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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잘못 생각했었네요

final D8000 DC / D8000 DC Pro

by 범노래

* 셰에라자드로부터 콘텐츠 제작비용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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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인가 추리인가


저는 추리물을 좋아합니다. 문제를 내는 측과 문제를 푸는 측의 치열한 두뇌, 혹은 눈치 싸움이 흥미진진하거든요. 문제가 심층적이고 복잡한 구조일수록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집요하게 파고들어 실마리가 잡힐 때의 쾌감은 강렬합니다. 제가 하는 음향기기 리뷰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추리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어려운 문제를 내놓는 브랜드가 파이널입니다. 제시하는 메시지가 일반적인 기준과 다른 경우가 많고, 첫인상과 마지막 결론이 상반되는 반전이 자주 발생합니다. 오감과 더불어 상당한 상상력을 더해 풀가동시켜야 하지요. 덕분에 파이널의 리뷰는 언제나 흥미롭고 도파민이 팡팡 터집니다. 다 써놓고 읽어보면 이게 음향기기 리뷰인가 싶어요.


D8000은 파이널이 2018년에 선보인 플래그십 헤드폰으로, 감상용 D8000과 전문가용 D8000 Pro로 구분됩니다. 이 차이는 외관에서도 확연이 드러나는데, D8000은 블랙, D8000 Pro는 화이트 색상이여서 이들을 어둠과 빛의 대결로 소개한 기억이 납니다. 눈으로 보이는 컬러 만큼이나 귀로 들리는 소리도 컨셉에 맞게 명확한 대조를 보였거든요. 뭐 나중가니 반대되는 색상도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소리와 디자인을 약간 변경한 한정판도 출시되었습니다만 이번에 이 형제가 완전히 탈바꿈하여 새롭게 출시되었다고 합니다. 쓱 보기엔 디자인도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고, 흑 VS 백 대결 구도 역시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제품에는 DC라는 이상한 수식어가 달려있네요. 자, 이제부터 추리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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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Da capo인가


DC는 Da capo라고 해서 악보에 표기해 연주자에게 알리는 악상 기호이며, ‘처음으로 되돌아가라’ 라는 뜻입니다. 이 제품에 MK2가 달리지 않고 DC가 달린 이유는 기존 출시된 D8000 형제의 방향성이 틀렸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공표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방향성을 계승하는 MK2가 아니라 근본부터 뒤집겠다는 의미이지요. ‘니가 뭘 알고 그런 소리를 ㅋㅋㅋ’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물론 계시겠지요. 어디까지나 자칭 파이널 전문가인 제 추측일 뿐입니다. 절대로 파이널 오피셜이 아니니 귀담아듣지는 않는 것이 좋겠어요.


음향기기 명가 파이널의 최종 목표는 ‘듣지 말고 느껴라’ 입니다. 아주 많이 공감하는 주장이네요. 제가 생각하는 예술은 ‘이러이러하니까 저러저러하군’ 하며 머리로 이해하는 인과관계가 아닙니다. 그저 한순간 마음 속으로 훅 들어오는, 온몸의 근육이 제어되지 않고 전율하는 느낌일 뿐인 겁니다. 듣지 말고 느끼라는 이 메시지가 한방에 탁 전달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이런 깨달음의 과정엔 시간과 노력, 그리고 어느 정도의 학습이 필요하기 때문에 파이널의 제품 등급은 아주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시작점인 1000에서는 친절하게 하나하나 포장을 풀어헤치고 직접 꺼내어 떠먹이듯 들려줍니다. 윗 번호로 올라갈수록 점점 불친절(?)하게 바뀌다가 플래그십 8000이 되면 해당 카테고리에서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요, 8000에 이르러서는 뭔가를 들려주겠다는 직접적인 의도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파이널 유선 플래그십 A8000의 리뷰 제목은 ‘소리를 방목하다’ 였습니다. 그냥 모든 소리를 다 풀어놓고 관조적으로 바라보게 해두었죠. 내가 관심을 가지면 가까이 다가오고 관심을 두지 않으면 다가오지 않는, 방목이란 개념은 대단히 신기하게 다가왔습니다. 다른 모든 유선 이어폰과는 다른 접근 방식이었거든요. 또한 파이널 무선 플래그십 ZE8000의 리뷰 제목은 ‘다음 세대의 소리에 대한 고찰’ 이었습니다.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하자면 음악이 내 앞에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음악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이것 역시 다른 모든 무선 이어폰과는 다른 접근 방식이었지요. 두 모델 공통으로 들으려면 하면 안되고, 그냥 느껴야 좋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제가 작성한 파이널 제품 리뷰에서 꽤나 자주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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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D8000 형제는 결이 조금 달랐습니다. D8000은 엄청나게 어두운 배경과 그만큼 어둡고 무거운 저음을 통해 여태 모든 헤드폰들이 달성하지 못했던 음악성을 들려주고자 했고, D8000 Pro는 엄청나게 밝은 배경과 해상력으로 여태 모든 헤드폰들이 달성하지 못했던 음질을 들려주고자 했습니다. 그때 파이널은 문득 깨달은 겁니다.


