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LA ANVIL114
* 셰에라자드로부터 콘텐츠 제작비용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프리미엄 이어폰?
유선 이어폰의 금액 범주는 굉장히 넓습니다. 신사임당 한 장을 건넨 후 거슬러 받는 제품도 있고, 몇 달치 월급을 깡그리 털어야 겨우 구매할 수 있는 제품도 있죠. 이들을 대략적인 세 구간으로 나눈다면 30만원 이하 제품은 엔트리급, 30만원부터 100만원까지의 제품은 미들급, 100만원을 초과하면 프리미엄 등급입니다.
반박하실 분도 물론 계실 테지만, 제가 보기에 금액은 98%의 확률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제조사가 바보가 아니라면 시장에 판매되고 있는 다른 제품들의 금액을 비교하면서 가격을 책정할 테니까요. 이 정도 수준이라면 이 정도 금액을 매길 수 있겠군? 이런 식으로 시세(?)가 형성되는 겁니다. 경험상 엔트리급 금액대의 제품에서 느껴지는 사운드는 대체로 엔트리급 사운드이며, 미들급 금액대의 제품에서 느껴지는 사운드는 역시나 미들급 수준이고, 프리미엄 등급은 확실히 그 아래 제품들과 선을 긋는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금액 산정 범주의 틀에서 벗어난 제품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당연히 가성비를 넘어 갓성비로 칭송받거나, 금액에 0을 하나 더 붙여도 되겠다는 등의 극찬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이 제품들이 모든 면에서 한두단계 높은 등급의 제품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느냐, 그건 아닙니다. 특정 속성에서만 그래요. 디자인이나 만듦새가 엄청나게 뛰어나다든가, 아주 특별한 소재나 기술을 사용했다든가, 듣는 음악 장르를 하나로 제한했을 때라든가, 음질 / 음악성 / 현장감 셋 중에 하나에만 몰빵해서 그걸로만 겨루었던가 하는 거지요.
오늘 소개할 PULA의 ANVIL114라는 이어폰은 미들급에 겨우 턱걸이할 정도의 금액이지만 '나는 모든 면에서 프리미엄 이어폰과 대등하다' 라고 주장하는 대담무쌍한 친구입니다. 저는 허허허허허 웃으며 이 녀석을 한껏 귀여워 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 PULA ANVIL 114
PULA(扑拉)는 '구하다, 찾다, 탐색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중국의 이어폰 브랜드로, 여태 이어폰을 3개밖에 내놓지 않았을 정도로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신생입니다. 제 생각에 이런 신참 브랜드야말로 주제와 분수를 모르는, 용감한 시도의 배경이자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대박나면 한방에 메이저로 가는거예요. 마침 ANVIL114는 PULA라는 브랜드를 메이저로 보낼 만큼의 슈퍼스타 자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다섯가지 근거를 차근차근 풀어가보도록 하지요.
- 첫번째 근거, 자신감
ANVIL은 대장장이의 모루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장인정신을 새기는 의미라고 합니다. 완성된 장비가 아니라 그저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바탕, 제작도구라는 점에서 이 브랜드의 잠재성과 야망을 짚어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출시할 제품들에 비하면 이 녀석은 겨우 ‘도구’에 불과하다는 말이니까요. 금액은 329,000원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미들급 턱걸이예요.
114는 드라이버 구성입니다. (1DD + 1BC + 4BA) 골전도 드라이버가 눈에 띄죠. 골전도 드라이버를 채용하는 브랜드는 대부분 프리미엄 등급이 주력입니다. 그 이유는 골전도 드라이버 자체가 어떤 소리를 재생한다기보다 우 - 우 하는 소리의 분위기나 울림을 약간 더해주는 형태로 나타나며, 이걸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성능이 떨어지거나 멍청한 사운드를 낼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골전도 드라이버 자체의 음질은 여타 DD, BA, EST에 비해 상당히 떨어집니다. 당연히 음 튜닝에 통달했다는 자신감이 내재된 브랜드만이 선택할 수 있는 드라이버인 것이죠.
- 두번째 근거, 디자인
'구매한 이어폰마다 디자인이 다릅니다'
이런 경우를 종종 만나보긴 했는데, 보통 금액이 낮은 제품에서는 이런 시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불량이잖아?' 라는 인상이 더 먼저거든요. 고가로 가면 모든 면에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함에 따라 자연스러운 소재를 사용해 디자인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불규칙적인 무늬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내가 구매하는 모델이 어떤 고유의 무늬를 갖게 될지 기대하게 되는 거죠. 커스텀 이어폰을 구매할 때의 심리 - '이 세상에 유일한 나만의 디자인을 갖는다' 와 비슷한 면이 있겠습니다.
