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1.화

by 유세미나

지지 받지 못함을 느끼는 순간은 파괴적이다.

그것은 곧 나의 역사의 파괴를 의미하고, 과거에 내렸던 나의 선택으로부터의 단절과 미래에 기대했을 법한 나의 희망의 종식을 일컫는다.

그렇기에 지지 받지 못한다는 것은 나라는 역사의 일시적 상실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섣불리 대답하기 어려운 것은 지지 받지 못함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비단 주체뿐만이 아니라 이 폭력의 객체마저 명확하지 않을 때가 있다.

주위 사람들과 환경이 나를 지지 하지 않는다 느끼는 것은 나라는 역사에 대한 그들의 지지 포기인가 나 스스로가 내리는 나에 대한 형벌인가. 그랬을 때 받는 형벌의 대상은 비로소 나 자신인가 아니면 나를 이루는 환경들인가. 끝내 마주하게 될 상실은 나라는 주체의 결정인가 혹은 타인이라는 객체의 간섭인가.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은 나무를 향한 지지가 될 수도 나무를 부러뜨리는 화살이 될 수도 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내 뿌리는 바람 정도는 우스워보일 정도로 깊게 내렸다. 그런데, 내 뿌리의 시작을 아는 사람이 파내어 버리는 수모에는 나의 단단한 껍질도 피칠갑이 되는 듯하다. 자연스레 바람은 내 뿌리를 건들일 수 없으나, 뿌리를 건드리는 의도적인 바람은 나의 나무를 파괴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파괴적인 지지의 불이행을 결정 짓는 것은 그대의 의도성인가 혹은 나의 뿌리와의 인접성인가. 무엇이 되었든 명백한 것은 여전히 나는 객체이기도 주체이기도 한 것이다. 나에 대한 파괴를 내 손으로 할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이 끝내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자기 침전의 굴레에 빠지게 한다. 필연성에 대한 심오한 고찰 역시 결국 나에게 귀결되는 형국이다.


굴레에 빠지면 결국 허무주의에 이르는 듯 하다. 주체와 객체를 논할 가치를 종국엔 잃어버리고, 나라는 역사의 상실에 대해선 '어쩔 수 없었지'라는 다소 편한 변명으로 합리화해버린다. 어쩔 수 없게 버려진 나의 역사책엔 얼마나 많은 인연들과 시간들이 희생되었을까. 이 또한 나의 과거를 책임지지 못한 현재의 나의 잘못이라는 순환 논증에 빠지게 된다. 지지를 포기하는 폭력은 이미 현재의 내가 잘못되었음을 상정한다. 결과가 잘못되기 위해선 전제도 잘못되어야 한다. 결국 나의 과거는 치기 어리고 탐욕적인 선택들로 가득찬다. 그들이 지켜냈다 믿는 나의 미래는 나의 그러한 미숙함으로부터의 완전한 탈피가 마치 나에게 주어지는 형벌 속의 보상인 듯 속삭인다.


오늘도 나는 나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였다. 근래 인생이 그렇게 살기 힘들다던데, 쉽게 포기한 나의 지지는 영락없이 부끄러운 일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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