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을에 어떤 개가 살았더래 로 시작하는 이야기

by Ben

알고 지내는 몇몇 개들에 대한 이야기다.

근처에서 자주 보는, 개성 강한 개들 말이다.

그곳이 진짜 집인지, 어쩌다 받아본 따뜻한 손길에 감동해 눌러앉은 것인지 알 길은 없지만, 항상 주변을 맴도는 떠돌이개들 말이다.




'대장'과 '장군'


동네에서 제일 큰 무리의 서열 1위 '대장'이는 눈빛부터 사납다.

낯선 인간이 그 영역을 지나가도록 두는 법이 없다.

잇몸을 드러내고 죽일 기세로 짖어대는 무리에

둘러싸이면, 정말 물려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밀려든다.

사실따지고 보면 내가 항상 다니던 길에 그놈들이 굴러들어 온 것이지만, 그들에게 그런 논리가 통할 리 없다.


첫 만남은 너무 어렵다.

겁먹은 티 안 내려고 덤덤한 척 지나가는데 뒤에서 엉덩이를 물었다. 보통은 죽일 듯이 짖어대도 실제로 공격하는 개는 없었는데, 이놈은 실행력까지 갖춘 리더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 편일 때 말이다.


처음에는 미친개라고 불렀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이제는 대장이로 부른다.

요즘 대장이는 나를 완전히 무시한다.

그 사나운 눈빛마저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난다. 그렇다. 나는 개무시 당하고 있다.


'장군'이는 아무 생각 없는 어린 개다.

름하고 앞발도 투실하니 멋진데, 얼굴값은 못한다.

대장이가 없을 땐 맹한 표정으로 꼬리를 살랑대며 쫓아오다가, 대장이가 근처에서 짖기 시작하면 줏대 없이 따라 짖는다.

그러다 그 대상이 나라는 걸 깨닫고 당황하는, 뇌가 착한 친구다. 지금은? 혼란 없이 친하다.

그들 표정에서 드러나는 투명한 감정 표현이 좋다.




'엄마'와 '딸'


모녀 사이로 항상 붙어 다닌다.

'엄마'는 품종 믹스인 듯 미모가 출중하다. '딸'은 엄마유전자를 하나도 못 받았다.

자기 영역을 지나가는 마음 좋아 보이는 행인에게 장난을 치고 다니는 외항견들이다.

장난은 딸이 걸지만, 이쁨은 엄마가 받는다.

동물 세계에서마저 외모지상주의를 마주하는 뒷맛이 쓰다.




빼빼


갈비뼈 윤곽이 조각처럼 선명하다.

안쓰러운 마음에 먹을 것을 몇 번 챙겨줬지만, 입을 대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나 같은 사람들이 준 음식을 골라 먹으며 고급 입맛이 된 것이다.


이렇게 마른 몸으로도 편식을 하는 모순.

아사직전인 네가 감히? 따위의 오만함.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바둑이


동네에서 이 녀석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항상 웃는 얼굴로 넉살 좋게 겅중거린다.

개똥녀를 향한 경고문을 붙이려고 사다리에 올라선 나를 향해 위험하게 뭐 하냐고 끙끙댄다. 세상 근심스런 표정으로 땅에 무사히 닿기를 얌전히 기다린다.


대장이와 장군이에게는 통행세로 간식을 상납했지만, 바둑이는 쓰다듬는 것 말고는 준 게 없다.

그런데도 언제나 어디선가 흙바람과 개친구를 몰고 달려와 격하게 인사한다. 그러곤 그 흥분상태 그대로 눈에 걸린 어떤 행인을 따라간다. 아마 세상에서 제일 바쁜 개일 것이다.


바둑이가 건네는 유쾌한 안부 인사를 받으며 깨달은 것은, 무뚝뚝한 나도 바둑이와의 그 시간을 기다린다는 점이다.

분명 오버스러운데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진심의 온기.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바둑이의 웃는 얼굴을 마음에 새긴다.




검둥이


인간에게 반응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피한다.

어느 구석에 하루종일 누워 있는 모습은, 없는 듯 살고 싶다는 의지처럼 보인다.

몇 번 간식을 챙겨줬더니 나를 보면 몇 발자국 따라오다 이내 그만둔다.

검둥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응이라는 걸 잘 알기에 더 마음이 쓰인다.


나약했던 시절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 시달리다 모든 걸 내팽개치고 숨어버렸다.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점점 더 싫어졌다, 모든 게.

오랜 시간 그렇게 살다가 어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정신을 차렸다. 이미 바닥나버린 인류애는 여전히 회복될 기미가 없지만, 어쨌든 나는 세상으로 돌아왔다.


검둥이에게 바둑이가 되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요즘 대장이와 바둑이를 못 본 지 오래다.

누구는 흘러가고, 누구는 흘러든다.

그리고 나는, 또 성의 없는 작명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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