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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반 Nov 29. 2023

지중해에 뜨는 별(1)

프랑스에 90일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는 호스트를 정하는 일에 한 달이 넘도록 매진했다. 내가 가고자 하는 지역에 살고 있고 나의 관심에 부합하는 호스트들을 찾아내어, 나의 동선과 일정에 맞추어 순차적으로 예약을 해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에 나는 여행 준비의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다. 맘에 드는 호스트를 찾았더라도 일정이 서로 맞지 않을 때가 많았고, 이미 다른 사람이 예약한 후라서 자리가 없을 때도 있었다. 응답이 없는 호스트들도 있었다. 수 십 편의 호스트 프로필과 후기들을 읽었고 백 통이 넘는 메일을 주고받았다. 


어느날 Workaway의 호스트를 검색하다가, 나는 ‘한국 사람을 환영한다’는 프로필 구절을 발견하고 시선을 멈췄다. 웬 프랑스 사람이 한국인을 환영하는가. 프로필과 후기를 꼼꼼히 읽어보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것은 내가 찾는 호스트와 거리가 멀었다. 최근 3년간 여행자를 맞이한 기록이 전혀 없어서 유효한 호스트인지도 의심스러웠고, 더군다나 프랑스의 남서부에 위치한 프롱티냥(Frontignant)은 내가 계획한 여행 동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설령 약속이 된다 하더라도 나머지 여행계획을 일부분 수정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시간에 쫒긴 나머지 어떤 곳이라도 일단 정하고 보자는 심산으로,  별 기대도 없이 헛탕치는 셈 치고 메일을 보내 보았다. 그런데 일 주일쯤 후,  호스트인 세브린느로부터 예상과는 달리 뜻밖의 장문의 답변이 왔다. 내가 바로 자기들이 기다리는 그 사람이라는 것, 그녀는 최근 3년 동안 여행자들을 받지도 않았고, 그래서 아예 계정을 삭제하려고 사이트에 로그인 했다가 때마침 나의 메일을 발견했다는 것, 그녀의 가족은 한국을 방문해야만 하는 중요한 사연이 있다는 것, 지금 그들이 처음으로 한국 방문을 준비하고 있어서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일정을 변경해서라도 꼭 방문해 주기를 학수 고대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가족들 개개인의 상세한 설명까지 덧붙여서, 내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호감을 가질 수 있도록 애쓴 모습이 역력했다. 답장이라기 보다는 격식을 갖춘 정중한 부탁이었다.  


애초에 별 기대하지 않았는 나는 뜻밖의 상황에 난감했다. 막상 일정을 들여다보니, 그 사이에 다른 곳들이 몇 군데 이미 정해진 터라 일정을 끼워 맞추기 쉽지 않은 데다가, 이미 첫 번째로 방문하기로 예약한 Chevinay로부터 400km이상 떨어져 있는 곳이고, 나중에 내가 주로 돌아다니기로 맘먹었던 오뜨사부아로부터는 600km 이상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가능한 한 적게 움직인다는 내 여행 원칙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난감했지만, 그러나 먼저 메일을 보낸 사람이 나였기에 어떻게든 그곳을 방문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고심 끝에 나는 첫 방문지의 호스트에게 약속했던 일정을 좀 줄여도 되는지를 타진했다. 다행히도 오케이였다. 나머지 일정은 조금씩 조정해 가면 될 터였다. 

<세브린느가 살고 있는 프롱티냥. 남프랑스의 지중해 해변이다.>

세브린느와는 몇 번의 메일을 더 주고받으며 나는 그 가정에 대해서 조금씩 더 알게 되었다. 그녀는 사회학 박사로서 몽쁠리에 대학에서 강의를 해 온 엘리트였다. 그녀의 남편 도미니끄는 다섯 살 때에 한국으로부터 입양되어 왔으나 아직 한 번도 한국을 가본 적이 없으며 한국말도 전혀 못한다. 직업은 요리사이다. 청소년기에 있는 두 아들이 있는데 이들과 함께 온 가족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나로부터 한국방문에 따른 조언을 구하고 싶어 했다. 나는 내가 그들을 도와줄 일이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들이 왜 지금 한국을 방문하려 하는지 궁금해졌고,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하는 이 인생의 나그네를 한 번 만나보고 싶어졌다. 진정으로 따뜻하게 도와주고 싶었다.

여행 경비를 걱정하는 그들에게, 나는 그들이 서울에 머무를 며칠 동안의 숙박을 해결해 주고 싶었지만, 4명의 식구를 맞아들이기에는 우리 집이 너무 좁았다. 더구나 그들이 한국에 올 때에는 내가 프랑스에 가 있을 터였기에 더욱 어려운 문제였다. 고심끝에 나는 L선배에게 조심스럽게 이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그분은 오랜 기간 동안 스위스의 국제기구에서 고위 공직자로 일하다가 지금은 은퇴하여 서울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뜻밖에도 L선배는 흔쾌히 그들이 자기집에서 머물러도 좋다고 했다. 나는 적잖이 놀랐고 감동했다. 전혀 알지도 못하고 연고도 없는 외국인을,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한 가족을 맞아들여 며칠 동안 머물도록 배려한다는 것은 쉽게 마음먹을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유럽의 문화를 몸에 익혀온 분의 생각은 달랐다. 주저없이 그들을 돕겠다고 즉석에서 나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삶의 철학이 체화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막상 실천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내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세브린느에게 이 소식을 알렸음은 물론이다. 

