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OOF나 Workaway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WWOOF의 호스트가 원하는 일은 대개 농사일이나 목축업 또는 그와 관련된 일이다. Workaway는 분야를 한정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더 넓다고 할 수 있지만, 특별한 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채소밭 가꾸기나 정원관리처럼 몸으로 때우는 일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건물이 많은 유럽에서는 집을 보수하는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목공이나 건축일이 가능한 우퍼들이 호스트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나의 능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나는 우겨서라도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알프스의 양치기가 되는 것이었다.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낭만적인 희망 사항에 불과했지만, 도중에 쫓겨나지만 않는다면 일이 힘들더라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목축업을 하는 호스트들을 다 뒤져서 메일을 보냈다. 어렸을 때에 시골에서 소를 돌본 경험이 있어서 목축업 일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근거를 들이댔다.
호스트들로부터 몇 번의 거절을 경험한 후에, 결국 나를 받아주겠다는 집을 찾아냈다. 이제르에 있는 알린느의 집이다. 양을 치는 일을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었고, 다행히 후기의 평판도 좋았다.
이제르(Isère)는 프랑스 남동부의 알프스 자락에 위치한 군 단위 지역(Département)이다.
그레노블(Grenoble)에서 D529번 도로를 타고 가쁘(Gap)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라뮈르(La Mure)라는 작은 도시가 있는데, 바로 그 옆에 인접한 쉬빌(Susville)이라는 작은 마을이 알린느네 동네다. 상드린느네 집에서 그레노블(Grenoble)까지는 블라블라카를 이용했고, 그레노블에서 쉬빌까지는 지방 버스인 카레지옹(Car Region) 버스를 탔다.
쉬빌로 가는 버스 안은 순박한 시골 사람들의 향기로 가득 찼다. 좀처럼 동양사람이 찾아올 리 없는 시골 촌구석이라 그런지, 승객들 모두가 나를 주시했다. 가끔씩 창밖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는 내게 다가와, 사진을 찍으려면 앞자리가 좋을 거라며 자리를 양보해 주는 할아버지, 다음 모퉁이를 돌면 오른쪽에 멋진 풍경이 나올 테니 그것을 놓치지 말라고 일러주는 할머니, 정류장에 버스가 설 때마다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이 몇 정거장 남았는지 앞다투어 소리치는 개구쟁이 꼬마 녀석들……. 나는 경치를 구경했고, 승객들은 나를 구경했다.
<이제르 Isere의 쉬빌Susville로 가는 길의 풍경> 차창 밖 산세가 점점 험해지고 있었다. 알프스에 근접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알린느가 일러준 정류장에 내렸다. 전화를 했다.
“이반? 오케이! 곧 갈 테니 잠시만 기다려.”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허스키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예사로운 느낌이 아니었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작은 트럭을 몰고 그녀가 나타났다. 백발의 짧은 커트머리에 뿔테 안경을 끼고 진바지를 입고 있었다. 언뜻 보아서는 남자 같기도 했다. 차에서 내리자 피우던 담배꽁초를 길가에 던지며 거친 손을 내밀었다.
“이반? 나 알린느야. 반갑구먼!” 다짜고짜 반말(Tu)로 인사했다. 순간 그녀의 말투에 당황했지만, ‘그래. 요즘에 웬만하면 다 너(Tu)라고 얘기하지. 초면이라고 해서! 당신(Vous)이라고 부를 것까지야. 친근감의 표시겠지.’ 혼자 속으로 생각하며 짐을 싣기 위해 뒷문을 열었다. 순간 짐승의 배설물 냄새가 나를 움찔하게 했다. 낡은 트럭 안은 온갖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고 바닥은 온통 밀짚 부스러기들이 깔려 있었으며 여기저기에 짐승의 배설물들이 묻어 있었다. 헉! 이거 가축 운반차량 아냐? 나는 가방과 배낭을 그나마 좀 깨끗해 보이는 의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앞 좌석에 올라탔다. 앞 좌석이라고 해도 불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얀 운동화가 더럽혀질 것 같아서, 다리를 꼬아 한 발은 바닥을 밟지 않고 앉았다.
“담배 피우나?”, “원하거든 언제든지 저걸 피워도 돼” 신호를 대기하는 틈을 타서 봉초 담배를 다시 말아 문 다음, 앞 유리창 밑으로 담배봉지를 던져 넣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말을 이어갔다.
