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푸켓에서 한 달 동안 뭘 했냐 물어본다면
푸켓에서 한 달 동안 뭘 했냐 물어본다면
푸켓에서의 내 삶은 매우 단조로우면서도 느긋하게 흘러갔다.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커다란 왕골 가방에 핸드폰이며 지갑이며 책이며 하루 동안 내 삶을 채워줄 잡동사니들을 담고, 반대편 옆구리에는 커다란 비치타월 하나를 끼고는 해변으로 향했다. 시설이 조금 괜찮은 비치 클럽에 갈 때면 이 비치 타월 조차도 필요 없었다. 내가 원할 때마다 타월을 가져다주는 스태프들이 항상 상주를 했으니.
공용 해변이 되었건, 비치 클럽이 되었건, 바다가 보이는 명당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고, 귀에 좋아하는 노래를 꽂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매일매일이 비슷하게 흘러갔지만 딱히 심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그 단조로움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난 그 궁극의 자유로움을 아주 마음껏 즐겼다.
잠, 그리고 난 잠을 정말 많이 잤다. 내가 푸켓에서 한 것 중 가장 보람차게 느끼는 것이 바로 거의 하루 종일 잠을 잔 거라 말한다면 너무 허무하게 들릴까나. 홍콩을 떠날 때 일에 대한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굉장히 심한 감정적 굴곡을 타고 있었다. 원래가 좀 예민한 스타일이라 신경 쓸 일이 있으면 잠을 잘 못 자고는 하는데, 홍콩을 떠나기 3~4개월 전부터 이것이 극에 달해 하루에 3~4시간 이상 자지 못했다.
일이라는 게 다 비슷비슷하겠지만, 내가 하는 일의 경우 각 나라 마켓(주식 마켓)의 데드라인(deadline)에 항상 쫓겨야 하는 일이었고 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이는 바로 금전적 손실로 이어지기에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했다. 매일매일의 일이야 어느 정도 하면 적응이 되지만 일이라도 터지면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미국 은행에서 한창 바쁘게 일할 때는 정말 하루 종일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간 적도 있었고, 그 하루에 한 번 가는 화장실도 미친년처럼 정말 뛰어갔다가 뛰어 오기도 했다. 이후 워라벨(Work-life balance)을 찾아 유럽계 은행으로 옮긴 후 시간적으로 쫓기는 부분은 많이 나아졌지만 이 번에는 금액이 조 단위를 훌쩍 넘어가는 큰 프로젝트들을 혼자 맡게 되면서 언제나 조금이라도 실수할 수 없다는 긴장감 속에 살아야 했다. 그런 나를 보며, 유럽의 동료들은 일은 일일 뿐이라고, 일보다는 네 자신의 생활을 더 우선으로 두라고, 오늘 못한 일은 내일 와서 하면 된다고 나를 다독였지만, 이번에는 (내 기준에) 상황에 맞지 않는 그들의 그런 느긋함이 내 피를 마르게 했다. '그럼 나한테도 유럽 클라이언트들 주던가. 지랄 맞은 아시아 클라이언트 다 맡겨 놓고 느긋하라는 게 말이 똥이야 뭐야 진짜!' 물론, 겉으로는 "걱정해줘서 고마워, 나도 좀 여유를 가져 보려 할게"라 답하며 미소 지었을지언정.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가 하나 있는데, 외국은 뭔가 워라벨을 맞춰가며 일을 할 거라는 생각, 우리나라 사람들만 일을 정말 X 빠지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원래입이좀걸걸한편 물론 인더스트리마다 다를 것이고, 한국에서 제대로 일해 본 경험이 전무한 나로서 감히 뭐라 할 수는 있는지 사실 자신이 없지만, 내가 미국계 은행에 다닐 시 일주일간 서울 오피스에서 일하며 같은 층에 있던 직원들을 관찰하며 느낀 것 & 한국에서 일하다 홍콩으로 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 & 나의 개인적인 의견을 합하자면 그건,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다른 인더스트리는 잘 모르니 금융권만 두고 보자면, 정말 다 엄청나게, 거의 일에 미친 사람들처럼 열심히 일을 한다. 외국의 금융 기업들은 철저히 퍼포먼스(performance) 베이스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기본적으로 일을 잘해야 승진이 가능하다. 일을 잘한다고 말할 때, 맡은 일을 열심히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홍콩 금융계에서 일을 할 정도면 다들 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똘똘한 인재들이다. 맡은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은 그저 다음 해에도 그 자리를 지킬 뿐이다. 승진을 하려면 내가 맡은 일 이상으로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보스와도 끊임없이 회사 내 나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 상담을 하고 내 야망을 어필해야 하며, 수많은 직원들 중에 눈에 띄기 위해 네트 워킹도 열심히 해야 한다.
