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시대의 인간다움에 대한 기독교적 시각
Ⅰ. 들어가는 말
2014년 개봉한 영화 <트랜센던스Transcendence>는 최첨단 과학 기술을 수단으로 하여 인간의 한계성을 초월한 한 인간과 그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제목인 ‘트랜센던스(Transcendence)’는 ‘초월, 탁월’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는데 아마도 이는 트랜스/포스트 휴머니즘(transhumanism)에 관한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조금 더 간결한 단어를 사용하여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왜냐하면 트랜스/포스트 휴머니즘은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것처럼 과학기술을 통한 향상된 인간에 대한 오늘날 자연과학과 인문학 전반에 걸쳐 논의되고 있는 담론이기 때문이다. 본 글은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인간론 수업의 내용을 바탕으로 영화 <트랜센던스> 이야기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트랜스/포스트 휴머니즘의 담론에 대하여 간략한 소개를 하고, 판넨베르크의 인간론에 기초하여 과학기술 시대의 인간다움에 대한 평가와 제안을 제시하는 영화 감상보고서이다.
Ⅱ. 영화 <트랜센던스>와 트랜스/포스트 휴머니즘
영화는 과학 기술에 의한 일종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혹은 디스토피아의 세상에서 주인공의 친구인 맥스 박사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과거를 회상하며 그는 “인류와 기술의 충돌은 예견 된 일이었는지도 모르기에” 현재의 상황이 “불가피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독백한다. 이는 더욱 가속화 되어 급진적인 진보를 이루는 과학기술에 대한 인정이 그 바탕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잠시 영화 속 이야기 너머의 감독/작가의 상상력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맥스의 독백에는 감독/작가의 과학기술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위한 과학기술이 인간의 존재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반영된 과학기술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영화의 핵심 갈등 양상인 동시에 결말이다. 이러한 인식의 철학적 기반은 기술을 수단으로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근대 계몽주의에서 피어난 인간중심주의의 해체라는 현대철학의 사상을 공유한다. 그래서 영화에서 표현되는 진보한 과학기술인 초인공지능 AI 슈퍼컴퓨터이자 트랜스/포스트 휴머니즘일 수도 있는 존재와 인류의 대결 구도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앞서 필자는 Ⅰ. 들어가는 말에서 이 영화를 “최첨단 과학 기술을 수단으로 하여 인간의 한계성을 초월한 한 인간과 그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라고 평했다. 영화에서는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한 과학기술과 철학을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감독/작가가 이를 대하는 방식, 그러니까 영화 내에서 초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시선(반응)은 일종의 두려움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 과학기술의 영역이 아닌 일반의 영역에서도 우리는 이미 AI 인공지능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갖고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사람의 두뇌처럼 신경망 구조로 작동하는 구글의 딥마인드(Google DeepMind)가 개발한 알파고(AlphaGo)의 등장, OpenAI의 챗지피티(ChatGPT)의 대중화, 그리고 명령어만으로 그림과 영상을 만들어 내는 ‘생성형 AI’까지 인공지능의 성장은 이미 놀라울 정도이다. 더욱이 눈부신 과학 기술 진보의 속도를 생각해 보면 이보다 편리하고 뛰어난 기술을 인간이 활용하게 된다는 기대감은 더욱 커져만 간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AI의 등장 때부터 제기 되어 온 두려움 역시 더욱 커져간다. ‘인공지능의 대부’로 알려진 제프리 힌턴(Geoffrey Everest Hinton) 박사는 구글을 그만두며 AI 발전으로 인한 위험성이 증가하고 있고, AI의 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곧 넘어설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이제 AI의 기술의 진보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안고 그 규제 방안에 대해서 지속적인 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영화 <트랜센던스>는 이러한 상상력과 논의의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영화적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에게 과학기술의 진보를 비평적으로 생각해 보게 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의 메시지가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이 영화의 진정성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다만 영화가 말하고 있는 범위 안에서 비평적 시각을 갖고 우리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영화의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맥스 박사의 짧은 회상이 끝나면 인류 재앙의 서막이 되는 ‘EVOLVE THE FUTURE’ 포럼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조니 뎁이 주연한 천재 과학자 윌 캐스터 박사는 자각능력과 물리적으로 독립된 신경망을 가진 AI 슈퍼컴퓨터 ‘PINN’을 개발하고 연구하고 있었다. 포럼에서 그의 친구이자 동료인 맥스 박사와 연인 에블린 박사가 연설하듯이 이 연구의 목적은 암의 조기진단 기술과 치매 치료법 개발로써 생명을 살리는 데 있다. PINN이라는 지능적인 기계의 도움을 받아 인류의 난제를 해결하고, 빈곤과 기아를 퇴치하고, 지구를 치유하며,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고자 하는 유토피아가 이들 과학자들 연구의 종착지인 것이다.
