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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룸과 마음을 동시에 가득 채우는 궁극의 헤드폰

AUDEZE CRBN2

by 범노래

* 셰에라자드로부터 콘텐츠 제작 비용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궁극의 헤드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어느정도 정리가 끝났을 무렵 어머니는 저를 어느 병원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음료 박스도 하나 샀었지요. 아버지를 마지막까지 담당하셨던 의사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꽤나 젊어보이는 그 의사분은 어머니를 반갑게 맞아주셨고, 어머니는 그 의사분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남편의 몸과 마음을 모두 치료하는 참된 의료를 행하셨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진심 어린 말이 제게도 와닿으면서 어느샌가 눈시울이 붉어지더군요. 벌써 5년도 지난 이야기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마 평생동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을 치유하는 참된 의료라…… 제가 만났던 의사 중에는 진료 중에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아예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경우도 있었거든요(치과). 몸은 치료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마음은 뭐 그냥 그랬습니다. 요즘 시대에 유난을 떠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음향기기를 접하고 글을 쓰거나 말하는 데에 인생의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저는 음향기기의 여러 속성 중에 음악성을 가장 높이 평가합니다. 음악성이 진하면 진할수록 왠지 그걸 만든 사람의 진심이 잘 느껴지는 것 같거든요. 물론 제작자가 소비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다양합니다. 디자인, 착용감, 사운드, 사운드 중에서도 음질과 현장감을 위주로 공을 들이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니 이건 온전히 제 기준에서의 판단입니다.


'진정한 음향기기라면 소리를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마음까지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2025년 초여름, 저는 드디어 헤드룸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가득 채워주는 궁극의 헤드폰을 만났습니다. 여태까지 들어왔던 모든 헤드폰의 인상을 바꿔버릴 독특한 경험, AUDEZE의 CRBN2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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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BN의 탄생과 배경


평판-자력형 드라이버로 우주 최강인 미국의 오디지는 UCLA 의과대학에서 의뢰 하나를 받게 됩니다. MRI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헤드폰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지요. MRI 촬영을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그 속에서 30분 넘는 시간동안 움직이지도 못한 채 쾅쾅쾅쾅거리는 큰 소음에 시달려야 합니다.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못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꽤나 심각한 고문이었습니다. 보통 환자들은 아픈 상태이고 예민할 테니 아무래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아시다시피 MRI 촬영을 위해서는 내부에 자성을 가지는 금속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헤드폰의 기본 구성 요소에 반드시 들어가는 금속을 배제하고 만들어야 하다니, 이 무슨 모순입니까. 물을 쓰지 말고 요리하라는 요리 경연대회의 미션같군요. 그런데 오디지는 해냈습니다. 기존에 사용되던 평판-자력형 드라이버가 아니라 탄소 나노 튜브 필름 드라이버를 새로 개발한 겁니다. 오디지는 이 새로운 드라이버가 탑재된 헤드폰에 CRBN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소재 이름을 따 카본이라 읽지요.


아무리 헤드폰의 핵심이 드라이버라지만 그것만 새롭게 개발한다해서 헤드폰이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다른 모든 부품을 다 새로 설계해야 하죠. 그간 오디지는 모니터용, 음악감상용이라는 큰 틀에 맞추어 헤드폰을 만들어왔습니다. 허나 CRBN이라는 이 헤드폰을 개발할 때에는 '의료용'이라는 완전히 다른 목적과 방향성을 가지고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의 환자 입원실은 항상 적당한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고 적당한 조명은 물론 소음 수치마저 깐깐하게 관리됩니다. 이 헤드폰 역시 치료도구의 하나로서 환자의 심신안정이라는 목적에 부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헤드폰을 '초고가 헤드폰', '평판-정전형 드라이버 헤드폰'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치유하게 해주는 헤드폰'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그 증거의 하나로 CRBN이라는 헤드폰은 오디지가 개발한 모든 헤드폰 중에 가장 착용감이 좋습니다. '넥 브레이커'라는 별명을 가진 만큼 오디지의 착용감은 다소 과격(?)한 편이라고 봐야할 텐데, 이 헤드폰은 전혀 그렇지 않죠. 환자, 어린아이, 노인들도 전혀 부담이 없도록 특별히 신경써 설계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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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 가장 우선하고 있는가는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포터블 하이파이 제품들의 주안점은 들고다니는 데에 불편함이 없는 것이고, 거치형 헤드파이의 주안점은 헤드폰으로 들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사운드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디지의 대장 헤드폰 LCD-5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LCD-5의 최우선 목표는 모든 헤드폰 중 가장 뛰어난 성능을 가지는 것입니다. 최상급인 만큼 소재도 좋은 걸 써야되고, 소리의 품격도 갖추고 편안함도 물론 있어야겠지만, 가장 뛰어난 성능이라는 목표 아래 약간은 희생할 수도 있는 여지가 있어요. 그러나 CRBN의 최우선 목표는 심신의 안정이고, 그것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좋은 소리를 들려주려 한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사운드를 어떻게 만들어야 심신의 안정이 될 수 있는가, 아마 이전에 없었던 접근 방식이 필요할 겁니다.


