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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전초이 Apr 27. 2020

아바타라도 괜찮아.



나는 어제 아바타가 되었다.






압베(appendectomy 충수절제술을 뜻함)를

직접 해보는 것은

우리 전공의에겐 기회다.



예전에는 레지던트 때 많은 수술을 직접 집도했다고 한다.

압베는 기본 중에 기본이요,

꼴레(cholecystectomy 담낭절제술) 또한

꽤나 많이 했다고 하며

암 수술도 했다고 하니,

예전에는 참 많은 집도 기회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엔 다르다.

펠로우 선생님들도 있고

교수님에 따라서는

압베도 항상 본인이 직접 집도하는 분들이 있고

주 80시간 전공의 특별법으로

당직 수도 예전보다는 줄어서

집도 기회가 확실히 줄어들었다.

     


나도 무려 2년 이상 외과 트레이닝 중이지만

압베를 직접 집도한 것은

양손 손가락으로도 충분할 정도로 적다.

    


당직이었던 어제,

응급실에 내원한 단순 충수염 환자분의 수술을

집도할 기회가 주어졌다.

굿~!



실제로 해본 것은 몇 번 안되지만

옆에서 본 것은 정말 백번 이상은 되는 것 같다.



머릿속으로 압베를 어떻게 할지

지금까지의 경험들의 기억의 조각들을 모으고 모아서

이미지 트레이닝에 돌입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외과수술 아틀라스’라는

수술 과정이 그림과 함께 자세히 나온 책도 읽어보고

유투브에서 수술 과정이 담긴 영상을 찾아서

여러 번 돌려봤다.


교수님들에 따라서 하시는 방식이 약간씩은 다르기 때문에

당직 교수님의 스타일을 떠올리며

구체적으로 다른 디테일을 살려

머릿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수술실에 들어선다.     



흠, 뭔가 떨린다.



수술 보조(assist)를 하러 들어갈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이전에 집도 기회가 있었을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오늘은 느낌이 사뭇 달랐다.



연차가 올라가면서 좋은 건

잡일이 줄어서 공부할 시간이 늘었다는 것이고


좋지 않은 건 이런 느낌이 들 때이다.

약간의 부담감이 느껴진다.

3년 차가 이것도 못하니?

3년 차가 아직도 이걸 몰라?

이러한 말들.     


무엇보다 그냥,

내가 이 수술을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밴드 공연할 때도 그렇고,

무언가 할 때 긴장을 해도 손을 떨거나 그러진 않는다.     



‘그래, 지금껏 수십 번 이상 봐온 수술이고,

여러 번 해봤잖아.

차분하게 하나씩 해나가면 충분히 할 수 있어.’

라며 마음을 가라 앉힌다.



환자분이 수술실로 입실하고 마취과에서 마취를 건다.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압베 몇 번이나 해봤니?”

“대여섯 번 해본 것 같습니다.”

“음, 그래? 서전초이 네가 지금 몇 년차지?”

“3년차입니다. 교수님.”

“그래. 할 수 있겠니?”

“네, 교수님.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항상 준비된 자세여야 한다.)

“그래, 봐줄테니까 잘 해보거라.”

“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그래, 잘해보자. 할 수 있다.’




“인턴샘이 스콥(scope 복강경) 좀 잡아줘요.”

“네, 선생님.”     



환자가 마취가 된 후 수술이 시작됐다.     




“칼 주세요.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배꼽 위를 절개하고 수술기구로 조직을 잡고

조직을 절개하며 수술을 진행했다.     

때로는 약간 버벅거리기도 했다.     



배꼽을 닫을 때는

뒤에 계시던 교수님께서

“얌마! 왜 거기부터 하는거야?”

“네? 교수님? 아, 네, 알겠습니다. 여기부터 하겠습니다.”     

라며 호통을 치시기도 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무난하게 수술을 잘 끝났다.     

때론 땀이 삐질삐질 나기도 했지만

과정 하나하나를 무리없이 진행했다.



아, 물론 종종 나는 아바타가 되었다.



“아, 서전초이야. 거기 말고 그 아래를 박리하거라.”

“이럴 때는 왼손을 좀 더 위로 들어서 당기는 게 좋아.”

“흠, 여기 보비로 한 번만 더 지지는 게 낫겠는데.”

“거즈로 압베 자른 데 좀 닦아보자.”

..     



흠, ‘종종’이 아니라 ‘거의’ 그냥 아바타였던 것 같다.


그래도 느낌은 달랐다.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것을 옆에서 보면 큰 감흥이 없다.

뭐든지 쉽게쉽게 하기 때문에 진짜 쉬운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과정을 내가 해보니

정말 다르다.



아바타처럼 시키는 그대로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시키는 그대로’하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고

백번 보는 것은 한 번 해보는 것만 못하다고 했던가.



그래도 (아바타처럼 했지만) 끝까지 수술을 마치니 뿌듯했다.


무엇보다도 다시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약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 무엇보다도 이런 기회를 주신 교수님께 정말 감사했다.  



수술이 끝난 후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카톡을 남겼다.     



‘교수님 오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덕분에 좀 더 감을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에도 기회 주시면

오늘 과정을 복기 잘해서 더욱 잘 해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래, 지금은 아바타라도 괜찮아.     







feat. 슬기로운 의사생활


김준완 흉부외과 교수님이 도재학 흉부외과 치프샘에게 수술 집도 기회를 준다.



수술 집도 기회를 얻게 된 도재학 치프샘의 모습은

잔뜩 긴장한 듯한 눈빛. 동공지진 중인 흉부외과 치프샘. 정신이 호...혼미합니다.


이러하다.




수술이 시작된다.

“정진호 환아 ASD closure 시작하겠습니다. 집도의 도재학(흉부외과 치프샘), 퍼스트(어시스턴트) 김준완(흉부외과 교수님)입니다. 시작하시죠. 도재학 선생님.”

김준완 흉부외과 교수님이 직접 퍼스트 어시스트를 서면서 치프샘에게 집도할 기회를 준다.





남의 곤란한 일은 꿀잼이랑께. 얄미운 마취과 선생님들(로 추측되는 분들).





아바타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그쪽을 째면 안되지. 정확하게 안열면 다른데 다쳐.”

“엔도카디움까지 정확하게 다 떠야지.

눈에 보이는 겉에만 꼬매면 나중에 거기서 피난다.”

“거긴 너무 깊게 뜨지 말고.”

..




그래도 무난히 성공적인 집도를 마치고

“교수님, 기회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더 잘하겠습니다.”





그거슨, 행복한 마무리였다.



그래, 지금은 아바타라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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