어쨋든 모든 것이 기묘하게 맞아 떨어져 연결되는 이 인연에 기대감이 한층 더해졌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마주치게 되는 모든 일들은 우리가 애당초 계획했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는, 이 모든 것이 한갓 우연일 뿐이라고 단정하고 싶지 않은, 신비에 대한 기대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번째 Workaway 호스트였던 에르베네 집에서 프롱티냥으로 가려면, 보통 리용에서 몽쁠리에까지 TGV(고속열차)를 타고간 다음, 프롱티냥으로 가는 TER(지방열차) 기차로 갈아타게 된다. 프롱티냥으로 가는 길에서 본 차창 밖 풍경은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세브린느가 세심하게 일러준 대로 나는 열차의 왼쪽 좌석에 앉아 지중해 쪽을 바라보았다. 광활한 습지 너머로 언뜻 언뜻 건너다 보이는 지중해의 파란색은 어디까지가 수평선이고 어디서부터 하늘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낮고 아담한 담황색 지붕의 집들, 포도밭 사이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듯한 사이프러스, 차창 밖으로 지나쳐 가는 올리브 나무들과 야자수……. 저마다 내가 남프랑스에 왔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었다. 


<세뜨(Sète)에서 바라본 지중해>


<지중해 연안에 있는 연못들>


프롱티냥 역은 사람들로 꽤 붐볐지만 다들 여유롭고 차분해 보였다. 때는 마침 부활절이었다. 배낭을 고쳐 매고 역사에서 나와 마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서자마자, 나는 마당에 서있는 세브린느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녀가 가족들과 함께 도열하듯이 서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치 무슨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이나 된 듯, 따뜻하고 정중한 환영을 받았다. 첫 대면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오랫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반갑게 인사했다. 둘째아들 에지는 수줍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남편 도미니끄는 말없이 다가와서 포옹을 했다. 얼굴로 봐서는 그는 분명히 한국 사람이었다!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 세브린느는 오늘 함께할 점심 식사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프랑스에는 부활절에 새끼 염소고기를 먹는 전통이 있어서 바비큐를 준비했다고 했다. 세브린느의 부모와 친지들이 모여서 식탁을 차려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또한 나를 격의 없이 대해 주었다. 남프랑스 사람들 특유의 밝고 호탕한 사람들이었다. 도미니끄가 직접 요리했다는 새끼염소의 바비큐는 정말 맛있었다. 그는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는 옆동네 쎄뜨(Sète)에서 가장 큰 레스토랑의 셰프로 일했었다. 식사가 끝나자 도미니끄는 마당옆에 있는 채소밭을 둘러보게 했고, 둘째 아들 에지는 신이 나서 싱글벙글하며 마당에 설치된 간이 수영장을 내게 자랑했다. 세브린느가 부엌과 다른 방들을 둘러보게 한 뒤, 나를 2층에 마련된 방으로 안내했다. 그들의 집은 지은지 오래되어 다소 허름해 보였고 잘 정돈되어 있지 않았지만 왠지 그것이 오히려 마음을 더 편안하게 해주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내가 기거할 방의 책상 위에는 주변 관광지 소개 자료들이 예쁘게 놓여 있었고 WiFi 접속 안내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세심하게 준비돼 있었고, 나는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다. 

<세브린느는 주변 관광 안내 자료들을 모아 내가 쓸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내가 프롱티냥에 머물렀는 동안 내내,  도미니끄는 저녁마다 내게 갖가지 요리로 나를 대접했다. 뿐만아니라 그는 내가 오기 일주일 전에 김치를 담가놓고 나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인터넷을 보고 나름 성의를 다해서 담갔다는데, 올리브유를 두르고 잣과 고수를 얹어서 내 놓은 그의 김치는, 지금껏 내가 먹어 본 김치중에서 가장 희한한 맛이었다.  그 지방 특별요리인 까이에뜨, 아랍 전통 음식인 타진, 지중해 생굴요리.......덕분에 나는 식도락을 즐겼다.   

온 정성을 다해 다른 사람을 환영하고 배려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이들은 우리들과 유전자가 많이 다른 사람들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우리의 대면은 축제처럼 시작되었다.


<도미니끄가 나를 위해 준비한 김치. 젓가락을 준비했고, 올리브유를 뿌리고 고수를 얹어 놓았다. 정성으로 감동을 주는 요리였다.>


<도미니끄가 만들어준 타진, 그의 요리솜씨는 과연 셰프가 어떤 직업인지를 보여주는 듯 정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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