사실 이 점이 한국에서 오래 일하다 온 사람들이 매우 어려워하는 부분 중 하나이다. 내가 열심히 일하면 그 모습을 보고 내 상사가 적당한 연차에 승진을 시켜주는 데 익숙한 문화에서 일을 해 왔다면, 일 자체보다 이런 문화에 적응을 하는 것에 아마 더 크게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홍콩은 전 세계에서 인재들이 몰려드는 전쟁터와도 같다. 암투까지 벌일 필요는 없지만 (씁쓸한 말이지만 그런 경우를 가끔 보기는 한다) 멍하게 일만 하다가는 정말 평생 멍하게 그 일만 계속하고 있을 수 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봐도 알겠지만 마켓은 정말 끊임없이 변한다. 항상 공부해야 하고, 스스로를 푸쉬해야 하고, 나태해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누가 나보다 더 잘하는지, 그 사람을 뭘 더 잘하는 지를 알아야 하고, 내가 잘한 점이 있다면 상사에게 이를 적극적으로 어필해야 한다. 일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도 스트레스지만 이런 데서 오는 스트레스 또한 정말 상당하다.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해서 마침내 바라던 승진을 얻고 나면 바로 넥스트 라운드(Next round)! 누구의 말마따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번엔 다시 내가 치고 올라간 그 레벨에서의 전투이다. 아니, 그 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더 치열한 전투. 어느 조직을 가건 조직은 피라미드 형태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줄어들지 절대로 늘어나지 않는다. 지금 내 위치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이제까지 해 온 그 일련의 노력들을 모두 거쳐 올라온 사람들이다. 더욱 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직위에 오르고 난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나누어진다. 나 이 정도면 됐어, 현재를 만족하고 그 자리를 지키는 데 목적을 두는 사람 vs. 이 정도는 어림없지, 더욱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더욱더 자신을 푸쉬하는 사람. 어느 쪽이 우위라는 것도 없고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맞다는 것도 없다. 그저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생각드는 쪽을 선택하는 것일 뿐. 그리고 후자를 선택했다면, 그것이 내 자의가 되었건 타의에 의했건 퇴사를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드라마 '이태원 클래스'에서 본가의 장 회장이 가장 좋아한다는 사자성어. 약육강식(弱肉强食). 약육강식의 룰이 절대적으로 실현되는 곳이 바로 홍콩의 금융권이다. 너무 차갑고 매정하게 보이지만 또 좋은 면을 보자면 그런 철저히 능력위주의 구조 덕분에 난 이제까지 일하면서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 보스들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이에 대해 나와 친한 상무님 한 분이 조언을 해주신 게 있다. 앞으로 내가 조금씩 더 올라갈수록 존경할만한 보스를 찾는 것이 힘들어질 것임을. 그래서 누구를 통해 동기부여를 받기보다는 스스로 단단해져야 함을. 그 말이 어렴풋이 뭔지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 그 정도 레벨까지는 올라가지 못한 지라 아직은 주위의 멋진 보스들을 보며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하고는 한다. 우리나라는 어떤 지 모르겠지만, 외국에서는 위로 갈수록 확실히 업무량이 훨씬 많다. 내가 이제까지 일하면서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등을 제외하고는, 내 보스들이 나보다 일찍 퇴근을 하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다. 대부분의 보스들은 나보다 훨씬 일찍(1~2시간) 출근하고 훨씬 늦게 퇴근을 했다. 물론, 지 할 일 지가 안 하고 밑에 사람에게 시키며 단물을 빼먹으려는 악덕 보스들,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딱 거기까지다. 회사가 바보도 아니고, 그런 얄팍한 수로 올라갈 수 있는 높이에는 한계가 존재를 한다. 결국, 나도 존경받을만한 높은 자리에 가고 싶다면 그만큼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 열심히, 더 효율적으로, 내 한계치를 밀어붙이며, 더 좋은 성과를 향해.
