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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호이 Mar 09. 2024

여행 좋아하세요?(1)

살다 보면 우리는 몇 개 나라를 여행하게 될까?

행을 좋아하는 환자 중 한 명으로 참으로 반가운 요즘이다.

전히 어딘가 떠나고 싶고, 지금도 스카이스캐너를 킨 채

담의 여정 이야기를 끄적여본다.



Pro. 여행 도파민에 빠진 대한민국

해외여행이 부산여행만큼이나 쉽고 가까워진 시대다. 요즘 TV채널을 돌리다 보면 유튜브는 물론이고 여행 프로그램이 유독 많이 보인다. 콘텐츠의 제약이 덜한 종편과 케이블은 물론, 지상파에서도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연예인과 유명 유튜버들을 섭외한 해외여행 프로그램들이 즐비하다. 심지어 교육방송인 EBS와 지자체 방송사에서도 여행 콘텐츠가 편성되어 우리 시청자들의 가슴 한편을 비집고 들어오기도 하고 도파민을 자극하면서 영상 속에서만 보던 낯선 해외 여행지에 떨어진 우리 모습을 뇌이징하고 꿈틀 되는 상상력을 조장한다.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연세 있는 어르신들도 말 그대로 해외여행 열풍이다. 국내에도 얼마나 갈 곳이 많은데 혀를 차며 철부지 우리들의 등짝 스매싱을 때리던 부모님들도 변하는 추세이다.

과거 한 때에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넘쳐났고 ‘하트시그널’, ‘솔로지옥’ ‘나는솔로’ 등 각종 연예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던 것들을 보면 요즘에 가장 큰 화두와 관심사는 아무래도 ‘여행’ 인가 보다. 그럴 만도 한 게 한 동안 코로나로 인해 하늘길이 막히고, 각종 규제가 강화되면서 ‘멍청소비’, ‘보복소비’ 들이  많았던 만큼 이따금 요즘엔 다시 해외여행으로 관심사가 옮겨진 듯하다.



01. 강렬했던 (여행)첫경험

인생에서 마주하는 모든 첫 경험은 대부분 생생히 기억난다. 첫사랑, 첫만남, 첫회사 등... 첫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스무 살이 되고 대학교를 다니던 5월 어느 날, 인천 병무청에 신검을 받으러 갔던 날로 기억한다. 무서울 것 하나 없던  패기 당당한 그 시절에 당당하게 1급 판정을 받고 병무청을 나오는 순간, 왜였는지 모르지만 고속터미널에서 부산행 버스표를 구매하듯 정말 거짓말 하나 없이 “가장 빨리 입대할 수 있는 날짜가 언제인가요? 그 날짜로 해주세요.”라고 말하고는 정확히 한 달 뒤 입대 영장을 받았다(물론 영장을 받고 나서 부모님한테는 엄청난 혼이 아니 욕을 먹었다). 군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가야 할 거면 최대한 빠르게 다녀오자!라는 생각이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피할 수 없으면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끝내 버리자"가 내 주의였다. 때문에 입대 영장이 날아온 이후부터는 하루가 멀다시피 놀러 다녔다. 그래 봤자 겨우 한 달 남짓 시간이었다. 그리고 입대 일주일 전, 친한 친구랑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그게 나의 첫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지금이야 어린 나이에도 부모님과 함께 동남아도 가고 미국도 가고 요즘엔 ‘고등학생 해외여행 브이로그’가 유행이라지만 당시 스무 살에 해외여행은 사회적인 인식과 정서, 경제 등을 고려해 볼 때 비교적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려서부터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책으로만 조금씩 공부하던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직접 본다는 건 말 그대로 ‘신세계’였다. 갓 스무 살이 된 나로서는 정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자유’를 만끽했던 기억이다. 대단한 것도 없었다. 요즘 젊은것들을 쳐다보며 지나가는 어르신들의 따끔한?! 시선들이 없었고, 무서운 동네 형들로부터 무언의 눈빛 교환이나 이런 눈치 없이 아랑곳하지 않고, 낯선 도쿄 시내를 두리번두리번 돌아다니며 카메라 셔터를 누른 기억뿐.

그 어린 나이에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할 나이에 다녀온 해외여행에서 맞바꾼 짜릿함과 도파민 중독은 어느새 군생활을 다다르게 이르렀고, 항상 또 “언제 다시 해외를 가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늘 목이 말라 있었다.