ANVIL114는 주로 프리미엄 등급의 이어폰에서 사용되던 스테빌라이즈 우드 페이스 플레이트를 채용했습니다. 우드의 자연스럽고 불규칙적인 결을 그대로 살린 고급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 브랜드가 기존에 선보인 PA01, PA02 제품에서도 고가 제품에서만 사용되던 용비늘 페이스 플레이트가 사용되었더라고요. 프리미엄 이어폰만이 입장 가능한 클럽의 드레스코드는 일단 갖추었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 세번째 근거, 사운드
ANVIL114는 완벽에 가까운, 밸런스가 잘 갖춰진 올라운더 타입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밸런스는 일차원적인(?) 고중저의 음역대 밸런스가 아니라 제가 언제나 주창하는 사운드의 3요소 - 음질 / 음악성 / 공간감(현장감)이 기준입니다. 엔트리급~미들급에서는 이 3요소 중에 한두가지만 충족되는 경우가 많고, 프리미엄 등급으로 가야지 3요소가 비로소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프리미엄 이어폰이라 하더라도 이 3요소의 밸런스가 맞는 경우는 드뭅니다. 가장 희귀한 것이 훌륭한 공간 연출인데, 이건 아무래도 이어폰이라는 카테고리가 가지는 한계 때문이지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공간 연출이 뛰어난 이어폰들은 보통 끝판왕 이어폰으로 불리는 녀석들입니다.
보통 30만원 전후의 엔트리~미들급 라인에서는 음질을 최우선하기 때문에 이 이어폰의 첫인상은 비슷한 금액대의 경쟁 모델에 비교했을 때 점수가 낮을 수 있습니다. 소리의 끝 모양이 둥글어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선예도가 낮으며, 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뭔가 귀에 확 꽂히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서 더 그렇습니다. 반대로 프리미엄 급의 이어폰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이어폰의 평가는 높아집니다.
초등학교 교실에 들어가 반 친구들에게 소원이 뭐냐고 물었을 때 대부분은 '부자가 됐으면 좋겠다', '몸짱이나 얼짱이 됐으면 좋겠다', '가족이 모두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대답을 하지만 그 중에 한 명은 '인류의 번영과 세계 평화, 영혼의 안식' 이라고 대답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보법이 다르지요. 비슷한 금액대의 경쟁 제품들과 바라보는 시야가 너무 달라서 이 제품을 파악할 때 '금액'이라는 기준을 잠시 접어두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들어봤던 이어폰 중에 가장 비슷한 이어폰을 떠올려보면, 아직까지 제가 NO.1 이어폰으로 꼽는 엘리시안 어쿠스틱 랩스의 어나이얼레이터입니다. 물론 등급 차이가 많이 나기는 한데, 모든 장르에 거침없이 장점을 발휘한다는 점, 공간 연출력(크기 + 모양)에서 오는 자연스러움, 그리고 한 음 한 음 무게있게 짚어가며 압도되는 카리스마를 풍긴다는 점에서 아들 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아, 금액 차이가 워낙 많이 나니 손자 뻘이라고 할까요.
진짜 엘리시안에서 만들었다고 해도 의심을 안했을 것 같은 사운드를 지니고 있어요. 엘리시안 제품 중에 저렴한 제품이 없고, 그나마 저렴한 필그림은 높은 해상도를 기본으로 하는 레퍼런스 성향이라 어나이얼레이터와는 꽤 차이가 있으니 어나이얼레이터가 최종 목표인 분께 추천할 아주 적절한 이어폰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 네번째 근거, 여유
앞서 금액대로 나눈 세가지 구간의 특징을 하나 더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엔트리급을 초심자로, 미들급을 숙련자로, 프리미엄급을 전문가로 각각 치환한 뒤, 각각 어떤 업무를 수행하고 있고 그걸 지켜보는 입장이 되었다는 가정입니다.
초심자는 뭔가 어설픕니다. 행동거지에 군더더기가 많아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데 진척도는 오히려 느립니다. 마감에 맞추는 것도 겨우겨우라는 느낌이예요. 숙련자를 보면 어느정도 안정감이 있고 속도도 빠른데 정확합니다. 정해진 기간에 맞춰 완성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걱정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전문가를 보죠. 일단 표정이 평온합니다. 작업을 하는 것이 마치 숨쉬듯 자연스럽습니다. 뭔가 대충대충하는 것 같기도 하고 느리게도 보입니다. 말을 걸어도 농담으로 받아치는데 희한하게 작업 속도는 가장 빠릅니다. 여유가 흘러넘쳐요.
