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인가, 선택인가

녹터널 애니멀스(2017), *스포 O

by 식빵이

녹터널 애니멀스에는 이야기 속 이야기가 존재한다. 바로 주인공의 전 남편이 작성한 소설 속 이야기인데, 이에 대해 우선 미리 주의드리고 싶은 점은 소설 속 이야기가 매우 매우 잔인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감내해야 끝까지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고어틱한 잔인함이라기보다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잔인함의 한도를 보여주는 느낌이다(물론 충분한 당위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보는 도중에 너무 괴로워서 거의 울면서 봤던 기억이 있다.

소설 속 이야기는 다시 떠올리며 쓰기에도 버거워서, 이번 사설에서는 소설 바깥 이야기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싶다.

주인공은 전 남편과 왜 헤어지게 되었을까?




둘은 마치 운명같이 다시 만난 순간 곧장 사랑에 빠졌고, 경제적 지위나 이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꿈꾼다.


주인공의 엄마는 이 결혼을 반대하며 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넌 나와 아주 닮았어".

그렇기에 나는 너를 누구보다 잘 알고, 그런 입장에서 그 결혼은 실패할 것이라 예언한 것이다. 주인공은 이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싫어하며 결국 결혼을 감행한다.


결혼 생활은 어땠을까? 결국 주인공의 엄마가 예언한 바로 그 차이가 둘 사이를 파경으로 몰아넣는다(물론 더 직접적인 최악의 요인은 따로 있지만 너무 큰 스포라 적지 않겠다).

다시 만나 서로에게 스며든 순간들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로만을 바라보고 결심한 결혼까지 참 로맨틱하고 애틋했었는데. 씁쓸했다.


약간 더 스포 하자면 주인공은 결국 주인공의 엄마가 너무나 반길만한 번듯하고, 주인공과 이상향이 같은 듯한 남자와 재혼하지만 막상 전혀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불타오른 사랑은 금방 식어버리고, 잘난 남편은 밖으로만 돌 핑계가 넘치고, 주인공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어 공허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보며 나는 사주가 떠올랐다. 항상 누군가 사주나 점을 본 후기를 알려주면, '운명일까, 선택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누군가 어떤 예언을 해주면 내가 그 예언에 영향을 받아 정말 그 방향대로 움직일 확률이 얼마나 될지 궁금했다.


그러니까, 나는 예언을 못 들은 것처럼 나대로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 예언대로 되어있더라 인지,

예언을 듣고 보니 그쪽으로 관심이 가고 마음이 생겨서 어느덧 무의식적으로 예언에 맞춰 살려고 하게 된 것 인지 말이다.

주인공은 어떨까?


어쩌면 첫 남편과 삐그덕 거릴 때마다 '거 봐, 내가 그 결혼생활 불행할 거라고 했지?' 하는 엄마의 말이 머리에 맴돌지는 않았을까? 커플이라면 누구나 겪는 갈등 상황 속에서도, 어떤 커플은 지혜롭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역시 이 사람은 나와 달라' 하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지는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완벽해 보인 사람과 재혼한 결혼생활이라도 행복해야 했을 텐데 아니었고, 그런 이유로 새 사람을 찾다 보면 끝이 없을 것이니 말이다.


자기 충족적 예언. 엄마의 말을 부정하면서도 내심 신경 쓰던 주인공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예언을 되뇌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마침내 결혼생활이 끝났을 때, 오히려 그 일이 드디어 일어났구나, 하며 속 한 켠이 후련하지는 않았을까? 한편 새로운 남편은 어차피 완벽한 사람이기에 그런 예언도 생각할 여지없이 그냥 살았는데 그 결과로 결혼생활이 불행에 빠진 것이야말로 운명 아닐까?




나도 최근에 처음으로 사주를 봤다.


"펜 아무거나 안 사죠?"

"펜을 돈 주고 사본 적이 잘 없어서요... 판촉펜 받은 게 많아서..."

"술 먹으면 말 많아지는 거 알아요?"

"술을 주로 혼자 먹어서 잘 모르겠어요..."


이런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지기는 했지만 전반적인 사주는 전적으로 믿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참 좋게 얘기해 주셨다. 얼마나 정확할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충족적 예언 삼아 사주 덕 보며 살아가보고자 하는 마음도 샘솟았다.

라고 어제만 해도 사주에서 꽤 벗어난 듯한 도전을 질러버린 사람이 말했다(무엇이든 성격은 못 고친다).




결론적으로, 나는 주인공과 전 남편의 파국은 운명이 아닌 자신들의 선택이었다고 본다. 특히 아주 큰 비중으로 주인공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엄마에게서부터 이식된 일종의 자기 충족적 예언이 있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결말이 굉장히 사이다라 속이 아주 시원했어서 나처럼 영화의 소설 속 괴로운 장면들을 꾸역꾸역 소화하며 끝까지 보신다면 나름 보람이 있으시리라 생각한다. 소설의 내용도 알고 보면 메타포가 성경인가 싶을 정도로 소름 돋기에 놓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어째 영화 추천이 자꾸만 견뎌내야 하는 고행 추천이 되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들지만 나름 엄선하고 있다는 점은 알아주시길...!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4550098/mediaviewer/rm3475025409/?ref_=ext_shr_l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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