윌은 “자각력 있는 기계는 온라인이 되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습니다. 단 시간 내에 이 기계의 분석능력은 전 인류의 지적능력을 합친 것보다 위대해질 겁니다.”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초지능을 가진 AI 슈퍼컴퓨터의 출현에 대해 위협을 느끼는 ‘RIFT’라는 단체는 “인공지능은 인류를 위협하는 혐오스러운 존재다”라는 성명서를 내고 연구에 참여한 과학자들에게 테러를 가한다. 테러로 인해 일부 과학자들은 목숨을 잃었고 윌은 심각한 부상을 당하여 곧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에 윌의 연인이자 동료 과학자 에블린은 윌의 정신을 PINN에 업로드 하기로 결심한다.
‘정신은 전기적 신호일 뿐’이라는 에블린의 과학철학은 데카르트의 견해에서 비롯하여 뇌를 정신의 위치로 해석하는 두뇌중심주의적 사고의 반영으로써 윌의 뇌에 전극을 심어서 정신을 전송하는 ‘Mind Transfer’ 또는 ‘Mind Uploading’ 기술이라는 아직 현대 과학기술에서는 실현되지 않은 영화적 상상력이다. 이러한 영화적 상상력이 이 영화의 핵심이기도 한데, 이것이 바로 트랜스/포스트 휴머니즘에 대한 담론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이다.
트랜스/포스트 휴머니즘은 과학 기술의 발전과 인간됨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개념으로써 트랜스 휴머니즘은 ‘과학기술을 수단으로 하여 그 능력에 있어서 획기적으로 개선된 인간을 지향’하는 반면에, 포스트 휴머니즘은 ‘현재의 인간과는 구별되는 다른 종으로서의 존재의 출현’을 논의의 중심으로 삼기에 두 개념은 서로 구별되는 개념이다. 두 개념은 논의의 지향점에 있어서 서로 구분되지만 두 개념 모두 과학 기술을 토대로 지금과는 다른 미래의 인간 개념에서 말한다는 점에서는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마인드 업로딩 기술을 사용하여 윌의 정신을 컴퓨터에 전송하고 죽어가는 윌의 육체를 극복한 새로운 형태의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한다는 개념은 트랜스 휴머니즘의 논의와 포스트 휴머니즘의 논의 모두에서 적용이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두 개념의 엄밀한 구분이 어렵기 때문에 독일의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스트인 야니라 로(Jania Loh)는 트랜스 휴머니즘, 기술적 휴머니즘, 비판적 포스트 휴머니즘의 세 분류로 나누고 있는데, 이 분류에 따르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마인드 업로딩 기술을 사용한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 그리고 인간의 지적 능력을 압도적으로 넘어서는 ‘초지능’을 가진 존재가 되어버리는 윌에 대한 개념은 기술적 포스트 휴머니즘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적 포스트 휴머니즘에 대해서는 실현 불가능한 과학 기술이라는 비판과 함께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스트들에 의해 정신과 신체의 분리라는 이원론적 인간 이해에 기초한 계몽주의적 휴머니즘의 한계를 계승하고 있기에 인간중심주의가 극복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의 구분과는 별도로 영화 내에서는 마인드 업로딩 기술을 사용하여 정신을 컴퓨터에 이식한 윌이 과연 인간일 때의 윌과 동일한 존재냐는 질문이 던져진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윌의 정신을 마인드 업로딩 하고자 하는 에블린의 계획에 맥스는 먼저 윌은 원숭이가 아니라며 윤리적 문제로 반대하고, 이어서 윌의 생각이나 추억을 하나라도 놓치면 다른 사람이 돼버릴 거라면서 완벽한 복제본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인간 정체성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엄밀하게는 정밀한 기술의 실현 가능 여부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문제제기이기도 한 것이다.
