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를 읽고
오늘 서평으로 다룰 책은 <미움받을 용기>이다. 수년 전 한창 대학을 다닐 때 지인이 생일 선물로 줬던 책인데, 늦깎이 군인 신분인 지금에서야 읽어보게 되었다.
<미움받을 용기>는 알프레드 아들러라는 심리학자의 이론을 다루는 책이다. 아들러는 프로이트와 융과 함께 3대 심리학자라고 불린다고 하는데, 이런 대가를 전엔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사실 대화체에다가 글자 폰트도 꽤 컸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는데, 책을 덮고 나니 그렇게 읽을 책이 아녔다. 인상 깊은 문구도 워낙 많아 필사하기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개인적인 생각도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적었던 것 같다.
이렇게 내가 공감하면서 읽었던 이유는 그만큼 아들러의 이론이 내 고민과 맞닿아있는 부분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들러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뼈를 때렸다. 이제부터 어떤 부분에서 내가 그토록 사무치게 팩트 폭행을 당했는가 공유하고자 한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부모님과 커다란 갈등 없이 자라왔다. 소위 말하는 속 썩이지 않는 자식이었던 것 같다. 크게 사고 치지 않고, 말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해서 남부럽지 않은 대학도 졸업했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부모님은 언제나 자랑스러워하셨다.
나 또한 부모님의 의견을 존중했다. 인생의 선배로서 그들은 존경했고, 부모님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경험치가 나보다 높기에 더 합리적인 선택을 권유하실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 설 때면 부모님의 의견을 여쭸던 것 같다.
하지만 아들러는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내 인생을 살고 있지 않다며 비판했다. 그는 “과제의 분리”라는 개념을 통해 타인(설사 부모님이더라도)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삶을 바람직하지 못한 생활양식이라고 주장했다.
솔직한 말로 아들러의 비판을 듣고 나니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예전엔 인식하지 못했는데, 내 결정이 부모님의 뜻을 거슬렀던 적이 드물었던 것이 매우 드물었다는 점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단순히 조언받는 것을 넘어서 무의식에서의 내가 부모님의 기대대로 산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인정받기를 바란 나머지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라는 타인의 기대를 따라 살게 되지. 즉 진정한 자신을 버리고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되는 거라네.
아들러는 이를 보고 내게 용기가 부족하다고 외쳤다. 그것은 바로 “미움받을 용기”다. 자신의 삶을 살면서 수반되는 미움을 받는 것이 무서워서 나는 나대로 살기를 포기했던 것이다.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중략)... 아들러의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일세.
그렇다면 어떻게 미움받을 용기를 찾아낼 수 있을까? 아들러는 이에 대한 해답도 제시해주었다. 그것의 첫걸음은 바로 “과제의 분리”다.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기준으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하는 과정이다.
실제로 내가 부모님께 조언을 구했던 결정들은 전부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는 결정들이었다. 즉, 그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온전히 나 자신의 과제였던 것이다. 선택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결과는 나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먼저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를 생각하게. 그리고 과제를 분리하게. 어디까지가 내 과제이고, 어디서부터가 타인의 과제인가. 냉정하게 선을 긋는걸세. 그리고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말게.
아들러가 주장하는 과제의 분리는 어떤 대상에 관해서도 예외는 없어야 한다. 그것이 연인이나 친구가 되었든, 심지어 가족이 되었든 말이다. 오히려 거리가 가까운 가족일수록 과제를 의식적으로 분리할 필요성이 크다고 말했다.
물론 우리 부모님은 정말 최고의 부모님이시다. 진심으로 우리의 행복을 바라시고 그만큼 많은 사랑을 주신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사실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진정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드린다면 그들이 정말 나를 미워할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자랑스러워하실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랑 넘치는 우리 부모님은 그러실 분이다. 그러니 주저 말고 내 과제를 책임지고 짊어져 가자. 그것이 한없이 무겁더라도 말이다.
<미움받을 용기>에서 내가 인상 깊게 읽었던 두 번째 부분은 바로 공헌감에 관한 부분이었다. 공헌감이라는 개념은 내가 여태껏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말로 형용할 수 없었던 가치관을 정확히 표현해준 단어였다.
특히 최근 군대에서 정말 이상한 기분이 많이 들었었다. 군대에 있다는 내 상황과는 맞지 않게 하루하루가 너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군대가 체질이라는 심한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운동과 공부 등 열심히 산 것도 맞긴 하지만, 그것들은 내가 일반인 신분이었을 때도 열심히 했던 것들이었는데 말이다.
아들러는 이에 대한 원인을 정확히 분석했다. 내가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공헌감’에 있다. 아들러가 말하는 공헌감이란 다음과 같다.