핵심은 조급함 VS 안정감 VS 여유로움 입니다. 이것들이 각각 엔트리급 / 미들급 / 프리미엄급의 사운드를 특징짓는 기준이 됩니다.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을 소리로 빡빡하게 채우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소리가 숨돌릴 여백을 남겨두어야 걔들도 편안하게 소리를 냅니다. 그래야만 듣는 사람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거죠. ANVIL114이라는 이어폰은 여유로움을 풀풀 풍긴다는 점에서 분명히 전문가 그룹에 속해있는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 다섯번째 근거, 모자람이 없다
이 이어폰은 이어팁을 4종이나 제공하고 있습니다. 기본기가 워낙에 출중한 이어폰이고 밸런스가 좋아서 굳이 안그래도 될 것 같은데(?), 모자람이 없다는 평을 듣고 싶은가 봅니다. 이어팁을 변경해도 전체적인 소리의 결은 거의 바뀌지 않는 편으로, 저는 이어팁에 따라 소리가 확확 바뀌는 것보다는 이쪽을 더 선호합니다. 이어팁에 따라 소리가 확확 바뀌는 제품은 뭔가 이어폰 자체보다 이어팁에 끌려다닌다는 인상을 받거든요. 뭐 그게 브랜드의 전략일수도 있긴 하지만요.
1순위 추천 - 점성이 높은 투명 팁 : 묘하게 아즈라 셀라스텍과 닮은 이어팁이네요. 음이 끈적이는 느낌을 주어 감성적인 면을 부각시킵니다. 이어팁이 부드럽게 살갗에 달라붙기 때문에 착용감도 가장 좋고요. 저는 늘 음악성을 최고로 치기 때문에 이 이어팁의 사운드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2순위 추천 - 흑백 이어팁 : 저음 강화형입니다. 저음의 양과 존재감을 증가시키고, 저음이 맺히는 위치를 아래쪽으로 끌어내려 무게중심을 낮춥니다. 안정감을 중시하거나 부드러운 저음이 감싸안는 느낌을 좋아하시면 추천드립니다.
3순위 추천 - 컬러 이어팁 : 고음의 비중을 높이고 위쪽으로 열린 공간에 좀 더 중점을 두며, 저음을 타이트하게 잡아 속도감을 향상시킵니다. 그런데 원래 이 이어폰이 타격감이 찰지거나 비트를 딱딱 짚어내는 그런 성향은 아니라서 그 점을 보강한다 해도 아주 맛깔나지는 않을겁니다.
4순위 추천 - 블루 2단팁 : 공간의 크기를 줄이고 집중력있게 모으는 타입입니다. 다만 이런 형태의 이어팁이 원래 그렇듯 착용감은 좋지 않고, 귀에 깊숙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물감도 강한 편입니다. 착용감도 그렇고, 이 이어폰의 큰 장점인 공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별로 권장하고 싶지 않은 이어팁입니다.
케이블도 2.5mm / 3.5mm / 4.4mm 단자를 다 지원합니다. 2.5mm와 4.4mm의 대결에서는 무엇하나 2.5mm가 나은 점이 없기 때문에 3.5mm와 4.4mm만을 비교하자면 3.5mm는 밀도감과 우직하게 밀어주는 힘이 좋고, 4.4mm는 공간과 사운드 양면에서 더 여유롭고 고급스러움을 표현해냅니다. 이 이어폰의 사운드 속성에 더 맞는 단자는 4.4mm 입니다.
- 옥에 티
이 이어폰이 진짜로 100만원을 넘는 프리미엄 이어폰들과 호선으로 겨룰 수 있느냐, 라는 질문에 주관적인 답변과 객관적인 답변이 갈립니다. 주관적인 답변은 물론 '네' 입니다. 객관적인 답변을 하자면 딱 하나가 걸립니다. 음질(해상력)입니다. 저는 사실 음질에 대해 그렇게까지 높은 가중치를 두지 않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놀랄만큼 상향 평준화되어 이제는 기준미달인 제품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극한의 음질을 추구하면 할수록 뭔가 온기와 열정이 사라진다고 해야할까, 차갑고 정적인 분위기가 느껴져 아쉽거든요.
프리미엄 이어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웅장하고 장엄한, 드라마틱한 연출을 여유롭게 하는 것을 주력으로 삼았고, 이때문에 음질을 희생시켜 나머지 요소에 힘을 더 주었을겁니다. 그래서 이 브랜드의 상급 제품을 만들기는 아주 쉬워 보입니다. 나머지 요소는 그대로 둔 채 해상력만 더 높이면 되거든요. 근데 달리 생각해보면 이거라도 부족하니까 이 제품이 30만원대로 책정되지 않았을까요?
- 너의 이름은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이어폰 자리를 말레이시아의 생소한 브랜드, 엘리시안 어쿠스틱 랩스가 차지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고로 브랜드란 역사와 규모가 어느정도는 있어야 신뢰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예체능계는 역시 재능 앞에서 다 부질없어지는 건가 봅니다.
어나이얼레이터라는 이어폰을 만난 후 엘리시안의 설립자 리콴민 이름 석자가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습니다. 그런데 PULA의 설립자 이름도 궁금해졌습니다. ‘천재 중의 천재’ 후보 명단에 올리고 싶어졌어요. PULA라는 신생 브랜드에서 엘리시안 어쿠스틱 랩스의 놀라움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돌하고 떳떳한 주장을 담아 만든 이어폰 ANVIL114, 기대하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