“집에 손녀딸 둘이 있는데, 동양사람을 직접 보게 된다고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어.” 그녀는 손가락으로 찢어진 눈을 만들어 보이며 나를 보고 웃었다. ‘아니, 이 여자는 그 몸짓이 동양사람을 비하하는 의미라는 걸 몰라서 저러는 걸까?’ 순간 나는 표정이 굳어졌지만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네가 우리 집에 오는 최초의 동양사람이야. 너로서는 영광이겠지!”하며 그녀가 큰 소리로 웃었다. 솔직히 나는 그런 농담에 웃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일단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넘어갈 수밖에. 와우! 이 거칠고 거침없고 여자!, 강적이다! 올 것이 왔구나. 그동안 착한(?) 호스트들을 만나 호사를 누려 왔지만 이번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어차피 내가 안락한 여행을 원해서 WWOOF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 또한 좋은 경험이 되겠지’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각오를 가다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헛웃음이 배어 나왔다. 그래, 한 번 부딪혀보지 뭐!
알린느의 집은 첫눈에도 심란했다. 마당에는 잡동사니들과 아이들 장난감이 여기저기 굴러 다녔고, 수리되지 않은 집은 낡을 대로 낡아서 현관문조차 들어맞지 않았다. 거실은 창고를 방불케 할 정도로 온갖 살림살이들이 질서없이 쌓여 있었다. 그녀가 안내한 내 방은 커튼도 없이 침대만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덮여 있는 거친 양모 이불은 제조년도와 청결도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짐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점심을 먹으러 내려오라고 알린느가 큰소리로 불렀다.
마당에 차려진 간이 식탁에는 세 사람의 우퍼들이 앉아있었다. 모두가 프랑스 사람들이었다. 기욤므는 양치기를 직업으로 하는 젊은이였고, 사를르와 앙투안느는 나와 같은 우퍼였다. 착한 젊은이들로 보였다. 내가 나이가 많아 보였는지, 나름 어르신 예우(?)를 하려 했다. 알린느의 어린 두 손녀 타이스와 에라이는 나를 보고 부끄러워하며 자기들끼리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킬킬댔다.
점심을 먹은 후, 알린느는
“자, 이제 다들 양우리로 가자고!” 말하며 고물 봉고트럭에 올라탔다. 카리스마인지 깡패 매너인지 어쨌든 그녀의 언어는 간결하고 거침이 없었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신발만 장화로 갈아 신고 다른 우퍼들과 함께 봉고 트럭에 올라탔다. 맨 뒤쪽 짐칸에는 양몰이 개 두 마리가 타고 있었는데, 이놈들은 나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큰 소리로 짖어 대며 텃세를 부렸다.
“이반, 양치는 일은 해 봤나?” 차 안에서 알린느가 물었다.
“아니…… 어렸을 때 소 키우는 일은 거들어 봤지만……”
“됐고, 양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구먼! 이제 기욤므가 하나씩 가르쳐 줄 거야” 그녀는 내 대답을 자르고 주의사항을 하달했다. “한 가지만 먼저 얘기해 주지. 차에서 내리면 빠투(양지키는 개)를 보게 될 텐데, 당분간 절대로 눈을 마주쳐서는 안 돼!”
나는 첫날부터 양치기 실습에 돌입했다. 그야말로 양치기 훈련 속성과정이랄까. 새끼양에 줄 분유를 타는 방법, 젖병 관리하는 방법, 새끼양들을 붙잡아 강제로 우유를 먹이는 방법, 여물과 사료 주는 방법 및 배합법, 도망가는 새끼양을 잡아오는 방법, 어미양을 쓰러뜨려 제압하는 요령, 우리 안에 칸막이 치는 방법, 풀밭에 전기 울타리를 치는 법과 거두는 법, 몰이 개들에게 명령하는 법, 빠투를 대하는 법, 양 떼를 이동시킬 때 주의할 사항……
나는 저녁을 먹은 후에 방에 돌아와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침실 천장에 이리저리 쳐져 있는 거미줄과 거미들도, 방 안에까지 풍겨오는 양 똥 냄새도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방금 전에 보았던 우리 안의 양들이나, 커튼도 없는 방에서 카펫 같은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나나 처지는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3일째 되는 날부터는 내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고 다른 우퍼들과도 친해졌다. “Voila (바로 그거야), 이반! 벌써 양치기 폼이 나오는데?” 기욤므는 전기 울타리를 들쳐 매고 가는 나를 보며 장난을 걸어왔고, 알린느는 잠시 쉬는 시간마다 웃으며 다가와 내게 봉초 담배 봉지를 던져 주었다. 그녀의 미소는 천사 같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전사 같았다. 