘째 고양이)'는 신이 나는지 얼른 현관문앞에 앉아 기다린다.

다녀와.

계단을 폴짝 뛰어내려가는 루키와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하는 남자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문을 걸어 잠근다.

아... 뻐근해.  스트레칭이라도 할까 하다가 창문밖을 보니 어설프게 어두운 날씨다.  비는 그쳤나 갑자기 궁금해진다.  바깥 세상으로부터 나의 공간을 지켜주고 있는 단 하나의 투명한 벽을 살짝 열어본다.  루키가 나간 틈을 타 마음놓고 새벽 찬공기를 집안으로 불러들여온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름을 '마실이'로 지을 걸 그랬다.


고양이를 밖에 내돌리는(?) 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아니 더 정확히 고백하자면, 백이면 백 우려를 표한다.  나가서 자기의지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문제지만 사고라도 날 수 있으니까.  요즘은 워낙 흉악한 일도 일어나는데다가 강아지가 아니기 때문에 집을 정확히 찾아오는 일은 고양이에겐 꽤 난이도가 높은 일이다.  우리집처럼 아파트인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찾지 못해 고양이탐정을 부른 경우도, 어디 숨어있는지 알지만 고양이가 두려워해 못꺼낸 경우의 얘기도 수 차례 들었다.  최근에는 지인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며 우려를 표하셨다.

고양이가 코로나도 옮긴대요.  나가서 걸려들어오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럼에도 나는 매일 고양이를 내보낸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첫째는 내가 놀아줄 기력이 없어서이고 둘째는 밖에 살던 아이가 집안에만 있으면 얼마나 답답할까 싶어서이다.  물론 캣맘들(고양이 집사거나 고양이를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은 '고양이는 영역동물이라 자기가 익숙한 공간에 있는 걸 더 좋아해요'라고 말해주었다.  

겉으론 아무 말 못하고 '그러나 사람도 좀이 쑤셔서 가만 못있는, 뻔질나게 돌아다녀야 속이 풀리는 나같은 사람도 있으니 고양이도 그렇지 않을까요' 하고 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이 녀석은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지 한 시간 어떨 때는 두 시간 후에 돌아온다.  가끔 자정무렵에도 오지 않고 있으면 걱정도 되지만, 나 자야하는데 하는 생각이 같이 든다.  첫째 '찰리'도 어느 날부터인가 물들어서 같이 나다니기 시작했다.  몇 번 찾아나서 본적이 있는데 대부분 실패했다.  딱 한 번 윗 동의 아파트 주차장에 돌아다니는 걸 불러서 데리고 온 적이 있다.  차 아래에 들어가 있으면 당연히 위험하다.  겁이 많아서 사람곁에는 가지도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집생활을 오래해서 둘 다 바깥을 더 좋아하지는 않는다.  위험한 줄 알지만 가끔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 같다.  먹을 게 있고, 편한 담요도 있지만 그걸 버리고 나갈 이유가 있는 것이다.  창밖 나뭇가지에 새들이 퍼덕거리며 날아다니면 신이 나서 채터링(chattering)을 해대니까.  꺄갸갹 꺄갸.  옆에서 지켜보는 나도 심장박동이 빨라지는걸 느낀다.  그렇게 재미난 일을 집안에서만 하고 있어야 한다니 견디기 힘들지 않을까.

나는 그게 인간이나 고양이나 동물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길들여져도 '본성'이라는 것은 없앨 수가 없는 거 아닐까.


엄마 뱃속에서부터 '길생활'을 했던 나는 한 번씩 어딘가로 떠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신혼 초 어떤 사정으로 풀밭위 노상에서(정확히 말하면 '방둑'이라고 표현하셨다) 주무셔야 했다던 엄마의 의도치 않은 태교가 내게 전해진 것 같다.  그래서 난 낯선 환경이 두렵지 않다.  담이 쎄다고 할 수도 또는 무대포같은 면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런 방랑벽(?)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게 된 건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사라 윌슨'의 글이 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6개월 이상 한 군데 정착할 수가 없어 주기적으로 거주지를 바꿔야 하는 강박마저 있는데 그 밖에도 희한한 습관들이 있지만 그게 자신이라는 데에 만족하며 살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는 불안을 품고도 살아가는 법을 안내하는 <내 인생 방치하지 않습니다>라는 멋진 책을 썼기도 하다.  그녀도 부모님 뱃속에 있을때 영향을 받은 것일까.


방황을 마치고 돌아온 고양이가 현관앞에서 냐아앙 나를 부를 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갔다 와서는 있는 애교 없는 애교를 다 떤다.  밖에서 뭔가 서러운 일이 있었나.  내가 보고싶었나.  배가 고파 이러나.

난 아직도 녀석들을 잘 모르겠다.  그냥 무탈하게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느끼고, 사상충 예방약을 놔줘야겠다는 생각밖에는.

그나저나 오늘도 이렇게 고양이를 방치하고 있는 게 잘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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