인간은 정말로 적응의 동물인지라, 사실 처음이 힘들지 나중에 적응되고 나면 감각이 무뎌져 내가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구나 라는 사실 조차 잊게 된다. 아니, 오히려 그 가운데서 소소한 즐거움을 찾기도. 굳이 비교하자면 이건 마치 고 3 때 야자 하루 땡땡이치고 떡볶이 사 먹으며, 그래도, 살만해,라고 느끼는, 뭐 그런 즐거움? 하지만 고3 수험생활은 일 년이면 족하다. 원하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서 2년, 3년 조금 더 참고 노력할 수는 있어도 사람이 한계가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간중간 좀 쉬어 가도 될 법했는데, 그때는 뭐가 그리 안달이 났는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리고 싶어 더욱더 나 자신을 몰아붙이며 일을 했다.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달려들었다.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네트워킹 할 자리가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나타났다. 내가 뭘 더 해야 빨리 승진할 수 있냐며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 일도 해 볼 수 있겠어?"라는 질문에는 무조건 그렇다 대답을 했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하루하루 나 자신을 말라가게 하고 있었다. 힘든 날이면 술을 마셨다.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지인들과 술을 마시고 웃어젖혀가며 해소했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 잠이 잘 안 오기 시작했다. 보통은 잠 자기 전 열어 본 이메일이 문제였다. 유럽이 본사인 은행이었기에 주로 아시아 밤 시간대에 본사, 그리고 유럽 지사들로부터 이런저런 업데이트들이 올라왔는데 그걸 본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내일 할 일을 브리핑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차 하면 이미 새벽 2~3시였다. 다행히 나는 회사 바로 코 앞에 살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일에는 4~5시간 정도 자는 것이 고작이었다. 주말만 기다렸다. 주말이 되면 다음 날 일찍 일어나야 하는 걱정 없이 술을 마시고 술기운에 힘입어 7~8시간 정도는 잘 수 있었으니까. 미래에 대한 욕심이 커 질수록 이제는 주말에도 잠이 잘 안 왔다. 술을 마시고 즐기는 것을 넘어 폭음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날은 또 몸에 남아 있는 술기운 때문에 숙면을 하지 못했다. 정말 퀄리티 없는 선잠을 자고 일어나니 자도 자도 피곤한 악순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를 못했다. 개인적인 일까지 닥치며 난 정말 매일매일이 힘들었다. 열심히 달리고는 있는데 내가 어디로 달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길 끝에 마침내 햇볕 쨍한 에덴동산이 나타날지, 혹은 바로 낭떠러지로 떨어질지. 난 정말, 휴식이 필요했다. 살기 위해서.