나는 이 두 이미지를 합성하는 데에 애로를 겪고 있었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알린느의 식당은 일대 토론장으로 변했다. 말 많은 프랑스 사람들 특유의 저녁 시간이다. 알린느는 때로는 열변을 토하기도 하고, 때로는 눈을 감고 묵묵히 젊은이들의 얘기를 들으며 토론장의 좌장이 되었다. 정치와 철학은 단골 주제였다. 토론이 불붙으면 알린느는 한국에서는 어떠냐고 내게 물으며 토론장의 완급을 조절했다. 자칭 무정부주의자라는 그녀는 박식했고 진지했다. 젊은 우퍼들에게 밀리지 않을 지식과 논리를 갖추고 있었다. 열띤 토론이 끝나고 나면 “이반, 내 말들을 잘 이해하려면 이 책을 읽어봐. 저 녀석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단 말이야”라고 농담하며 내게 두꺼운 책을 던져주기도 했다. 헐, 내가 불어로 된 저 두꺼운 책들을 어떻게 읽나? 피곤해 죽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알린느가 겉보기와는 다르게 매우 인간적이고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다. 투박해 보였지만 젊은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사람이었고, 그녀의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넓은 아량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그녀는 생각을 얘기하되 강요하지 않았고, 젊은 사람들이 조언을 구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모진 세파를 감당해 오면서 축적되었을 내적인 온유한 힘이 감지되었다.
“이반, 너무 힘들지? 이번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나랑 별장에 가서 쉬었다 오자. 양 돌보는 일은 셀린느가 와서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샤를르와 둘이서 해낼 수 있을 거야.” 방역문제로 40마리의 양에서 혈액을 채취하느라 힘겨웠던 날 점심때, 석쇠 위의 양고기 소시지를 뒤집으며 알린느가 말했다. 아마도 내가 익숙지 않은 이 험한 일과 환경에 나름 인내하며 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었을까?
토요일 오후, 알린느와 나는 3일간의 식량과 몇 권의 책을 챙겨 싣고 별장을 향했다. 인적도 없는 험한 산길이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산비탈에 걸쳐 있는 2차선 도로의 아슬아슬한 모퉁이를 굽이 굽이돌며 낡은 고물 트럭은 알프스 산중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알린느, 운전할 때는 제발 담배 좀 안 피우면 안 될까?” 까마득한 협곡을 내려다보며 두려움이 엄습한 나머지 내가 그녀에게 핀잔을 주었다.
“오~ 이반! 한국에 살아서 돌아가고 싶으면 조용히 있어. 난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손이 떨려서 운전하기 어렵단 말이야!” 수동식 기어를 거칠게 바꿔 넣으며 알린느가 소리쳤다. 그럴 때 알린느는 마치 갱스터 영화에 나오는 여전사처럼 보였다. 어쨌든 며칠 만에 우리는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사이가 됐다.
알린느의 별장은 깊은 산속에 있었다. 2층으로 된 허름한 시골집이었다. 곧 5월에 접어드는데도 알프스의 산속은 겨울 냄새가 났고 산 위에는 아직 눈이 덮여 있었다. 유난히 추위를 탔던 나는 재빨리 집을 한 번 둘러본 다음, 서둘러서 난로에 장작을 가져다 넣고 불을 지폈다. 알린느의 곡예 운전만 빼면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편안했다. 어떤 문명의 소음도 없는 이 조용한 산속에서 별을 세며 이틀을 편히 지낼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가! 더구나 그동안 궁금했던 알린느의 인생사를 들어볼 수도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알린느는 올해 65세이다.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그녀의 남편은 아이들을 낳아 놓고 집을 나간 후, 지금까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행방을 모른다. 30대의 아들과 딸이 있는데 근처 도시에서 산다. 딸은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살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두 아이를 알린느가 키우고 있다. 알린느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났지만, 40세 때부터는 부친의 고향 이제르에 돌아와 양치는 일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한때는 혼자서 1500마리나 되는 양을 치기도 했지만 지금은 300여 마리만 친다. 수익성이 점점 악화돼서 정부 보조금 없이는 축산 농가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알린느는 우퍼들을 활용하여 인건비를 절약함으로써 겨우 겨우 수지를 맞춰가는 듯했다.
