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LA PA02
* 셰에라자드로부터 콘텐츠 제작 비용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과연 우연인가?
지난번 PULA의 ANVIL114를 리뷰하면서 이 브랜드의 설립자 이름을 알고 싶다, 두고두고 칭송해야 할 리스트에 올려야 할 것 같다며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찜찜함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 제품을 그거 딱 하나만 들어봤기 때문입니다. 소 뒷걸음질에 개구리 잡는다는 말처럼 우연히 그거 하나만 잘 뽑혔을 수도 있잖아요? 다행이 제 예상보다 빠른 시점에 이 브랜드의 다른 제품을 접해 의문을 해소할 수 있게 됐습니다. ANVIL114보다 먼저 출시되어 PULA의 이름을 알린 PA02입니다.
- PA02와 디자인
PULA AUDIO의 두번째 이어폰 PA02의 판매 금액은 299,000원, 10mm 1DD + 4BA 구조이니 ANVIL114에서 골전도 드라이버 하나가 빠졌네요. 플러그는 2.5mm / 3.5mm / 4.4mm 선택해서 주문하는 방식인데, 굳이 무선이 아니라 고급 유선 이어폰을 쓰겠다면 4.4mm가 가장 권장되는 만큼 국내에서는 4.4mm 모델만 판매하게 될 것 같습니다. ANVIL114처럼 교체용 플러그를 채용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네요.
PA02를 처음 딱 봤을 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친숙함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는 비전이어스의 VE7과 형제라고 여겨질 만큼 닮았거든요. 대단히 화려한 빛깔의, 보는 각도마다 다른 색감을 전달하여 눈길을 사로잡는 용비늘 페이스 플레이트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VE7과 비교하면 가격이 1/10에 불과한데도 꿀리지 않는 과감한 디자인을 채택했습니다. ANVIL114도 프리미엄 이어폰에서 볼 수 있었던 스테빌라이즈 우드 페이스 플레이트를 사용해서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었지요.
쉘 역시 프리미엄 이어폰 저리가라 할 만큼 크고 웅장합니다. 이어폰의 몸체 크기가 사운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울림통이 커서 나쁠 건 없습니다. 스케일이 큰 음악을 재생할수록 더 크고 자연스러운 모양의 공간이 연출될 가능성이 높아지니까요. 그러나 이런 크기는 착용이 잘 안되는 분들이 더러 있을 수 있습니다. 저야 체구가 커서 큰 이어폰들의 착용감에 문제가 없고, 오히려 어느정도 크기가 있어야 귀에 잘 고정된다는 느낌이라 작은 것보다는 낫다는 입장입니다. ANVIL114는 쉘의 크기가 작은 편이지만 골전도 드라이버로 헤드룸의 영역을 충분히 확장해주고 있기 때문에 PA02와 비슷한 규모의 공간을 연출해냅니다.
- 콩 심은 데 콩 난다
디자인에서 어느정도 확신을 얻고, 귀에 꽂고 재생하는 순간에 저는 결론을 확정짓게 되었습니다. PA02 / ANVIL114라는 두 모델을 관통하는 주제가 너무나도 뚜렷합니다. PULA의 설립자가 주장하는 것은 '프리미엄급의 이어폰을 엔트리급 금액으로 공급하는 마술을 보여주는 것' 입니다. 따라서 ANVL114 리뷰를 성실하게(?) 읽어주신 분들이라면 이 글의 내용이 꽤나 비슷하게 느껴질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동일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정리 요약부터 하겠습니다.
1) 30만원 언저리의 지나치게 부담되지는 않는 금액대
2) 예술성과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디자인 및 소재
3) 호불호 없이 좋은 착용감
4) 이어팁 종류에 따라 세부 튜닝 가능
5) 저음 / 중음 / 고음의 고른 밸런스
6) 음질 / 음악성 / 공간감(현장감)의 고른 밸런스
7) 보통의 차이파이와 차별되는 부드러움과 안정감
7번은 좀 길게 설명을 해야 되겠습니다. 사운드가 아주 강렬하지 않고 뜨뜻미지근하기 때문에 딱 들었을 때 이거다 싶은 느낌은 안들 수 있습니다. 보통의 차이파이 이어폰들은 좋은쪽으로나 나쁜쪽으로나 강렬한 편이라 첫인상은 강렬하지만 오래 듣기에는 좀 부담스럽지요. 이 브랜드는 '부드럽다'는 느낌이 가장 먼저 다가올 만큼 귀에 자극이 적습니다. 더불어 무게 중심이 낮아 안정감이 높은 편이고, 그만큼 유순하고 차분한 성향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또한 PULA 이어폰들이 공통적으로 높은 수준을 지향하고 있는 만큼 이어폰으로 음감생활하는 경력이 길고 프리미엄 급의 이어폰을 접해본 경험이 많을수록 평가가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브랜드의 제품은 비슷한 금액대의 제품과 비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가의 제품들과 비교했을 때 오히려 평가가 좋아집니다. 강한 상대를 만날수록 잠재력이 폭발하는 강백호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달까요.
- VS ANVIL114
PA02와 ANVIL114는 299,000원 VS 329,000원으로 금액차이가 크지 않아 이 둘을 비교할 때 확연한 급차이가 난다거나 완벽한 상하관계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약간의 방향성에 차이가 있는 정도라고 보는데, ANVIL114는 안정감과 풍성한 저음의 울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PA02는 선명한 고음과 깨끗한 생생함에 초점을 맞추어 보다 경쾌한 느낌을 줍니다. 골전도 드라이버 특유의 사운드가 녹아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가장 큰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상대적으로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거지 두 제품 모두 타 브랜드의 이어폰 대비 육각형 능력치가 고루 분배되어 있는 올라운더 속성입니다.