02. 오사카 한 달 살기와 워킹홀리데이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교에 복학하여 절반은 학교에서 절반은 알바에서 좀비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한 번쯤 해방구가 필요했다. 몇 년 전 ‘욜로’, ‘소확행’ 이란 단어가 유행하듯 그 해쯤에는 사회적으로 “대학 다닐 때에 빚을 내서라도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와야 한다” 는 말이 밈처럼 번지던 시기였다. 내 입장에서 그럴 여유는 없었지만, 얼마 안 되는 간간히 모아 온 알바비 조금으로 방학 동안에 있는 교환 학생을 신청했다. 신청자가 적었던 건지 남자는 혼자여서 그랬던 건지 어쨌든 그렇게 어렵지 않게 얼마 지나지 않아 오사카의 한 대학교에서 두 번째 해외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번엔 일주일도 아니라, 무려 한 달 이라니!! 공항에 가는 순간까지도 설렜던 기억이다.

그렇게 두 번째 여행이 바로 ‘해외 한 달 살기’ 프로젝트가 되었다. 한 달 살기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이 때도 이 이후에도 다른 여러 나라에서 보낸 한 달이라는 시간들은 친구를 사귀기에 충분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내 손발이 되어주는 여러 가지 수단들과 갖가지 재미들을 더할 수 있는 기간이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때문에 도쿄 여행과는 달리 오사카에서의 시간은 주요 시내와 명소를 경험하고도 여유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현지인들처럼 일상을 보내보고자 시간에 쫓기지 않고 덤덤히 하루하루를 보냈던 기억이 있다. 당시 알게 된 오사카 대학교의 일본 친구의 도움으로 차로 가기 어려운 음산한?! 곳들도 오토바이 뒤에 얻어 타 여기저기 구석구석을 따라다니며 무더운 한 여름을 강렬하게 보냈던 기억이 있다.

오사카에서의 시간은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말 그대로 ‘순삭’ 이였다. 눈 깜짝 지나간 한 달은 너무나도 아쉬웠고,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그때 생각했다. “다음 학기를 마치고 1년만 일본에서 살다 와야지!”.


그 후에 오사카에서 한 달을 통해 자신감이 생겨났고, 이번에는 한 달이 아니라 1년을 나가 보고 싶었다. 해외에서 일 년을 살아보겠다는 어릴 적부터 가졌던 버킷리스트에 도전할 타이밍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고, 그 유명한 ‘워킹홀리데이’를 결정했다.  

일본은 호주만큼 사람을 많이 뽑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정보들을 취합해야 했고, 제출해야 할 워홀 계획서를 정성 들여 준비했다. 일도 하고, 돈도 벌면서 일본 전역을 여행할 수 있다?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도 직접 보고 함께 경험할 수 도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으로도 황홀했고, 광화문에 위치한 워홀 센터에 가기 전부터 내 머릿속은 이미 시부야 스크램블 한복판에 다시 서 있었다. 그렇게 워홀 상담을 받으며 여행을 계획하고 하루하루를 기대에 부푼 마음과 함께 보내던 어느 날, 우리 눈에 긴급 뉴스가 가득했던 한 하루가 있었다.


                                                                          “속보입니다.

                                                금일 오후 2시경 일본 동북부 센다이 지역에서…”


지진이었다. 내 마음마저 갈라놓은 지진 속보였다. 바로 전 세계에 공포와 충격을 가져다준 ‘동일본 대지진’이었다. 뉴스 속보를 보면서 내  아메리칸 드림인 ‘Tokyo Dream’ 은 와장창 무너져 버렸다. 옆 나라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섰다는 속보들과 소문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고, ‘방사능 오염수가 국내로 유입되고 있다’, ‘일본 원산지의 식자재를 먹으면 죽는다’, ‘많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이민 오고 있다’ 등 온갖 루머와 공포가 나돌던 시기였기 때문에 일본행 워홀은 그냥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당시에는 너무나도 큰 사회적인 빅이슈였기 때문에 아쉽지도 허무하지도 않았고, 그냥 멍하니 깊은 한숨과 함께 하늘과 땅을 번갈아 쳐다보며 아예 없었던 일인 것처럼 일상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이 가득한 채 끝내 할 수 없었던 이 해외 살기? 버킷리스트는 조용히 가슴 한편에 고스란히 자리하게 되었고, 떠나지 못한 이 아쉬움과 여진은 결국 몇 년 후 나중에 내 인생에 또 다른 결정적 한몫을 한 듯 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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