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2022), *스포 O
영화 펄은 내가 고어 영화의 세계에 입문한 계기가 되었다. 막상 고어 영화들은 잔인함의 정도가 상상 이상이라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져서 '어차피 저거 다 가짜야!' 하는 생각으로 진정이 된다는 걸 깨달았달까? 하지만 여전히 그렇게까지 심하게 표현해야 하나 하는 의구심은 남아있어서, 지금은 다시 그 세계에서 빠져나와 휴식기를 가지고 있다(안 그러면 삶이 너무 피폐해질 것 같았다).
우선 펄에 끌렸던 이유는 포스터 때문이다. 주인공의 표정에서 독특한 기세가 느껴졌다. 이미 하나의 세계를 형성해서 아예 거기 빠져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궁금하지만 약간 두려워서 몇 번을 망설인 끝에 마침내 영화를 봤다.
펄에서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인한 괴로움이었다. 이상을 추구하며 나아가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 지금의 자신을 올바르게 인식해야 나아갈 방향도 제대로 볼 수 있다. 가끔 이상적인 자아를 설정해 두고 현실을 외면한 채 강박적으로 살아가는 경우를 본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진심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이 칭송받기를 원하고, 자신을 이상적으로 봐주기를 주변에 강요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가짜로 누구를 칭송해 줄 정도의 연기력이나 여력이 없어서, 그런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방식을 택했다. 만약 내가 펄의 주변 사람이었다면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테다.
펄은 어째서 세상이 자신의 이상과 같이 돌아가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대로 컨트롤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과 다른 현실을 직면하려니 견딜 수가 없다.
펄의 이상의 중심에는 "타인의 사랑"이 있었던 것 같다. 엄마로부터, 원하는 이성으로부터, 대중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었으나 그 어떤 것도 얻어내지 못한다. 펄에게 현실은 어긋나는 조각이었다. 그녀의 퍼즐을 완성하려면 현실은 결코 이 모양이어서는 안 됐다. 그래서 이쪽을 깎아보고 저쪽을 부서뜨려 보고 불로 녹여도 보며 폭주하는 과정이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이 된다. 퍼즐에 비유해서 그렇지 그 과정은 말할 수 없이 잔인하다. 또한 그 과정은 퍼즐을 맞춰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분풀이에 가깝다.
나는 펄의 엄마가 어릴 적부터 딸에게 했던 말과 행동이 학대라고 생각한다. 늘 펄에게 분수를 알라는 듯이 말하고 펄의 꿈을 무시한다. 펄이 사랑을 갈구할수록 대가로 억압이 돌아왔다. 억압. 억압. 억압. 그것이 그녀를 더 남다르게 만들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남다름이 더 많은 억압을 불러온 걸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하게 됐다. 만약에 사랑해 줬다면 어땠을까? 남다름이 선행했든 그렇지 않았든 먼저 사랑해 줬다면? 펄이 진정 원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은 맞았을까? 정말 그랬다면 사랑을 받은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평범한 정도의 사랑을 원한 건 아니라는 거다. 그녀는 온 세상의 사랑을 원했다. 그러니 가정하기조차 힘들다.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었기에 결말이 같았으려나 싶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생애 초기 온 세상이었을 가정에서 한 번 그것이 충족되어 봤다면 성장하며 조금은 다른 꿈을 꾸게 되었을 수도.
들어본 노래 가사 중에 가장 짠했던 것 중 하나가 GD, One Of A Kind라는 노래 속 "사랑해주세요"이다. 지드래곤도 이렇게 말하는 마당에 외딴곳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펄은 세상에 얼마나 외치고 싶었을까? 물론 그녀의 잔악무도한 행위들을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모두에게 비극이라 슬플 뿐이다.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 때문에라도 추천하고 싶다. 잔인한 장면은 스킵하며 보셔도 좋으니 후반부에 나오는 펄(Mia Goth)의 독백들은 놓치지 않으셨음 하는 마음이다. Mia Goth의 연기에 홀랑 마음을 빼앗겨 서스페리아라는 영화까지 보게 되고 걷잡을 수 없는 충격에 빠지게 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기회가 되면 다음에 글을 써보겠다.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18925334/mediaviewer/rm3804051457/?ref_=ext_shr_l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