푸켓에 도착한 첫날, 나는 술기운 하나 없이 16시간을 내리 잤다. 그 날부터 매일매일 일주일간, 난 낮잠을 포함해 14~16시간씩을 잤고 처음에는 너무 이렇게 갑자기 많이 자니 몸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 또 걱정을 했지만 난 그런 내 불안한 마음을, 내 몸을 놓아주기로 했다. 그래, 너 어디 너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기본적 욕구에 충실한, 마치 신생아와 같은 생활을 했다. 지인들에게 이를 말하자 너 그러다 키도 크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했다. 진짜로, 그 말을 듣고 나니 키가 좀 큰 느낌이었다. 서른다섯 살에 성장판이 열려 있을 리는 없고, 물론 그저 느낌상이었겠지만. 그렇게 일주일 여가 지나자 마침내 8~9시간 정도의 보통의 수면 패턴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그간의 부족한 잠을 다 캐치업(catch up)했나 보다. 문득 그간 잘 버텨준 몸이, 그리고 빠르게 회복하는 내 몸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면 패턴과 함께 되돌아온 것은 내 생리 패턴이었다. 원래부터 자궁이 좀 약한 편이다. 몸이 힘들 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이는 생리 불순으로 바로 나타나고는 했다. 학생 시절 중간고사/기말고사가 있는 달은 거의 항상 생리를 건너뛰고는 했다. 고 3 수험 생활을 할 때는 일 년에 생리를 4번 정도밖에 안 한 적도 있었다. 워낙에 어렸을 때부터 이러했던 지라 내게 생리라는 건 원래 불순(不順, 순조롭지 못하게)하게 오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에 어느 정도 무뎌지긴 했다. 한창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던 미국계 은행에서의 6개월 여는 정말 최악이었지만서도.
그 당시 원래 4명이었던 팀이 2명으로 줄고, 여기에 오래 같이 일하던 팀장님마저 타 은행으로 이직을 하셨다. 그 사이에 한 명 충원이 되기는 했지만 출산/육아로 인해 경력단절이 꽤 있었던 분이셨고 회사에 조인(join)한 지 몇 달 안된 분이 한 명분의 일을 제대로 해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리였다. 나보다 높은 직급으로 오신 분이셨지만 결국 팀장 역할은 그 팀에서 가장 오래 일했던 내가 맡았다.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들도 모두 내 몫이었다. 하루하루를 잘 보내는 것이 아닌 버티며 보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퇴근 시간이 되면 안도의 한숨부터 나왔다. 드디어 하루가 끝이 났구나. 일이 정점에 이르던 때, 난 한 달 내내 출혈을 했다. 그러면서도 일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살인적인 렌트도 계속 내야 했고, 책임감 없이 일을 그만둬 버릴 수도 없었다. 일을 그만 두면 뭘 해야 할 지도 막막했다. 정말 울고 싶었다. 아니, 정말로 화장실에 들어가 30분 내내 울다 나온 적도 있었다.
이후 이는 같이 밀접히 일을 했던, 그리고 열성적으로 서포트를 해주시고 시니어 레벨에 적극적으로 에스컬레이션(escalation)을 해주신 상무님 덕분에 좀 더 많은 인원이 충원이 되며 나의 고난의 삶은 어찌어찌 마무리가 되었다. 역시, 아무리 힘들어도, 그 또한 지나간다. 이후 몇 년 더 일을 하다 난 유럽계 은행으로 옮기게 되었다. 워라벨을 강조하는, 시중은행들과는 조금 다른 기관의 성격이 강한 은행이었다. 이에 조금 더 여유로운 환경에서 일을 하며 내 몸은 정상을 찾는 듯했다. 하지만 모든 회사 생활이 그렇듯 스트레스가 없는 직장 생활은 없다. 전임자의 갑작스러운 퇴사로 얼떨결에 맡게 된 자리. 전혀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어제는 제가 경황이 없어서 얼떨결에 수락을 했는데 다시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어요,라고 보스에게 말하려고 한 다음 날 아침, 이미 전 세계 오피스에 내 포지션 변경에 대한 공식 이메일이 나갔다. 그 위로 수십 개의 축하 이메일이 와 있었다. 아뿔싸, 늦었다.
