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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반 Dec 01. 2023

지중해에 뜨는 별(2)

프랑스에서 90일

도미니끄는 항상 집에 있었다. 가끔 혼자서 마당에 있는 올리브나무 그늘에 앉아 멍한 표정으로 마리화나 담배를 피웠다. 나이는 나보다 적었지만, 과로로 인해 심장에 이상이 생긴 탓에 셰프 일을 그만두고 정부 보조금을 받아 생활한다. 세브린느는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그 지역의 한 사회문제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도미니끄네 집 마당>

다섯째 날, 오전에 나와 도미니끄가 창고 정리하기를 마쳤을 즈음, 점심을 먹으러 세브린느가 자전거를 타고 집에 들어왔다. 그들의 한국 여행 일정에 대한 얘기, 나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얘기 등등 우리가 나눠야 할 얘기가 쌓여 있었지만 세브린느가 워낙 바빴기 때문에, 우리는 얘기할 시간이 부족해서 항상 쫓기듯이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하지만 내게는 꼭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이 집에 오기로 마음먹은 첫 번째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할 얘기가 있으니 떠나기 전날까지 두 사람 각각 최소 30분의 시간을 내게 내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로서는 예기치 못한 요청이었을 터이지만 세브린느는 환한 얼굴로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동안 활달하게 보이려 애써왔던 도미니끄는 이 요청에 대답을 망설였다.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내가 어떤 얘기를 할 것인지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너무나 오랫동안 외면해 왔던, 그리고 결국 자기 자신을 대면하게 될 바로 그 두려운 이야기를 나와 나누게 될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이런 얘기를 꼭 나누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망설였고 기도했다. 과연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내가 그 이야기를 나눌 만한 자격이 있는지…… 그러나 테제에 있던 동안 나는 이 얘기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웠을 그 비밀을 내가 들어주고 싶었다. 세브린느도 내가 그 이야기를 도미니끄와 나누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프롱티냥에서 몽펠리에 쪽으로 해변을 따라가면 '까마르그'라는 광활한 습지대가 펼쳐진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잘 보존된 자연경관이다. 지중해와 프랑스 대륙 사이에 있는 습지에는 거대한 석호 연못(étang)들이 산재해 있다. 도미니끄는 자기가 좋아하는 그 습지대를 내가 꼭 보았으면 좋겠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까마르그는 과연 순천만의 갈대밭을 연상시키는 광활한 습지였다. 차로 달려도 한 시간 넘게 걸릴 만큼 드넓은 땅이었다. 그 가운데 있는, 바다처럼 넓은 연못에는 홍학을 비롯한 각종 새떼가 날아들어 장관을 이루었다. 우리는 차를 세워두고 이 습지를 가로질러 걸었다. 지중해 해변까지는 30분쯤 걸렸다. 그날따라 지중해는 선명한 파란색이었고 수평선 위로 하얀 뭉게구름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까마르그 습지의 포도밭 풍경>
<끝이 보이지 않는 습지>
<까마르그에 있는 지중해의 염전>


우리는 바닷가에 가장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한동안 둘 다  말없이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할 것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요?”라고 묻는 말 한마디에 그는 긴 한숨과 함께, 마치 자수하듯이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질문할 필요가 없었고 두서없이 이어지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저 듣기만 했다. 먼 옛날 이국에서 시작된, 다섯 살 어린아이의 외롭고 고단했던 삶의 파노라마가 한 조각씩 종이배로 접혀져, 닿을 곳 없는 지중해의 수평선을 향해 띄워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이야기, 돌아가신 프랑스인 양부모에 대한 기억, 세브린느를 만난 사연, 그가 자랐던 고향 오브나...... 그러나 한국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 꺼내지 않았다. 그는 멀리 수평선에 시선을 던져둔 채, 나를 보지 않고 얘기했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그가 헛웃음과 함께  흐리듯 말을 멈추었다. 침묵이 흐르면서 물결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해가 지중해의 수평선에 걸리자 온 세상은 주홍색의 황홀한 그림으로 변하더니 이내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맑은 날이라서 그런지 초저녁인데도 별들이 하나씩 나타나고 있었다.


<까마르그의 석호. 출처: https://ot-sommieres.com>

우리는 집에 돌아와서 와인 두 병을 비웠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명료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어렸을 때 그가 잠시 행복하게 살았던 그의 고향 오브나에 대해 얘기했던 것 같다. 공교롭게도 나의 다음 방문지가 오브나였다. 다음날 아침, 술 때문인지 아침에 늦게 일어난 그가 나를 보자마자 정말 고마웠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했다. 그동안 세브린느와 내가 그들의 한국 여행 일정에 대해 얘기할 때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외면하거나 자리를 떴던 그가 한국에 대해 묻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이제 그는 자기의 과거를 내놓고 얘기할 사람을 찾은 것이다. 밀양이란 곳을 아느냐고 물었다. 거기서 태어났다고 했다. 서울에 고아원이 몇 개나 되는지도 물었다. 잠시 후, 도미니끄는 낡은 신분증 하나를 가져와 수줍은 듯 웃으며 내게 내밀었다. 표지에는 '대한민국 단수여권'이라 쓰여 있었다. ‘박을용, 1970년 11월 14일 생, 신장 100 Cm, 여행 목적 : 입양'. 그것이 쓰인 내용의 전부였고, 그것이 그의 과거에 대한 기록의 전부였다. 부착된 사진에는 머리를 짧게 깎은 5살짜리 어린아이가 생년월일과 영문 이름이 쓰여있는 표지를 가슴에 붙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어린아이 앞에 펼쳐질 삶이 모습을 누가 예측할 수 있을까. 다만 나는 저 순간에 아이가 감당해야 할 두려움의 크기를 짐작해 보느라 사진을 살피는 척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의 신분증에 쓰여 있는 글씨를 읽을 줄 모른다. 아마도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을 50년 동안이나 간직하고 있었구나!......'  마땅한 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아이가 요리를 참 잘하게  생겼다는 어울리지도 않는 농담을 건네며, 그의 셔츠 앞주머니에 꽂혀 있는 담배를 허락도 없이 꺼내 물었다.


지나간 얘기지만, 도미니끄와 함께 해변에 앉아 있을 때 나는 무슨 까닭에서였는지, 잘 알려진 시 한 편을 떠올렸었다.


저 녁 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맑은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 후로 일주일 뒤, 내가 프랑스에서 WWOOF를 계속하는 동안, 도미니끄는 가족과 함께 2주 동안 한국을 여행하고 돌아갔다. 빡빡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세브린느의 요구대로 밀양 방문 일정을 여행계획에 끼워 넣었었는데, 실제로 그들이 밀양을 다녀갔는지는 모르겠다. 도미니끄는 꼭 다시 오겠다는 짧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다'고 읽혀졌다.


<지중해의 일몰, https://www.linternaute.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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