다만 좀 더 무난하고 정석적인 사운드를 내는 쪽은 PA02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난하고 정석적이라는 말은 브랜드의 개성이 옅고, 객관적으로 고른 평가를 받기에 용이하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이 브랜드의 역사가 짧은 만큼 더 과거에 출시된 모델이 안전빵을 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PA02 사운드를 요약하자면 담백하고 부드러운 올라운더 이어폰으로, 30만원 근처 금액에서 딱 하나만 이어폰을 선택해야 한다면 후보에 오를 제품입니다.
- 이어팁 선택
PA02에는 3종류의 이어팁이 제공됩니다. 블랙 실리콘 팁 / 레드 실리콘 팁 / 폼 팁입니다. 레드 실리콘은 고음 강화형, 블랙 실리콘은 중립, 폼 팁은 저음 강화형입니다. ANVIL114와 마찬가지로 이어팁의 변화가 치명적으로 소리를 바꾸진 않습니다. 아주 살짝씩 분위기를 바꿔준다는 느낌이 들어요.
제 추천은 블랙 실리콘 이어팁입니다. 이 이어폰은 여러모로 중립 성향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점을 가장 잘 살릴 수 있거든요. 폼 팁을 채용하게 되면 ANVIL114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레드 실리콘 팁을 쓰면 일반적인 차이파이 성향에 더 가까워집니다. 레드 실리콘 팁은 조금 날카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이 브랜드가 내세우고 있는 부드러움과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 번뜩이는 천재성과 치밀한 균형감
ANVIL114나 PA02를 실제로 경험해보신 분들이라면 '그냥 평이한 소리인 것 같은데 너무 높게 쳐주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론이 그거라면 할말이 없긴 합니다만...... 제가 이 브랜드의 사운드에 진정으로 감탄하는 것은 프리미엄 금액에 한참 못미치는데도 그들이 갖지 못한 균형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음질 / 음악성 / 공간감(현장감) 이 세가지 속성이 균등배분되어 있는데다 각각의 점수가 평균 이상으로 높다는 건 사운드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이 있다는 말입니다. 증거라고 하기엔 좀 뭣하지만 제가 그동안 경험해본 수 많은 음향기기 브랜드와 제품에서 이걸 달성한 경우가 진짜 희박합니다. 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설립자분이 아직 브랜드의 역사와 규모에서 자신이 없으니 터무니 없이 낮게 금액을 책정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예요.
어느 한 분야를 파고들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물론 대단한 일이지만, 모든 분야에 빠짐없이 괜찮을 확률이 훨씬 더 낮습니다. 결혼 중개 업체에서 하는 얘기를 종종 들어보셨을겁니다. '고객님이 나열한 이상형의 조건을 모두 다 만족하는 사람은 0.0001%가 안되는 아주 희박한 확률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운드 요소에서 평균 이상으로 균형잡히게 만든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능력이라 보통 규모가 크고 역사도 깊은 브랜드에서 내놓은 레퍼런스 / 스튜디오용 제품에서 이런 속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점수가 까일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는 느낌이랄까요.
PULA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감정과 감동, 힘까지 뽑아낸다는 점에서 천재성이라는 수식어를 아낌없이 붙여줄 수 있습니다. 음악에서 애잔함, 그리움, 연민 등의 침전되어 있는 옅은 감정을 인양할 수 있는 브랜드는 많지 않습니다. 이 능력을 부각시키기 위해 다른 사운드 요소들을 희생시키다 보면 호불호를 엄청나게 타는 제품이 탄생되기 마련이지요. PULA 제품들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 특히 PA02는 호불호 요소가 없다고 말해도 될 정도입니다.
- 넓은 시야와 넓은 포용력
이제와 생각해보니 PA02의 디자인은 화려한 용비늘이 아니라 우주를 형상화 한 것이 아닐까요. 패키지 옆에 이어폰을 나란히 두고 보니 공통된 방향성이 보입니다. PA02가 뛰어놀 무대는 지구가 아니라 우주급 스케일이라는 것을 은근히 스포일러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PA02가 비슷한 금액대의 제품에서 느껴지는 어떤 등급 기준을 뛰어넘는 넓은 시야와 넓은 포용력을 갖고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넓은 시야와 넓은 포용력을 갖고 있는 만큼 진중하고 신중하게 음을 재생합니다. 조급하거나 흥분하는 일이 없다는 말이지요. 이걸 반대로 느껴서 너무 느긋하거나 얌전빼는 사운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엔 양면성이 있고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관점 차이가 있을 것 같네요.
- 두번이면 우연이 아니다?
지난번 ANVIL114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브랜드는 여러모로 엘리시안 어쿠스틱 랩스와 비슷합니다. 역사가 짧고 규모가 작은 약점과 사운드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이란 장점을 가지고 있어요. 오로지 이 브랜드만이 가능한 예술성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오래오래 번창해서 훌륭한 제품들을 지속적으로 생산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다행이도(?) 엘리시안 어쿠스틱 랩스가 노리고 있는 것은 프리미엄 시장이고, PULA가 노리고 있는 것은 엔트리~미들 시장이니 겹칠 일은 없겠습니다만 두 브랜드가 영원히 영역을 확장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군요. 근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더 재미있는 비교가 가능할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