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근대며 12시를 기다린다. 아빠가 바라보고 있는 거실 TV가 쉴 새 없이 새천년에 관해서 떠든다. 나는 TV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새천년이 되면 전기가 나갈지, 은행이 마비될지, 다른 재밌는 일이 생길지 너무 궁금해서 온 집안을 뛰어다닌다. 엄마는 진료실에서 밤늦은 업무를 보고 있다. 평소 우리 집 답지 않게 밤늦게까지 온 방마다 켜져 있는 불이 좋아서 깡총대며 엄마에게 달려간다. 엄마는 내가 재잘대는 전기나 은행에 대한 궁금증을 적당히 들어주면서 바삐 움직인다. 나는 이내 또 다른 흥미가 돋아서 거실로 달려간다. 카운트 다운이 시작됐다. 10, 9, 8, 7, 6, 5, 4, 3, 2, 1, 0. !!!! 새천년의 시작이다. 새천년, 그 2000년에 나는 3학년, 열 살이 되었다. 우악스럽게 쥐어뜯긴 상처들이 눈처럼 내리기 시작한 열 살이다.
몇십 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나에겐 열 살 무렵의 어느 날 밤이 그렇다. 나는 잠들었다가 엄마 아빠의 싸우는 소리에 깨어났다. 잠에 덜 깬 채로 어리둥절했다. 엄마는 세상이 떠나가라 울며 아빠에게 소리 지른다. 아빠가 무언갈 잘못했나 보다. 아빠가 무릎을 꿇는다. 아빠가 잘못을 빈다. 엄마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있다.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애들 돌보고 쌔빠지게 돈 버는 동안 당신은 다른 여자한테 사랑한다는 쪽지나 날리고 있었어? 당신이 사람이야? 당신이 그러고도 아빠고 가장이야?! 이 여자가 뭐라고 썼는지 알아? 불쌍한 마누라 부인한테 잘해주래. 이게 내가 들어야 될 소리야!!! 당신 미쳤어!!! 당신 무릎 꿇어, 나한테 잘못했다고 빌어. 이럴 수는 없는 거야. 나한테 이럴 수는 없는 거야." 나는 동생을 끌어안아 이불 구석으로 간다. 동생이 굳어있다. 나는 이건 아무것도 아닌 상황이라고 알려주고 싶다. 언제나처럼 싸우고 지나갈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동생을 끌어안아 장난을 쳐준다. 꺄르륵. 12월에 태어나 아직 5살에 가까운 내 동생이 웃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웃는다고 혼이 났다. 나는 동생을 데리고 부엌 옆방으로 간다. 거기서 동생을 안아주던 기억이 이 날의 마지막 기억이다. 그리고 아마 이 날 아빠는 도망쳤던 것 같다. 보름 동안이었는지, 한 달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이날 엄마에게는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생겼다. 그 구멍을 가진 채로 양손에 우리를 데리고 아빠를 찾으러 나섰다. 나라면 아빠랑 헤어졌을 텐데. 엄마는 우리를 아빠 없는 자식 만들고 싶지 않아 했다.
우리는 고모집에서도 살고 이모집이나 외갓집에도 갔다. 아빠는 연락두절. 엄마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아빠를 찾았다. 고모들에게, 삼촌에게, 할머니에게 우리에게 있었던 일을 알리고 아빠를 찾았다. 이모들에게 외할머니에게 속상함을 말하고 울었다. 우리는 엄마 없이 대전 고모집에 있었다. 고모는 맛있는 것도 사주고 만화영화도 보여주었다. 우리를 돌보시면서 주식창도 들여다보고, 퇴근하고 들어오는 고모부와 같이 한숨도 쉬셨다. 우리를 딱하게 생각했고 따뜻하게 대해주려 하셨지만 나와 동생은 숨죽이고 조용히 했다.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었고,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했으니까. 나는 말 잘 듣고 동생을 잘 챙기는 첫째 딸이 되어 엄마를 기다렸다. 아빠를 기다렸다.
어떻게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엄마는 결국 아빠와 연락이 닿았고, 앞으로 잘해보기로 했는지, 그냥 돌아오라 했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엄마는 지금까지 단 한순간조차 그때의 아빠를 용서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날부터 엄마는 아빠를 믿지 못했다. 아주 간단한 말부터 아주 중요한 말까지. 아빠도 그랬다. 아빠도 거짓말을 많이 했다. 엄마와 싸우고 싶지 않아서 그랬고, 아빠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다. 우리 집엔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블랙홀과 같은 검은 구멍이 있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게 엄마 마음속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니 우리 가족 모두에게 생겨있던 구멍이었다.