8000은 그래서는 안돼.
들려주고자 하면
오히려 듣지 못하게 된단 말이야.


이를 바로잡고자 처음으로 되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레드썬! 기존의 D8000 형제는 없었던 겁니다. 장기연재 작품에서 흔히 발생하는 설정붕괴, 설정오류를 수정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네요.


사실 D8000은 파이널에서 처음으로 8000 넘버를 달게 된 모델입니다. 게다가 2018년 당시까지만 해도 파이널이 이어폰 전문이었지 헤드폰 분야에서는 거의 초짜였는데도 그 어느 헤드폰보다도 비싼 금액을 매겼기 때문에 다소 경직되어 있거나 뭔가에 취해있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만든 헤드폰이 이 정도의 퍼포먼스를 보이다니, 어서 빨리 강렬하게 전달하고 싶군! 우리의 실력을 평가 받아야겠어! 라고 말이지요. 가장 이른 시기에 대장 타이틀을 달았기 때문에 현재에 와서는 파이널 각 시리즈의 8000 넘버를 모두 대변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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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 우선 주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온 Da capo D8000 형제는 A8000이 그리는 사운드의 형태와 매우 비슷해졌습니다. 소리를 방목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이어폰 / 헤드폰의 개념인 소리가 공기를 통해 음파 에너지 형태로 내 귀에 전달된다는 느낌이 아니라 공간을 지어놓고 거기에 소리를 전시해 놓은 겁니다. 이 상태에서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그냥 놓여있기 때문에 내가 인식하고 의식해야 들을 수 있으며, 그보다 먼저 공간에 입장하는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결코 소리가 먼저 내게 다가오지는 않아요. 마치 연애의 한 갈래를 보는 듯하군요. 파이널이 설계와 밑작업을 다 해두었지만 결국 고백하는 것은 저란 말이지요.


소리보다 공간이 우선인 이 방식은 기묘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스피커에서는 상식에 가깝습니다. 어떤 스피커라도 공간을 잘 활용하지 않으면 좋은 소리가 안나옵니다. 공간을 소리보다 우선하기 위해 DC D8000 형제에는 많은 구조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1) AFDS 핵심 구조물의 구멍 직경과 깊이, 패턴을 모두 다시 설계하고 2) 드라이버 전방에 위치한 자석을 제거하여 약 70% 정도 개방 면적을 더 확보했으며(덕분에 무게도 100g 다이어트) 3) 전작대비 1.5배의 두께에 달하는, 마치 솜이불로 보일 정도의 두껍고 푹신한 이어패드를 채용하여 내부 공간의 폭을 최대한으로 확보했습니다. 이어패드가 두꺼워진 만큼 내외부 소재도 새로운 것으로 변경되었고요. 이건 또 특이하게 종이 소재랍니다. 이어패드를 종이 소재로 만들 수가 있나…?


* AFDS (Air Film Damping System : 공기의 흐름을 제어하여 사운드를 튜닝하는 D8000의 고유 특허 기술)


실질적으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드라이버 자체는 변한 게 없습니다. 그 만들어진 소리를 어떻게 바깥으로 내보낼 것이냐의 차이만 있어요. 이것이 우리 귀에는 공간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이런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대로 소리보다 먼저 공간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냥 스피커로 듣는다고 생각하면 대단히 쉬운 일인데, 막상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이 헤드폰이다 보니 인식을 바꾸는 건 참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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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감 VS 프로


제품 성격 자체가 바뀌면서 이들이 의도한 음감 VS 프로의 구도 역시 완전히 달라지는 양상을 보입니다. 전작에서는 이 둘의 성격이 너무나 달랐었는데 이번 형제는 꽤나 비슷하거든요. D8000은 음악성으로는 최고의 헤드폰이었고, D8000 Pro는 음질로 최고의 헤드폰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두 제품은 각 용도, 그 방향 외에는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서로 양극단에 위치하여 대립했던 것입니다.


