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의 입에서 '예'라는 말이 나오면 나는 눈을 감는다.
긍정의 답을 받아 안도하는 것이 아니다. 닥쳐 올 환장에 대비하며 호흡을 고르는 것이다.
P는 예를 든다. 자주. 많이. 다양하게. 그리고 그것들 중 대부분은 예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당연히 기능도 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볼게요. 예예요, 예.
이 도입부는 래퍼들의 시그니처 사운드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군더더기가 지금 들려는 예시는 매우 부족하거나 부적절하고 그리하여 할 필요가 없는 말이라는 걸 아는 그의 무의식이 내는 마찰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그는 기어코 예시들 든다.
예를 들어 누가 있다고 해봐요. 그리고 그 사람이 어딜 가서 이러이런 게 있구나 괜찮네, 그래서 원래 알던 사람 말고(이게 중요한 조건이었다) 예를 들면 최근 모임에서 만난 사람에게(당시는 코로나 시국이었다) 어떤식으로든(어떻게?) 공유를 하고 그게 어떤식으로든 다시 브랜드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해봐요.(도대체 어떻게?)
나는 끓는 속을 달래며 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반복되는 내용은 어순만 조금 달라져있다. 입소문을 내자는 그의 전략 제안에 좋다, 그래서 어떻게 할지 얘기해보자 하면 그는 이런 식의 예를 끝도 없이 든다.
예는 아직 실제로 존재하기 이전의 어떤 것을 이미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빌려 설명하거나 묘사하고 그리하여 여러 사람이 최대한 같은 것을 생각하도록 돕기 위해 드는 것이다.
그러나 P는 내 알 바냐는 듯 아랑곳 않고 사람들을 혼란과 미궁 속으로 밀어 넣는다.
컨디션 최상인 날은 알아서 이해하고 나아가 남에게 커버까지 쳐주지만 그건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냥 잠시 눈을 감았다 뜬다. 너무 오래 감고 있으면 적의가 전달되어 상황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내가 처음부터 체념했던 건 아니다. 문제제기도 하고 논쟁도 해봤다. 하지만 그에겐 마법의 무기가 있다.
그러니까 그냥 예를 든 거잖아요.
언젠가는 그에게 말하고 싶다.
아무 의미 없는 예를 든다는 게 어떤 것인지 누군가에 설명하려면 당신을 예로 든 이 글과 같이 구체적인 사례를 예로 들어서 처음의 설명이 어느새 선명한 장면으로 바뀌어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