4학년이 되었다. 나는 인자한 미소와 따뜻한 목소리를 가진 아주 좋은 담임선생님을 만났고,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한 습관이 생겨버렸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 학교 뒷문의 문구점을 들러서 과자를 구경한다. 힐끔, 주인 할머니가 tv 보는 것을 확인하곤 촉촉한 초코칩 하나를 주머니에 챙긴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죄짓는 느낌이다. 1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인사하고 문구점을 나선다. 성공이다. 근데 고작 초코칩 하나, 그냥 돈주고 사면 되지 이게 뭐라고.. 나는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고 집에 간다. 하지만 다음 날도 문구점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우리 동네 중심부에는 큰 문구점도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문구점이었는데, 거기에는 예쁜 볼펜이며 액세서리며 공책과 인형이 가득했다. 나는 종종 그곳에서 문구류를 사곤 했다. 그런데 4학년이 되고부터는 여기서도 도벽을 참지 못했다. 처음에는 지우개였나, 볼펜이었나. 작은 물건들을 슬쩍했다. 나는 그 큰 문구점에 근무하는 언니나 아줌마들과도 아주 친했기 때문에 의심받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모든 것을 훔친 것은 아니고 돈을 주고 산 물건도 많았으니까. 돈이 없던 것도 아닌데, 이해할 수 없게도 나는 그렇게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해갔다. 아무도 모르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누군가는 멈춰주기를 바라면서.
들킨 것은 한순간이었다. 부모님 친구분 집에 가서 놀았을 때, 그 집에 아주 예쁜 도장이 있었다. 나는 예쁜 것을 갖고 싶었고, 그 도장을 달라고 어른들에게 말하기보다 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주변을 살피곤 바지 주머니에 예쁜 도장 두 개를 슬쩍 넣었다.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예쁜 도장을 갖게 되었다는 것에 설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날 밤, 빨래를 위해 내 바지 주머니를 뒤집던 엄마에게 나는 도장을 훔친 것을 들켜버렸다. 그날 자고 있다 깨워졌는지, 자려다가 혼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다. 다른 것도 훔친 적이 있는지 물었다. 내가 그날 모든 사실을 말했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날 학교 문구점 할머니가 우리 엄마에게 전화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엄마와 함께 그 집에 다시 가서 도장을 돌려주었고, 문구점 할머니께도 사과드리며 잘못을 말했고,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문구점 언니들에게도 고개 숙여 사과드렸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던 4학년 담임선생님에게도 혼났다. 남아서 반성문을 쓰는데, 아주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내가 아주 좋아하던 그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실망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그러곤 나의 도벽 습관은 사라졌다. 애초에 돈이 없던 것도 아니었기에 왜 생겼는지 조차 모르겠던 습관이었다. 한 달 후쯤이었나, 등굣길에 3000원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곤, 주워서 담임선생님께 갔다 드렸다. 담임선생님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가 달라졌다는 것에 기뻐하셨다.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이유 모르게 생긴 내 도벽을 잊어갔다. 그러다가 스물다섯쯤에 이 이야기를 남자친구에게 했을 때, 남자친구가 해준 말이 놀라웠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으로 생긴 나쁜 습관이 아니야. 네가 그때 힘든 일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그런 거야.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태어나서 도벽이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처음 들었다. 당연히 못된 나의 손버릇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스트레스받은 어린 내가 그렇게라도 나 힘들어요라고 말했던 거라니. 머리가 멍-했다.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말하니, 그게 맞다고 했다. 너는 잘못이 없고, 네가 힘들어서 그랬던 거라고. 그걸 알려준 그 남자친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어린 시절 지은 가장 큰 죄를 용서받은 느낌이었다. 그래, 내 잘못이 아니구나.
도벽처럼, 엄마 아빠가 싸우고 아빠가 집을 나간 그날이 영향을 준 일들은 너무 많다. 지금까지는 그냥,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고 모른 체 했는데, 그러지 말아야겠다. 모른 체하다가 다른 곳에서 이상하게 튀어나와 나를 괴롭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나는 그냥 다 - 있는 그대로, 기억나는 그대로 적을 거다. 더함도 뺌도 없이, 나의 상처들을 기록하다 보면, 책장은 넘어가고, 나에게 새로운 페이지의 새로운 내용이 나타날 거라 믿는다. 그리고 서른두 살의 내가 과거의 문장들 사이사이에서 무언가 다른 의미를 발견할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한 스푼 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