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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도피처, 판타지 소설

내가 나이기 위해서 _ 직면 #2

by Benn

열한 살, 4학년의 나는 학교 앞 서점을 구경하다가 처음으로 장르문학을 발견하게 된다. 원래는 동화작가들이 쓴 이야기들만이 세상의 책의 전부인 줄 알았고, 그것만으로도 책에 빠져들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처음 접하는 판타지 장르문학은 신세계였다. 신간 코너였을까, 지금 찾아보니 2001년 7월 27일에 처음 발간된 전민희 작가의 [룬의 아이들-윈터러]가 나의 첫 판타지 소설이었던 것 같다. 아니 사실 조금 헷갈리는데, 분명히 이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도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뭐가 먼저인지 잘 모르겠다. 조금 더 쉬운 해리포터가 나의 첫 판타지 소설이었을까? 영영 모를 일이다. 하지만 룬의 아이들을 발견하고 부모님을 졸라 구입하기까지의 기억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나는 힘들었다. 밝고 재밌게 사는 아이였지만 부모님의 불행과 검은구멍과 싸움들이 힘들었다. 그런 나에게 나보다도 더 힘든 환경에서 마법과도 같은 성장을 하게 되는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 존재 자체로 위로였고, 나를 이입할 수 있는 대상, 손쉽게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가 되었다. [룬의 아이들-윈터러]나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7번이 넘도록 읽었던 책이다. 처음 만나는 그 책들을 달달 외워서 그 마법 주문이나 인물관계도를 훤히 꿰고 나면 나도 그들의 세계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 복잡한 주인공들의 이름과 마법주문과 그들의 여행기를 게걸스럽게 읽었다.


보리스 진네만, 예프넨 진네만, 이솔레스티, 다프넨, 달의 사제, 오벨리스크, 달의 섬, 윈터러와 스노우가드, 트레바체스 공화국과 에메라 호수, 란지에 로젠크란츠, 나우플리온 - 눈을 감고 떠오르기만 해도 아련한 이름들이 떠오른다. 보리스는 어렸고, 약했고, 집안에 일어난 수많은 불행과 형의 죽음 앞에 무력했지만 살아갔다. 살아남았다.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보리스의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작가 전민희가 좋아하는 시를 소개해본다.



Invictus -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

나를 감싸고 있는 밤은
온통 칠흑 같은 암흑
억누를 수 없는 내 영혼에
신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라도 감사한다.

잔인한 환경의 마수에서
나는 움츠리거나 울지 않았다.
내리치는 위험 속에서
내 머리는 피투성이지만 굽히지 않았다.

분노와 눈물의 이 땅을 넘어
어둠의 공포만이 어렴풋하다.
그리고 오랜 재앙의 세월이 흘러도
나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 것이다.

문이 얼마나 좁은지
아무리 많은 형벌이 날 기다릴지라도 중요치 않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나는 내 영혼의 선장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나는 내 영혼의 선장. 열한 살, 열두 살의 나는 너무 어려 지금처럼 이 말의 의미를 다 알지는 못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말이 그렇게 좋았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나는 내 영혼의 선장. 나는 지금도 이 말이 좋아 눈시울이 젖는다. 삶의 파도 속에서 -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삶의 파도 속에서 - 파도가 휘몰아쳐도 나는 주인이고 선장이니, 그걸로 되었다. 그걸로 되었다.


나는 소설 덕분에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현실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들을 소설 속에서 배웠다. 정의로울 것을, 살아남을 것을, 따뜻함을, 사랑을, 위대함에 대한 찬사를, 우정을, 용기를, 비겁함에 대한 대가를, 한 사람의 힘을, 여럿이 함께함의 힘을 배웠다. 그러니 내가 어찌 판타지 소설을 그저 흥미로만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무수히 많은 소설을 읽었다. 흥미만으로 읽은 고등학생이 쓴 소설도 있었지만, 어른 작가가 쓴 인생을 관통하는 소설들에 울고 웃고 가슴을 부여잡기도 했다. 언제까지? 지금까지. 지금도 나는 종종 소설 속으로 도망간다. 잘 쓰인 소설 속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답을 찾는다. 작가가 무심하게 던져 넣은 대사들 속에 내 삶의 답이 있을까 싶어 헤맨다.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기도 했기에.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 보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소설은 10권이고 20권이고 지나쳐 끝이 나고, 나를 다시 현실로 뱉어낸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현실로 돌아올 때쯤이면 나는 조금 달라져있다. 인생이 좀 환기되었달까. 다시 살아볼 힘이 난다. 다시 부딪혀볼 용기가 난다. 그래서 그렇게 나는 돌아온다. 그래서 그렇게 나는 돌아왔다.


이제 나는 열두 살 때처럼 밤새 부엉이가 날아와 나에게 호그와트 입학 편지를 전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해리포터와 함께 성인이 되지도 않는다. 어린 날처럼 소설만이 나의 위로가 아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기억하고 싶고, 그럼에도 앞으로 함께할 장르소설에 대한 찬가를 여기서 마친다.


나를 구한 장르소설들의 목록(기억나는 대로)

해리포터 시리즈 (초4~대학생)
룬의 아이들 - 윈터러 (초4~초6)
룬의 아이들 - 데모닉 (중학생~고등학생)
세월의 돌 (중학생)
가즈나이트 (중학생)
드래곤라자 (중학생)
하얀늑대들 (고등학생)
S.K.T (고등학생)
달빛조각사 (대학생)
전지적 독자 시점 (성인)
화산귀환 (성인)
광마회귀 (성인)
세상의 끝에서 클리어를 외치다(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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