일상의 고단한 삶 속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며, 그렇게 해박하고 지적인 그녀가 어떤 연유로 이 산골에서 양을 칠 결심을 했을까? 어째서 그녀는 세상을 비관하며 무정부주의자가 되었을까? 그녀의 풍모에서 보이는 세파는 또 얼마나 모진 것이었을까. 무엇보다도, 거칠어 보이는 말투로는 숨겨지지 않는 이 여걸의 인간적인 면모가 나의 궁금증을 더욱 크게 부풀렸다. 난로 앞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잘 말라 있던 참나무 장작이 큰 불길로 타올라서 거실이 이내 훈훈해졌다. 나는 난로의 문을 닫으려고 장작을 안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바로 그때였다. 뒤쪽에서 무엇인가 쿵! 하고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뛰어가보니 알린느였다. 2층에서 내려오는 계단에서 미끄러져 중심을 잃고 아래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알린느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숨만 몰아쉬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큰 사고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이도 있는 데다가, 엄살을 부리는 성격이 아닌 그녀가 말을 잘 못하는 것을 보면 다쳐도 크게 다친 게 틀림없었다. 나는 알린느를 부축해서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후, 급히 비상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수화기에서는 무심한 기계적 음성만 반복되었다 “통화량이 많아서 지금은 전화를………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필이면 여기서 이런 소리를 불어로 듣게 되다니! 워낙 깊은 산속이라 휴대폰도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당황스럽고 답답한 시간이 30분쯤 흘렀을까. 반갑게도 알린느의 친구 한 사람이 배낭을 메고 들어왔다. 사실 그녀도 여기서 우리와 함께 지내기로 했는데 우리보다 늦게 도착한 것이었다. 그녀는 크게 놀랐지만 나이든 사람답게 침착했다. 30분을 전화통에 더 매달린 끝에 우리는 응급 차량을 부르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1시간이 지나서야 응급차량이 도착했고, 알린느는 그레노블로 이송되었다. 사고발생 4시간 만에 응급처치가 이루어졌다. 그녀가 허리를 다쳤고 상당기간 입원해야 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때는 6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이것이 프랑스 의료시스템의 실상이었다!
조용하고 편안한 휴식을 기대했던, 알프스 산속에서의 2박 3일 휴식 계획은 당혹스럽게 어긋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알린느가 풀어놓았던 짐들을 다시 챙겨서, 뒤늦게 달려온 알린느의 아들 파트릭의 차를 타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5일 동안을 나는 다른 우퍼 샤를르와 함께 우리 안에 있는 알린느의 양을 정성을 다해 돌보았다.
하얀 눈이 덮인 알프스 산을 바라보며, 푸른 초원 위로 이리저리 양 떼를 몰고 다니는 한가로운 목동 노릇을 기대했던 나의 오래된 꿈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양치기…… 처음 해보는 일이라서 그런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고, 동물을 다루는 일은 내게 맞지 않은 일이라고 단정하게 되었다. 앞으로 알프스의 목동은 사진으로만 감상하기로 했다.
알린느는 내가 그녀의 집을 떠날 때까지도 퇴원하지 못했다. 그녀는 2주가 지난 후에야 집에 돌아왔다고 나중에 들었다. 다행히 척추를 많이 다치지는 않았다고 했다. 나는 가끔씩 전화로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특유의 거친 말투로 돌아와 호기 있게 말했다. “나 건강하니까, 이제 그런 거 물어보지 마. 대신에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한 번 들렀다 가. 내가 준 책은 읽지도 않고 놓고 갔더만!”
들판의 밀밭들이 누렇게 익어가던 유월 하순, 드골 공항에서 서울로 향하는 대한항공 902편 탑승구 앞. 상념에 젖어 3개월 동안의 기억들을 잠시 되돌아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알린느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알린느의 집 <알린느의 양과 염소들> <이제르 초원의 여전사 알린느, 그녀가 풀밭에 나타나면 몰이꾼 개는 언제나 양쪽에서 그녀를 호위하며 빠투가 뒤따른다.>
<양 떼를 몰고 가는 알린느> <딸과 함께 숫양(bélier)의 발톱을 깎고 있는 알린느> < 방역 검사를 위해 채혈 대기 중인 우리 안의 암양들.> <양들은 새하얀 솜털 구름 같은 순백색 동물이 아니었다. 양치기 입장에서 보면 이들이 순한 동물인지, 순결한 동물인지도 잘 모르겠다.> <알린느는 젊은 우퍼들과 토론하기를 좋아했고 그들의 다정한 상담자였다. 야외에서 점심 후 커피타임>
<전문 양치기 기욤므, 우퍼 앙투완느와 함께> <사고가 일어났던 알린느의 산속 오두막 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