공헌감 = 진짜 공헌을 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고, 타인에게 공헌할 때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감각
아들러는 “공헌감이 곧 행복”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공헌감을 통해 ‘타자 공헌’을 실현하고, 이는 나 자신이 가치 있음을 느낌으로써 ‘자기수용’을 실현하며, 자기수용은 또 주변 사람들을 믿을 힘을 불러일으켜 ‘타자 신뢰’를 가능케 한다. 타자 신뢰는 다시금 타자 공헌으로 이어지면서 선순환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행복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이는 내가 군대에서 행복한 이유를 정확히 설명해준다. 여기서는 내가 “가치 있음”을 몸소 느끼기 때문이다. 여단장님을 모시는 CP 병으로서 나는 작게는 옆 동료, 나아가 여단, 더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안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대학 졸업 이후에도 입시한다며 집에서 공부만 했을 땐 느끼지 못하는 감정이었다.
정말 신기했던 것은 내가 기여한다는 것이 꼭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괜찮았다는 점이다. 일개 병사가 국방력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가. 내가 하는 일이 분명 다른 인원으로 대체 가능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 된다는 만족감만으로도 꽤나 큰 행복함을 느끼고 있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이 나중에 은퇴하면 확 늙는다는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지만, 일을 통해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 역할을 한다는 공헌감을 느끼기가 보다 쉬울 것 같기 때문이다. 돈 많은 백수, 혹은 빠른 은퇴를 더는 바라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노동을 통해 타인에게 공헌하고, 공동체에 헌신하며,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감하지. 나아가서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받아들이게 되지.
이런 생각까지 도달하고 나니, 지금 공부도 보람 있으면서도 하루빨리 일을 시작해서 떳떳한 사회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현재’에 대한 강조다. 사실 현재를 강조했던 책들은 정말 많았다. 훈련소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여덟 단어>에서도 감명 깊게 읽었다. 그러나 아들러 판 “현재”는 이론적 설명까지 덧붙여져 또 색다른 단어로 다가왔다.
아들러는 우리의 삶을 찰나라는 여러 점들이 모인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삶이 하나로 연결된 선이라 주장하는 프로이트의 이론과는 상충한다. 아들러는 자신의 이런 이론을 보고 ‘에네르게이아적 인생,’ 즉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좀 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야 하네. 과거가 보이는 것 같고, 미래가 예측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자네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지 않고 희미한 빛 속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일세.
즉, 과거의 일생이 나를 컨트롤할 수 없고, 미래의 일들 또한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 말을 통해 나는 언제든 내가 현재 마음만 먹으면 행복해질 수 있고, 또 변화를 위해 나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삶을 춤에 비유하기에 이른다.
춤을 출 때는 춤추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춤을 추면서 어디론가 가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지. 그래도 춤춘 결과 어딘가에 도달하겠지.
그렇다면 나는 춤을 추듯 살았었을까? 나는 단호하게 “NO”라고 대답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지금, 여기’에 사는 것을 잘 해내지 못한 것 같다. 특히 과거도 과거지만, 항상 내 시선을 미래를 향해있었다.
물론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온전히 나는 눈앞에 있는 공부에 몰입하기보다,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걱정했었다. 불확실한 미래가 불안해 계획을 세우고, 이걸 또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모두 내가 온전히 공부하는 데에 쓸 수도 있었던 시간들이다.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건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태도가 아닐세...(중략)... 매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수식을 풀고 단어를 외운다, 즉 춤을 추는 거지. 그러면 반드시 ‘오늘 해낸 일’이 있을 거야. 오늘이라는 하루는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거네. 절대 먼 장래에 있을 대학입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말들은 어쩌면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말이다. 어차피 미래는 불확실의 연속이기에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 곳에 에너지를 쏟기보다 차라리 ‘지금, 여기’ 내 눈앞에 있는 문제 하나를 더 풀었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군대 안에서도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요즘, 나는 현재에 살았을 때의 이점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오늘 할 일을 적고 난 이후에는 계획을 그만두고, 한 문제, 한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그리고 내가 푼 문제에 온전히 집중해서 복습까지 하고 나면, 내가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가 보이면서 실질적인 개선책이 눈앞에 또 다가와 있다. 이전엔 경험하지 못했던 신기한 현상이다.
현재를 살다 보니 당장 내가 예전 같았으면 가졌을 걱정에 할애할 에너지도 용납되지 않는다. 눈앞에 당장 개선할 부분이 떡하니 보이는데, 이걸 해결하면서 레벨업 하기도 바쁘니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하루하루 개선되고 있다는 느낌에서 엄청난 성취감도 느끼고 있다.
<미움받을 용기>는 쉽게 읽히지만, 결코 빨리 읽을 수 없다. 그만큼 생각할 재료가 듬뿍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3개의 소제목이 아니라 10개의 소제목으로 나누더라도 쓸 말이 넘쳐날 것 같다. 하지만 여백의 미덕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 자신을 자제할 줄도 알아야 하기에 여기서 멈추겠다.
하지만 인생이 답답한데 해답을 모르겠다면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용기를 부여해주는 따뜻한 심리학을 통해 인생을 다시금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