CRBN은 풀사이즈의 개방형 평판-정전형 헤드폰으로 평판-정전형 드라이버는 일반적인 헤드폰과 달리 별도의 정전형 앰프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플러그 모양을 보면 6.35mm라든지 XLR이 아니라 5pin으로 특이하게 생겼지요. 전용 헤드폰 앰프의 필요성이라든지, 의료 현장에서 사용되는 특수 목적용이란 특징도 금액에 반영이 되어 이 제품은 높은 진입장벽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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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BN2


전작 CRBN을 들어보신 분들은 공감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좀 심심한 편입니다. 다른 브랜드의 정전형 헤드폰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미칠듯한 섬세함과 투명함도 느껴지지 않고, 원래 오디지가 자랑하던 전대역에 걸친 균형잡힌 탄탄함이 느껴지지도 않거든요. 긴 시간을 들여 들어보면 둘의 속성이 절묘하게 섞여있다는 결론을 얻게 되지만 그 전에 '이도저도 아닌 듯함' 라는 판단이 앞설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렇게 냉정하게 얘기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제품이 의료 태생인 건 이해하겠지만 결국 이 제품의 목적은 일반인이 음악감상을 듣기 위함일텐데 성능적인 면을 더 끌어올리는 것이 형평성에 맞을 것 같다, 사운드에 흠잡을 곳은 없지만 아무래도 이 금액은 아닌 것 같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오디지는 CRBN의 성능을 '심신의 안정'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최대한 성능을 끌어올려 CRBN2를 내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번 리뷰를 요약하는 핵심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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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BN2는 전작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이 변경되었습니다. 일단 첫인상부터 확 바뀌었어요. CRBN1을 단독으로 봤을 때는 꽤나 고급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CRBN2 옆에 놓이니 초라해보일 정도더군요. 전체적으로 고급스러운 컬러가 배어 있어 훨씬 더 멋있어졌습니다. 이 컬러는 '따뜻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CRBN1은 차갑고 정적인 느낌의 컬러였지만 CRBN2는 따뜻한 온기와 역동성을 지닌 컬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차이는 사운드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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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지에서는 '다른 어떤 정전형 헤드폰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저음을 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오디지에서 제공한 주파수 응답그래프 비교에서 저음역대의 차이가 두드러짐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CBRN2의 사운드변화를 설명하기엔 부족합니다. 저음역대의 양과 반응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음의 선명함과 생동감이 천지개벽 수준으로 바뀌었는데, 2세대 탄소 나노 튜브 필름 드라이버 + SLAM 기술 덕분입니다. SLAM 기술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드라이버 바깥 부분에 대칭형으로 소리와 공기가 흐를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놓은 겁니다.


이런 내부의 구조물 설치가 뭐 별거 아니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는 고된 튜닝의 결과물입니다. 그간 오디지가 내놓은 여러 기술들이 이렇게 소리, 공기의 흐름을 바꾸고 형성된 자기장의 배열을 변경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혁신적인 결과물을 탄생시켰지요. 보통 이런 음향 기술은 스피커 - 오디오쪽에서 주로 사용되었고 그 정도의 물리적 환경을 갖추어야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어폰/헤드폰쪽에서도 플래그십 등급이 되면 꽤나 큰 스케일을 다루므로 충분한 영향력이 발휘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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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BN1의 사운드를 단적으로 얘기하자면 밋밋했습니다. 편안하긴 했지만 그만큼 두루뭉술하고 무딘 소리였지요. 그러나 2에서는 소리가 확실히 살아있고, 더 다이내믹하게, 더 화려하고 극적으로 표현됩니다. 타이트하고 쫀쫀한 매력, 찰랑찰랑거리는 음의 다양한 면모를 입체적으로 표현하면서요. 한 겹이 아니라 두 겹이 벗겨진 것 같은 선명함 또한 큰 차이입니다. 억압되어있던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된 것처럼 사운드를 평가할 수 있는 모든 기준에서 큰 폭으로 상승했다는 느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CRBN1이 675만원이었고 CRBN2가 998만원이니 금액만 놓고 보면 상당히 많이 올랐지요. 그런데 금액 차이 이상으로 확실하게 성능이 개선되었습니다. 오디지라는 브랜드가 원래 엔트리/미들 등급보다는 프리미엄 등급에 주력하고 있기도 하고, 프리미엄 등급 중에서 끝판왕으로 분류되는 플래그십은 이전에 없던 수준의 사운드를 창조하는 것이니 감안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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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균형잡힌 탄탄함과 감미로움


사실 천만원 정도 되는 헤드폰이 한 손으로 꼽을만큼 적고, 소위 끝판왕 헤드폰들이 대략 500만원 전후로 포진되어 있기 때문에 500만원~1000만원에 해당하는 제품들을 포함하여 비교했을 때 확실히 차이나는 점은 역시나 소리가 편안하다는 겁니다. 따스한 온기가 헤드룸을 채우고 있으며, 소리 사이 사이에 빼곡하게 들어가있어 음선을 코팅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은 엄마품이라고 하지요. CRBN2의 사운드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엄마품입니다. 어떤 음악에서도 어떤 볼륨에서도 부담스럽거나 강한 자극은 없습니다. 이것은 CRBN을 관통하는 핵심 가치이기 때문에 후속 모델이 나온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을겁니다.