회사에서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Waiving cat (손 흔드는 고양이). 마네키네코(招き猫, まねきねこ)라 불리는, 일본 레스토랑에서 종종 보이는 그 손 흔드는 모양의 고양이를 지칭한 말이었다. 원래 그리 바쁘지 않은 자리였고, 그래서 내가 알기로 내 전임자도 좀 더 욕심을 내고 다른 회사로 옮겨간 것으로 아는데, 이상하게 내가 앉자마자 일이 쏟아졌다. 내가 앉자마자 회사에 프로젝트가 쏟아진다며 마치 그 공이 내가 다 세운 것인 양 모두들 기뻐했다. 내가 새로 맡은 포지션 자체가 아시아 내에서 그 일을 하는 유일한 자리였던지라 다들 잘 보이려고 한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새로 맡은 역할은 그동안 해왔던 일과는 다른 프로젝트 매니저의 역할이었는데, 일단 다루는 프로덕트 자체가 내가 이 전에 해왔던 것들과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나름 일한 지 9년 차인데 다시 신입이 된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프로젝트 매니저랍시고 어디서부터 손 대야 할지도 모르는 프로젝트를 고객들 앞에서, 그리고 회사 내부에서도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이끌고 나가야 했다. 처음에는 새로운 일을 배우느라, 그리고 이를 바로 잘 해내야 하느라 혹은 잘해 나가는 '척' 하느라 상당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이후 내 퍼포먼스가 좋자 점점 더 많은, 그리고 큰 규모의 프로젝트들이 맡겨졌다. 짧게는 몇 개월 짜리, 길게는 2년짜리, 작게는 억대에서 수십조에도 이르는 프로젝트들이었다.
지난번에는 한 달 내내 출혈을 했다면 이번에는 이대로 폐경기가 오는가 싶을 정도로 생리양이 줄고 생리를 건너뛰는 달이 잦아졌다. 몸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우울감이 왔고, 신경이 예민해졌다. 몸도 상당히 피곤해졌다. 하지만 재밌었다. 매일매일 새로 배워야 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에 신이 났다. 너 유럽 은행 다니는 거 맞냐 할 정도로 상당한 업무량에 시달렸지만,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좀 더 큰 책임감들이 주어졌다는 것이, 이제는 회사의 빅 보스들과도 직접 이야기를 하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외면했다, 내 몸이 외치는 절규를.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이런가 보다고 받아들이고는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조금씩 난 내 안을 스스로 갉아먹고 있었다.
푸켓에 오고 2주 정도 뒤 그렇게도 기다리던 생리가 갑자기 터졌다. 중학교 때 이후로 이렇게 생리양이 많았던 적이 있었던 가 싶게 양도 너무 많았다. 생리대 따위 가져왔을 리가 없었다. 호텔 바로 앞 편의점으로 뛰어가는데 혹시나 생리가 새지 않을까 그렇게도 조마조마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생리대를 사 와 변기에 앉았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 나, 조기 폐경 아니구나! 그렇게 매일매일을 조금도 질리지도 않고 8시간 이상씩을 자고, 쏟아 넣던 술을 줄이고 이를 건강식으로 대체하고, 그 후로 두 달을 더 말도 안 되게 많은 (횟수가 아니라 양) 생리를 하고 나서야 내가 정상적이라 여기는 정도의 생리 패턴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내 삶은 홍콩에서의 그것과 180도 달라져 있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성취한 게 없다는 사실이 더 이상 나를 거슬리게 하지 않았다. 제 버릇 남 못준다고 여전히 하루하루를 계획 하긴 했지만 예전처럼 그 계획이 틀어진다고 해서 불안감을 느끼거나 좌절에 빠지지도 않았다. 가장 큰 기쁨은 더 이상 알림을 맞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면 이러는 대로, 저러면 저런 대로, 시간에 맞추어, 흐름에 맞추어 나 자신을 놓는 법을 서서히 터득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푸켓에서 한 달동 안이나 뭘 했냐고 물으면 난 답한다. 난 하루 종일 잠만 잤어. 난 잠을 잤고, 책을 읽었고, 매일 바닷가를 거닐었고, 내 삶을 되찾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