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의 목장 풍경은 언제나 평화롭고 아름답다. 파란 하늘아래 눈 덮인 하얀 산, 그 아래 푸른 초원과 흐드러지게 핀 들꽃들...... 그 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떼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히 한 폭의 그림 속에 내가 들어와 있는 듯하다.
<알린느의 목장, 멀리 로비우 산이 보인다. 가운데 있는 덩치 큰 하얀 개가 양들을 늑대로부터 지켜주는 '빠투'이다.>
그러나 백조도 아름답게 노닐려면 물속의 발을 부지런히 저어야 한다고 했듯이, 이 목가적인 풍경 한편에 있는 양우리 안에서는 오늘도 생존의 투쟁이 진행 중이다. 병든 양, 다친 양, 불구가 된 양, 새끼를 돌보지 않은 양 등. 저마다의 사유로 인해 무리에 낄 수 없는 양들이 남들과 합류할 날을 기다리며 갇혀 지내고 있다.
아침을 먹고 나서 목자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양우리를 둘러보며 간밤의 경과를 살피는 것이다. 태어난 지 몇 주가 지나도록 일어서지 못하는 하얀 새끼양 한 마리를 어미와 함께 며칠째 좁은 공간에 격리시켜 두었는데, 시간이 가도 호전될 기미가 없어 보이더니만 오늘 아침에 보니 앞다리까지 마비된 듯 고개만 겨우 가눈 채 늘어져 있었다. 또 다른 한 켠에서는 어미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얼룩무늬의 새끼양(우리는 그 녀석을 ‘쇼콜라’라고 불렀다) 한 마리가 영양실조인 듯 비틀거리며 안간힘을 다해 젖을 찾고 있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쇼꼴라의 어미는 끝까지 젖을 물리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 둘 다 살 가망이 없다. 그래도 정성껏 분유를 먹이면서 이제까지 연명해 왔었지만 알린느는 이미 판단을 내린 듯했다. 늙은 전사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없이 봉초 담배를 말아 입에 물더니 오른손을 바지주머니 속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는 항상 5cm 정도의 작은 단도가 들어 있다.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터였다. 그녀에게 결정할 시간이 온 것이다. 다 포기할 것인가, 차선을 선택할 것인가. 그녀는 경제적 손실을 줄이기 위해 하나라도 살리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한 생명이라도 구해야한다는 실리적인 명분에 앞에서, 죽임의 정당성 같은 것은 재고될 여지가 없었다. 알린느는 내게 저쪽을 보고 있으라고 말함과 동시에 순식간에 일을 감행했다. 하얀 새끼양은 가느다란 비명조차 없었다! 잠깐 동안 알린느는 먼 곳을 바라보며 기도인지 주문인지 혼자 몇마디를 중얼거렸다. 곧이어 알린느의 거친 손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죽은 어린양의 가죽을 순식간에 벗겨냈다. 그녀가 말없이 턱으로 쇼콜라를 가리켰다. 나는 앙상하게 뼈만 남은 쇼꼴라를 안아다가 알린느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다시 빠른 손놀림으로 방금 벗겨낸 하얀 새끼양의 가죽을 쇼꼴라에 덧씌웠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는지 털가죽에서는 김이 올라왔다. 이제 얼룩무늬의 쇼꼴라가 친구의 털가죽을 입고 감쪽같이 하얀 양이된 것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친구였던 하얀 새끼양의 어미 우리에 넣어졌다. 쇼콜라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더니 친구 어미의 젖을 빨기 시작했다. 하얀 양 어미는 쇼꼴라의 엉덩이 냄새를 몇 번 맡아보다가 별다른 의심없이 젖을 물렸다. 어미가 냄새로써 자기 새끼를 분별한다는 사실을 목축업자들은 알고 있었다.
한생명이 죽어서 한 생명이 살아남았다. 생명의 존엄성은 생명의 희생을 통해 보전되었다. 가장 연약한 어린 생명이 가장 강한자의 계산에 따라 무고하게 희생되었건만, 이 냉혹한 현장의 목격자였던 나는, 양들중에서도우리들중에서도죄 지은 자를 찾아낼 수 없었다.
죽은 친구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친구 엄마의 젖을 빠는 쇼콜라! 자기 새끼가 죽은 줄도 모르고 새끼의 친구에게 젖을 내어주는 어미 양! 이 기구한 인연의 '남은 자들'에게 생존이란 어떤 의미일까?
자연의 질서에는 자비가 없었고 인간의 판단은 간결했다. 생존의 문제는 결과 이외의 것을 묻지 않았다. 가죽이 벗겨진 새끼양의 사체를 들고나가면서 나는 아무런 감정을 갖지 않으려 애쓰느라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정오를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평화로운 마을의 들판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친구의 탈을 쓰고 친구의 엄마 앞에 선 쇼꼴라. 지금 쇼꼴라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쇼꼴라가 무사히 젖을 빨기 시작했다. 이 순간, 나는 숙연해졌고, 슬픈 광경인지 기쁜 광경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