좀 더 세부적인 CRBN2의 목표는 다음의 세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다른 브랜드의 평판 정전형만큼의 섬세함과 디테일, 투명함을 갖춰야 한다

2) 다른 브랜드의 평판 정전형이 낼 수 없는 육중하고 깊이있는 저음을 재생해야 한다

3) 기존 오디지가 자랑하는 전대역의 균형잡힌 탄탄함을 재생한다


그간 접해온 오디지 사운드 시그니처는 특정 음역대에 따로 힘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전 대역에서 균형잡힌 탄탄함을 지니고 있는데, 거기에 부드러움과 감미로움을 더해 사운드를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좀 더 소리가 풀려있고 힘이 빠져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까 기존 오디지 사운드가 칼같은 반응이었다면, CRBN2는 약간은 느리게, 여유롭게 반응하는 느낌입니다. 귀에 걸리는 부담을 줄이고 편안함을 더하겠다는 의미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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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값을 하는가?


가장 중요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헤드폰이 냉정하게 천만원짜리 가치를 가졌다고 보느냐. 저는 두가지 상반된 답변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주구장창 얘기하는 음질 / 음악성 / 공간감(현장감) 기준에서 평가한다면 이 제품은 끝판왕 헤드폰으로 구분되는 제품 중 가장 낮은 점수를 받게 될 겁니다. 당장 같은 브랜드의 금액이 훨씬 낮은 LCD-5에 비교했을 때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편안함' 이라는 새로운 평가 기준을 더하면 지당한 금액이며, 유일무이한 경쟁력을 갖춘 헤드폰이 됩니다.


하이파이(스피커)와 포터블 하이파이(이어폰/헤드폰)를 앞서 언급한 세가지 기준 - 음질 / 음악성 / 공간감 - 으로 비교할 때, 음질이나 음악성은 포터블 하이파이 제품군이 근소하게 앞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간감을 기준으로 하면 포터블 하이파이는 과락입니다.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벌어지기 때문에 총점은 하이파이가 우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과 비슷하다고 설명드리고 싶군요.


이때까지 이렇게 높은 성능과 예술성, 훌륭한 공간 표현과 심신의 안정을 동시에 최상급 수준으로 제공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말하긴 좀 쑥스럽지만 제 경험에서 가장 비슷한 것은 신혼여행때 갔었던 5성급 호텔서비스였습니다. 온 우주가 나를 위해 존재하며 미소짓는 듯한 배려에 이래도 되나 싶었거든요. 그래서 CRBN2는 제가 들어본 모든 헤드폰 중에 가장 좋았습니다. 단순히 좋았다기보다 음악을 듣는 매 순간이 감동이었고 즐거웠고 행복했다고 좀 더 거창하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궁극의 헤드폰이 어떤 소리가 나야할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제 기준에서는 현재까지 가장 근접한 것이 CRBN2입니다.


원래 상반되는 속성을 다 품고 있는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니크합니다. 디자이너 고충이란 유머자료를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클래식하면서 모던한 느낌으로요', '너무 심플하지도 않고 또 너무 화려하지도 않게요' 귀에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편안함이 기본인데 성능은 출중해야 하고 또 재미가 없으면 안 된답니다. 이런 저런 조건 다 맞춰 임금님에게 올리는 진상품이 바로 CRBN2 입니다.


요즘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80~90년대 영화를 요약해놓은 유튜브를 보곤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건지도 모르겠지만 이 시대 특유의 약간 노을빛 낀 영상미가 있고,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에도 뭔가 모를 따뜻함이 있습니다. 그 기운이 내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인지 예전보다 악몽도 덜 꾸게 됐습니다. 요즘 영화와 비교하면 화려한 CG도 없고, 드론이나 슬로우 재생같은 촬영기법도 없이 단편적이고, 화질도 또렷하지 않지만 분명 영화 크레딧이 올라갈 때 뭔가 모르게 배부르다는 만족감을 받게 됩니다.


저는 한명의 음향애호가로서 때로는 음악에서 살아갈 힘을 얻고, 때로는 음악에게 위로 받기도 합니다. CRBN2만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배려와 관심, 그리고 포용력은 압도적인 수준입니다. 그래서 CRBN2가 이다지도 강한 울림을 주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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