음감용은 이래야 하고 전문가용은 저래야 한다는 확고한 기준점이 있었기 때문에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역할을 바꿀 수 없었죠. 그러나 이제는 D8000 DC에서도 엄청난 해상도를 느낄 수 있고, D8000 DC Pro에서도 농밀한 음악성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물을 양지에서 바라보나 음지에서 바라보나 그 사물의 속성 자체가 바뀌지는 않지요. 두 헤드폰은 본질적으로 똑같은 헤드폰이며, 놓인 환경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D8000 DC는 음감용으로 편안함에 우선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공간을 넓게 활용하고 귀에 부담을 주지 않는 방향으로 사운드가 튜닝되어 있지요. 더 차분하고 무게감과 안정감도 좋습니다. 반면 D8000 DC Pro는 전문가용으로 높은 성능에 주안점을 둡니다. 최대한 음을 더 섬세하고 세밀하게 표현하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빠르게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운드 차이가 결코 크진 않습니다. 따라서 D8000 DC Pro로 음감을 하거나 D8000 DC를 전문가들이 쓰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그렇게 추천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제품은 이제 용도의 구별이 아니라 취향 차이의 선택지가 되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음감용 헤드폰 따로, 전문가용 헤드폰 따로 구별해 2대를 보유하는 것이 상당한 부담입니다. 특히나 이렇게 종결급 헤드폰을 찾는다면 더 심하겠죠. 어지간하면 하나의 헤드폰으로 두루두루 쓰고 싶을 겁니다. 특정 용도라는 제약이 많은 판매로 이어지기 어렵기 때문에 이런 변화를 불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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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드폰 앰프


이 헤드폰들에는 두 종류의 케이블이 제공됩니다. 4.4mm 단자의 1.5m 길이, XLR 단자의 3m 길이입니다. 전작 D8000 형제에는 6.3mm 단자의 언밸런스 케이블이 제공되었으나 이번엔 아예 제외되고 밸런스 타입만 넣어줬습니다. 어차피 이 정도 헤드폰을 고려하는 분들은 0.01%라도 더 좋은 것이 있다면 그걸 선택할 테니 바람직한 변경입니다. 저는 사실 밸런스 타입이 언밸런스 타입에 비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제품 등급이 높을수록 밸런스 연결의 장점이 더 많기 때문에 등급이 높은 제품들은 밸런스로 연결하는 것을 더 추천합니다.


두 케이블 중에 저는 어지간하면 XLR 케이블을 사용하시길 권장드립니다. 소리보다 공간이 우선이라는, 이 헤드폰의 의도가 훨씬 더 강렬하게 전달되기 때문이지요. 케이블 소재는 동일한데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타나느냐, 제 경험상 뭐가 됐든 포터블용보다는 거치용으로 설계된 것의 성능이 좋습니다. 그리고 4.4mm는 포터블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단자이며, XLR은 거치용으로 만들어졌지요. 따라서 4.4mm 케이블은 이 거대한 최종병기를 휴대용으로 잠깐 사용하실, 피치 못할 때 사용하는 비상용으로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참고로 이 헤드폰은 제가 경험한 모든 헤드폰 중 가장 구동이 까다롭습니다. 거치형 헤드폰 앰프 중에서도 대형 헤드폰 구동에 욕심이 있는 제품들만 XLR 단자를 달아두는데, XLR 단자가 있다고 해서 이 헤드폰을 제대로 구동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애초에 이런 최상급의 제품을 기획하면서 ‘이런 저런 환경에도 다 쓸 수 있게 만들어야지’ 라는 접근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겁니다. 앰프 성능이 조금이라도 시원찮으면 소리가 깨갱거리면서 제가 여태 장황하게 설명한 내용들에 전혀 공감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거치형 제품에 연결하셔야 하며, DAC/AMP 일체형이 아니라 단독 헤드폰 앰프에 연결하시길 권장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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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드폰의 끝


파이널은 과거부터 ‘공간’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습니다. 파이널의 신제품을 만날 때마다 그 농도가 더 진해지고 완성도가 더 높아진 채 녹아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 스피커와 이어폰/헤드폰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그 날이 정말 와버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경지에 파이널이 한걸음 더 다가갔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완전히 탈바꿈한 파이널의 플래그십 헤드폰 D8000 DC / D8000 DC Pro 형제는 음질 / 음악성 / 공간감(현장감) 3박자에서 모두 헤드폰 최고 성능을 갖추게 됐습니다. 단지 D8000 DC가 조금 더 음악성 점수가 높고, D8000 DC Pro가 조금 더 음질 점수가 높을 뿐이예요. 이전 버전의 각 모델에 내재되었던 ‘미칠 것 같음 & 미친 것 같음’ 이란 속성은 사뭇 옅어졌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조금 아쉽게 느껴지지만 객관적으로 고른 평가를 받기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에는 이번 제품들이 훨씬 더 좋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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