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덤한 듯 진지하게 단어가 말을 걸 때#5 공간
덤덤한 듯 진지하게 단어가 말을 걸 때
#5 공간
저만치 기울어 붉게 부서지는 햇빛이 창문에 닿아있다. 창문 건너 보이는 가로등은 추운 날씨에 조금 더 빨리 빛을 낸다. 글쓰기 좋은 넓은 나무 테이블 귀퉁이엔 오늘 저녁으로 먹을 치아바타가 바스락거리는 종이봉지에 담겨있고 그 옆엔 입가심으로 먹은 요거트의 흔적이 남아있다. 잔잔한 분위기의 노래가 흘러나오지만 제목이나 가수는 알 수 없다. 내용을 알 수 없는 옆 테이블 할머니의 잔잔한 목소리가 듣기 좋고, 카운터 쪽에서 주문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간간히 들린다. 테이블 위 조명은 따뜻한 흰색, 어둡지 않아 글을 읽고 쓰기 좋다. 반질반질하게 광을 낸 붉은 나무 마루 위에 러그가 깔려있다. 청소하기 어렵지 않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그저 그 따뜻한 느낌이 좋다는 생각에 시선이 머무른다. 따듯한 색의 조명이 하나 둘 켜지니 공간에는 차분함이 더해진다.
공간에는 힘이 있다. 그리고 나는 공간의 힘에 상당히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다. 그래서 때와 분위기에 맞는 장소를 찾는 일에 진심을 다한다. 햇살 부서지는 날 책을 읽을 때, 흐린 가을 날 글을 써야 할 때, 친구와 단 둘이 편안하게 이야기할 때 적당한 공간은 저마다 다르다. 공간의 위치나 분위기, 크기, 손님들의 방문시간대도 모두 고려 요소가 된다. 그리고 대체로, 이렇게 다각도로 생각한 후 방문했을 때의 선택에 120% 만족이다.
특히 무언가 할 일이 있을 때는 공간의 힘을 더 크게 빌린다. 마치 게임에서의 버프처럼 집중력이나 영감, 창의력 등을 공간에서 빌려올 수 있기 때문인데, 요즘은 주로 글을 쓸 때가 그렇다. 적당한 테이블만 있다면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다. 대단히 중요하거나 예술적이거나 돈이 되는 글은 아니지만 그냥 이 순간들이 좋다. 좋아하는 공간에 담겨(음악과 대화소리, 햇빛과 조명, 커튼과 가구들, 그 속에.)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집이라는 공간과 또 다른 매력을 가진 공간들을 사랑한다. 요즘처럼 카페가 많은 시대에 태어난 것도 행운이랄까. 어느새 해가 다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