필자는 앞서 인류와의 대결 구도에 있는 존재에 대하여 AI 슈퍼컴퓨터이자 트랜스/포스트 휴머니즘적 존재일 수도 있다고 그 존재에 대하여 명확하지 않게 기술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맥스의 질문이자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일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인드 업로딩을 통해 존재하게 된 존재가 인간의 본질을 갖고 있는 존재인지 초인공지능 AI 슈퍼컴퓨터인지는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질문이며 보고자는 이를 다음 장에서 과학기술 시대의 인간다움에 대한 기독교적 시각을 통해서 살펴 볼 것이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맥스의 질문에 이어지는 영화의 다음 전개를 간략히 살펴보자면, 에블린은 윌의 정신을 PINN에 이식하는 마인드 업로딩 기술을 실현시킨다. 그리고 윌은 온라인에 접속해서 전세계에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신적 존재가 되고, 나노 기술을 사용하여 인간의 신체 능력을 초월하는 힘을 부여하거나 조종하며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하지만 이를 저지하는 세력의 바이러스 공격에 감염되어 최후를 맞게 된다. 영화상에서는 거의 전지전능하다고 여겨지는 신적 존재가 되어버린 윌이 허무하게 바이러스 감염으로 최후를 맞게 된 것이 다소 개연성이 떨어지는 전개라고 느껴지기는 하지만 현재 논의되고 있는 트랜스/포스트 휴머니즘의 담론을 반영하여 가까운 미래를 상상해볼 수 있던 점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없는 영화였다.
Ⅲ. 과학기술 시대의 인간다움에 대한 기독교적 시각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세기 1:27).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신앙고백은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인간에 대한 신학적 신앙적 이해의 절대적 기준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보고자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다움에 대한 기독교적 시각이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바울과 신약성서적 말씀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하나님 형상성에 대한 제사장 문서의 구절을 바울과 그 이후의 신약성서적 말씀의 빛 속에서 읽어야 한다. 거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믿는 자들이 그 형상으로 변화한다고 말해진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창세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특징을 이해함에 있어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그 형상으로 변화되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다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우선 파악되어야 할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또한 ‘인간은 그 형상으로 변화한다’고 진술한 것처럼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이를 하나님의 형상의 유사성으로 보았고, 그래서 인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실현되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의 완전한 실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적으로 시작된 인간의 규정”이며, “다른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함으로써 그 규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 이 규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마치 나사렛 예수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구분하는 가운데 비로소 영의 하나 되게 하는 활동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사귐의 연합에 참여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가운데- 인간은 “아버지로부터 자기를 구별하는 가운데 아들이 영을 통해 아버지와 연합”하는 것처럼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구별 지으면서 자신의 “유한성을 수용”하는 활동을 통해서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사귐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판넨베르크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다움은 예수께서 아버지로부터 자신을 구분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완전히 규정하였듯이, 인간은 예수께서 아버지와 자신을 구분하는 ‘차이와 질서의 원리’에 따라서 ‘유한성을 수용’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자기 구별을 통해서 인간은 인간다움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독교 신학에서 다루는 인간다움과 과학기술 시대의 인간다움은 어떤 점에서 다른가?
교육과 문명화를 통해 인간다움을 추구한 휴머니즘에서 과학 기술을 사용한 향상된 인간으로서의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트랜스/포스트 휴머니즘은 기본적으로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주체에서 기독교의 인간다움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현재의 신체적·지적 능력을 초월하는 기술적 특이점을 지향함으로써 인간다움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과 유한성을 수용함 가운데 차이와 질서의 원리로 신과 타자와 관계 맺기를 추구하는 인간다움의 지향점 역시 다르다.
이렇듯 신과의 관계, 타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기를 추구하는 기독교의 인간다움과 과학기술 시대의 인간다움은 일치하는 노선에 오를 수 없는 주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과학기술 시대의 인간다움의 논의에 기독교가 침묵하거나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종말론적 신앙의 태도 가운데서 언제나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묻고 답하며 신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다움을 추구해 왔다. 그것은 조금 진보한 과학 기술 시대의 미래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때에도 여전히 기독교는 기독교의 인간다움에 대한 신학적·신앙적 태도 가운데 현실을 살아갈 것이다.
근대의 휴머니즘이 갖고 있던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극복하는 시도 가운데 포스트 휴머니즘이 등장하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존재 규정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서의 포스트 휴머니즘적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철학 사조가 등장과 함께 또 다른 인간다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질 것이다. 기독교는 이러한 변화 가운데 언제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재하며 세상에 인간다움의 표준을 제시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과학기술에 일조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과학기술을 활용하고 규제하는 일에 있어서 기독교의 인간다움의 시각은 현실을 살아가고 미래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