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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반 Dec 11. 2023

알프스의 목동

프랑스에서 90일

어디로 갈까? 목적지를 선정하는 일은 쉬운 일이었다. 젊은 날, 가난하고 힘겨웠던 한 때를 지냈던 애증의 땅 프랑스를 다시 둘러보기로 한 이상, 나는 주저하지 않고 오뜨사부아(Haute Savoie)를 선택했다. 알프스다.

프랑스의 알프스는 예닐곱 나라에 걸쳐있는 광대한 알프스의 서쪽 끝자락이다. 프랑스의 알프스 지역 중에서 맨 북쪽에 위치한 오뜨사부아는 북쪽으로는 제네바의 레만호를 경계로 스위스와 접해있고, 아래쪽으로는 사부아(Savoie) 주와 나뉜다.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Mont Blanc)과 그 이름도 유명한 샤모니(Chamonix), 안시(Annecy), 에비앙(Evian)이 있는 곳으로써 유럽인들의 1급 휴양지이다. 30여 년 전, 이곳을 잠깐 지나가면서 꼭 다시 오겠다고 다짐해 두었던 곳이다. 리프트를 타고 에귀으 뒤 미디(Aiguille du midi)를 오르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등산화를 신고 저 산속을 누비리라.

오뜨 사부아(Haute Savoie)

내가 망설이지 않고 알프스를 선택한 이유는, 눈 덮인 알프스 산 아래 펼쳐지는 푸른 초원과 그림같이 아름다운 마을들의 이미지가 다른 어떤 곳보다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필시 어렸을 적에 어느 분식집에 걸려 있던 달력의 사진에서나 보았을 터이지만, 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 풍경의 이미지는 오래된 만큼이나 강렬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림 같은 알프스 산들을 직접 걸어 올라보고 싶었고, 그곳에서 양치기 일을 직접 해보고 싶었다. 그 그림 속에서 내가 목동이 되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는 상상만으로도 흥분했다.


‘양치는 목동’이란 말은 우리에게 낯익은 말이지만, 양치는 목동이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목동을 만나보거나 목동이 양치는 모습을 보는 것조차도 우리에게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했던 고등학교 시절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은 우리에게 알프스의 목동에 대한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켰을 뿐만 아니라 목동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마저 자아냈었다. 지금도 알프스에는 목동(berger)들이 양을 치고 있고, 숫자는 많지 않지만 하나의 전문적인 직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제르에서의 알파쥬, 기욤므가 제공>
<이제르에서의 알파쥬, 기욤므가 제공>

나는 운 좋게도, 알린느의 집에서 양치기를 직업으로 하는 프랑스 젊은이를  만날 수 있었다. 기욤므는 작년에 알린느가 알파쥬(alpage)를 맡겼던 목동인데, 내가 알린느의 집에 있는 동안 알린느의 요청으로 잠시 양을 돌봐주러 들렀던 것이다. 나는 그와 함께 양을 돌보며 일주일을 지냈다. 꽁지머리를 한 기욤므는 그동안 내가 머릿속에 그려왔던 순박한 목동의 이미지와 다른 신세대 젊은이였지만, 목동에 대한 나의 호기심에 답해줄 만한 적격자인 것은 분명했다. 그는 그동안 내가 상상 속에서 그려왔던 알프스의 목동에 대한 이야기를 세세하고 적나라하게 들려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실제 목동의 생활이란 우리가 갖고 있는 낭만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매우 고되고 힘든 극한 직업에 가까운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목동이란 양의 우리나 풀밭에서 양을 돌보는 목축업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6월이 되면 알프스도 날씨가 따뜻해져서 산의 눈이 녹고 풀들도 기온을 따라 산을 올라가는데, 양들도 풀을 찾아 같이 산을 올라간다. 대개 5월 말까지는 2000미터 높이까지 눈이 녹고, 한여름엔 3000미터 이상까지도 녹는다. 이때 목동은 목축업자를 대신해서 양들을 책임지고 5개월 정도를 혼자 산속에서 풀을 찾아다니며 양을 친다. 이렇게 양을 치는 것을 알파쥬(alpage)라고 한다. 새로 돋아나는 풀을 찾아 해발 3000미터 높이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힘겨운 시간이 시작된다. 외로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까빈느(cabine)라는 산속 오두막 거처에서 혼자 지내야 한다. 대개 수돗물도 전기도 없다. 아직까지도 통신이 불가능한 지역도 많다. 식량은 ‘한 달에 두 번씩, 보름마다 먹을 것을 날라다 주는 꼬마 미에로나 노라드 할머니’ 대신에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헬기로 공급된다. ‘양들을 돌보고 밤에 별을 헤아리곤 하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다는 옛날 이야기 속의 목동과는 달리, 요즘 목동들은 별 대신에 노트북과 휴대폰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기욤므가 얘기해 준 목동이란 직업은, 우리가 사진에서나 보듯이 양들을 풀어놓고 양이 가는 대로 한가하게 뒤따라 다니면서 책이나 읽으며 고독을 즐기는 그런 일이 절대 아니다. 늑대들의 개체수가 많아진 까닭에 밤에는 전기가 흐르는 울타리를 쳐서 양을 가두어야 하고, 낮에는 자주 울타리를 옮겨서 새 풀을 뜯게 해야 하는데,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하는 일들이라 강한 체력이 요구된다. 개들을 부리는 것도, 돌보는 것도 경험과 기술이 필요했다. 고산지대라서 날씨 또한 매우 변덕스럽다.

