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아이 컴플렉스, 더 커뮤니티
위선자 : 겉으로만 착한 체하는 사람 [옥스퍼드 사전]
나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필연보다는 우연에 의한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계획과 부단한 노력에도 도달하지 못한 깨달음들이 있었던 반면에,
철저하게도 의도성이 배제된 무언가가 불현듯 가슴에 울림을 주는 순간들이 많았다.
최근에 우연히 알게 되어 급속도로 친해진 사람이 있다.
일하는 분야도, 관심사도 딱히 비슷한 구석을 찾을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대화가 정말 잘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에게는 '대화가 잘 통한다'라는 것이 굉장히 의미 있는 경험이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폭넓은 주제의 넓고 얕은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우연히 그 사람의 TCI 검사 (유명한 심리 검사 중 하나로, 타고난 기질을 알려준다) 결과가
나와 굉장히 유사함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람도 심리 검사를 간략하게 할 줄 아는 것이 하나 있어 간단하게 받았는데,
내 속 깊은 심리를 파고드는 결과를 보고 놀라웠기도 했다.
예전 같았으면 솔직하지 않게 자기 방어를 하며 결과를 부인했을 거 같은데,
자기 수용이 익숙해진 난 그 결과에 도리어 놀라워하며
현재의 내가 되기까지 바뀌어 간 나의 개인적인 서사에 대해서도 간결히 털어놓았다.
자세한 결과를 여기에 말한 순 없지만,
요지는 나에게 '착한 아이 컴플렉스'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숱하게 들었던 이야기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진짜 순하고 착했었다는 둥,
부모님 속도 안 썩였다는 둥.
다만 나는 내가 착하지 않다는 것을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고,
그 심리 결과에서도 내가 많은 분노를 절제하고 때로는 순응하며 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나의 내면의 모습을 알고 또 그 모습을 사랑한다.
그리고 내가 '착한 아이'로서,
내 주변과 사회가 조금 더 나아지길 바라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내 모습도 사랑한다.
다만, 이를 형용할 수 있는 단어가 그때의 나에겐 없었던 거 같다.
그 심리 결과 후에, 내가 새로운 깨달음 얻기까지 두 번의 징검다리를 더 건너야 했다.
그 사람은 어느 때와 같이 나와 대화를 나누다 문득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참 신기하네. 너와 나는 타고난 기질이 이렇게나 같은데 어떻게 성격이 완전 반대지? MBTI도 다르고 말이야
나는 웃으며 그래서 MBTI는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진지하게 그 사람의 이야기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 사람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덧붙였는데,
참고로 나의 MBTI는 ENFJ이고 그 사람의 MBTI는 INTP였다
나는 경계가 심한 편이라, 원래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굉장히 까칠하고 수동적이야.
그래서 난 네가 신기해. 너는 왜 그렇게 처음부터 친절하고 호의적이었어?
그 사람은 나의 친절과 호의를 보고 (왜 친한 척하지라고 말했었다),
내가 나쁜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범죄의 의도가 있을 거 같아 처음엔 좀 멀리하려고 했었다고 하는 말에,
굉장히 재밌었던 기억이 난다.
그 사람은 나를 '위선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어떠한 의도를 가진 착한 척하는 사람.
나는 그 사람의 물음 아닌 물음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나도 기본적으로 경계가 심한 편이야. 우린 기질이 같잖아.
그런데, 나는 경계가 심할수록 원래 더 친절하게 보이고 호의적으로 대하는 거 같아.
그 뒤엔 이렇게 덧붙였던 거 같다.
우리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분명 다른 것들을 마주했을 것이라고.
다른 관계와 상황 속에서,
우리가 택한 사회적 전략이 각기 다른 양상을 띠지만
그 속성은 모두 '자기 보호를 위한 경계'였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장난반 진심반으로 이런 이야기를 던졌다.
나는 ENFJ들이 싫어. 다들 겉과 속이 달라 보이거든. 꼭 위선자 같아. 사실은 그 누구보다 인정 욕구가 많은 사람들일 거야.
상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의아한 듯 웃으며 말했다.
지금 자기 자신을 디스하고 있는 거냐고, 너의 MBTI도 ENFJ가 아니냐고.
나는 내가 다른 ENFJ들과는 다르다 말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그들처럼 '위선자'였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았다.
'위선자'는 사전적 정의도 그렇고,
사회나 뉴스에서도 보통 부정적인 단어로 쓰인다.
우리는 때론 정치인이나 연예인, 기업인들을 보며 '위선자'란 꼬리표를 붙이기도 한다.
내 개인적으로는 '위선자'를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말만 번지르르하고 정작 중요할 땐 행동으로 옮기진 않거나 계산하기 바쁜 사람들'
나는 항상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난, 어쩌면 ENFJ들이 싫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있어서 ENFJ라는 MBTI를 고른 사람들은,
이상향을 굉장히 높게 잡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 굳이 따지면 난 MBTI를 그렇게 믿지 않지만,
'INFP'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들도 ENFJ처럼 착한 척 하지만,
적어도 ENFJ처럼 인정 욕구가 많고 겉과 속이 달라 보이진 않는다.
최근에 재밌게 본 '더 커뮤니티'라는 웨이브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거기서 유튜버 '천재 이승국'님의 인생 이야기가,
나의 깨달음을 향한 마지막 돌다리였다.
저는 주변에서 굉장히 나이스한 사람으로 인식돼요. 하지만, 그건 전부 제 위선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제가 착하다고 칭찬하고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착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좋은 위선자'가 되기 위하여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위 인용이 이승국님이 말씀하신 이야기를 온전히 옮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저런 이야기를 들렸었다.
'좋은 위선자', '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때로는 감정이나 가치관에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깨달음을 안겨주는 거 같다.
나는 나의 친절과 호의가,
나의 절제와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그와 같이 느낀다.
태생적으로 착하지 않은 내가,
친절과 호의로 관계를 맺어나가는 방법을 터득해내가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수많은 이름과 얼굴 모르는 이들에게도,
'좋은 위선자'로서 세상을 이롭게 만들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