<이제르에서의 알파쥬, 기욤므가 제공>

10월 말쯤 되어 목동이 양을 이끌고 산에서 내려오면 양들은 우리에서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다음 해 유월까지 목장의 풀밭에서 자라게 되면 어미는 새끼와 함께 다시 산을 오른다. 반복되는 사계절에 호흡을 맞추어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순환의 생태계이다. 산을 내려온 후 목동들은 대개 다음 알파쥬 때까지 7개월 동안 쉬거나 다른 일을 한다. 목장 주인의 고민은 신뢰할 만한 목동을 잘 골라 좋은 계약을 하는 것인데, 이 역시 사람 간의 일이라 둘 사이에 긴장관계가 조성된다.


내년에 사정이 허락한다면 기욤므를 따라 알파쥬에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는데 벌써부터 체력이 걱정된다. 평탄한 목초지에서도 매일 전기 울타리를 옮겨 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양 떼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동시키는 일은 초보자가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수 백 마리의 양 떼를 몰고 가는 것은 경험 많은 목동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양들은 양치기가 바라는 대로 길을 잘 찾아갈 수 있는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행여 길을 잘못 들거나, 양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날에는 참으로 심란하다.) 게다가 가파르고 험한 이곳 산들을 생각하면 감히 도전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한편, 목장 주인인 알린느는 지난번 알파쥬 때에 기욤므가 고가의 전기 울타리를 잘 관리하지 못했으며, 양들을 세심하게 돌보지 않을 뿐 아니라 요구 사항이 너무 많다고 불평했다. 더구나 알린느의 딸 셀린느가 기욤므와는 얘기조차 하기 싫어하는 것을 보면, 과연 내년에도 이 목축업자와 목동 간의 계약이 지속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알프스에서도, 현실은 옛날이야기보다 덜 아름답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각박한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수정할 필요는 없겠다. 먼 옛날에는, 목동이 들려주는 별 이야기를 듣다가 목동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잠든 주인집의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분명히 살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밤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려와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노라고’ 생각하며 밤을 지새운 목동도 분명히 있었다!


눈 덮인 로비우 산이 바라다 보이는 이제르의 푸른 초원에서, 나는 그 옛날에 목동이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혼자 행복해했다.


<……만약 여러분이 한 번이라도 깊은 산속에서 밤을 지새워본 적이 있다면 아실 겁니다. 우리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또 다른 신비로운 세계가 고독과 적막 속에서 눈을 뜬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샘물은 더욱 맑은 소리로 노래하고, 연못에서는 조그마한 불꽃들이 빛을 내며, 모든 산의 요정들은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지요……>


<……그렇지만 모든 별 중에 가장 아름다운 별은요, 아가씨 그건 우리들의 별이죠. ‘양치기의 별’이라고 한답니다. 새벽에 우리가 양 떼를 몰고 나갈 때에도 빛나고, 저녁에 다시 들어올 때에도 빛나거든요. 우린 아직도 그 별을 ‘마글론’이라 부르지요. ’ 프로방스의 피에르’를 좇아 달려가서 7년에 한 번씩 그 별과 결혼하는 아름다운 별이랍니다……>


<알프스의 몰이꾼 개(Chien de berger), 매우 영리해서 목동의 명령어를 알아듣고 절대복종을 훈련받는다. >
<알린느의 목초지에서, 이제는 친해진  빠투 '우랄'과 함께 폼을 잡았다. 같이 일했던 우퍼 Charles가 찍었다.>


*<알아둘 사항>

양을 치기 위해서는 두 종류의 개가 필요하다. 목동의 개(Chien de berger)라고 하는 몰이꾼 개와 양들을 곰이나 늑대들로부터 지켜주는 지킴이 개가 있다. 몰이꾼 개는 양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감시하고 목동의 지시에 따라 양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Berger australien 등 여러 견종이 있다.

지킴이 개의 대표적인 품종은 빠투( Patou)다.  빠투는 피레네가 원산지인데, 체중이 70kg까지도 나가는 하얀털을 가진 덩치 큰 개다. 양무리와 밤낮으로 동행하며 양들을 지킨다.  따라서 외부의 침입자들에게 매우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다.

알프스를 걷거나 등산을 하게 되면 알파쥬를 하고 있는 양 떼를 만날 수가 있는데, 혹시라도 사진을 찍겠다며 양 무리에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 양무리 속에는 반드시 지킴이 개가 있고 낯선 사람을 발견하면 매우 위협적으로 달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관광청에서는 양 떼를 만나거든 반드시 멀리 우회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혹시라도 빠투를 맞닥트릴 경우에는 눈을 마주치지 않아야 하고, 천천히 움직여서 그곳을 벗어나야 한다. 뛰어서 도망가는 것은 금물이다.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걷기에 대한 그의 훌륭한 책 <나는 걷는다>에서,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에 부주의하게 양떼에 접근했다가  터키의 지킴이 개 캉갈과 마주치게 되는 매우 위험하고 긴박했던 장면을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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