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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반 Nov 27. 2023

우연, 인연, 그리고 섭리

프랑스에서 90일

에르베의 집에서 일하던 어느 날,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서, 오후에 누군가가 찾아올 거라고 에르베가 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에르베의 친구가 찾아오나 보다 하고 생각하며 그가 누구인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오전 일이 끝나고 점심을 먹은 후, 방에 들어가 잠깐 낮잠을 자고 거실에 나와보니 어떤 노파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80은 넘어 보이는 할머니였는데 밝고 건강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어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요.”
 “???”
 어안이 벙벙하여 당황하는 나를 보며 그녀는 또다시
“나는 당신의 이름도, 당신의 나이도 다 알고 있지요.”라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이 머나먼 타국에서 도대체 어떻게 나를 알고 있다는 것인가?  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잠시 기억을 찾아보려 애썼지만 도무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 이름은 니꼴이고 에르베의 엄마예요.”
놀랬지? 하는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니꼴! 나는 그제야 가까스로 그 이름을 기억해 냈다. 내가 호스트를 검색하면서 방문을 신청했으나 나를 거절했던 그 할머니, 그러니까 그녀가 바로 에르베의 어머니였다는 말이다! 부엌에서 커피를 준비하던 에르베가 히죽거렸다.

<우연에서 인연으로>

내막은 이렇다. 나는 가능한 한 동선을 줄이려고 테제에서 가까운 리용 근처의 호스트들을 검색하다가 리용 교외에서 혼자 사는 노파를 발견하고 방문을 신청했었다. 며칠 후 답장이 왔고, 사정이 있어 나를 받아줄 수 없다는 짧은 내용이었는데, 마지막 문장이 ‘나는 정말 dol 합니다.’였다. dol이라니! 나는 dol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았지만 그것은 사전에도 없는 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아마도 이 할머니가 나이가 들어 손이 떨린 나머지, 아프다(douleureuse)는 단어를 잘못 입력했는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나는 빨리 건강을 회복하기 바란다는 답장을 해 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녀는 아들 에르베로부터 내가 아들의 집에 와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녀도 에르베도 각자가 따로 호스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했다는 것과, 본의 아니게 이상한 단어로 답변했었다는 말을 내게 전하고자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사실은 그녀의 실수가 아니라 휴대폰의 오작동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쓰려고 했던 ‘미안하다(désolé)’는 단어는 그 기기에서 제대로 입력되지 않고 dol이라고 찍혔던 것이다. (결국 나중에 그녀는 휴대폰을 새것으로 바꾸었다.) 어쨌든 우리는 사실상 초면이 아닌 셈이었고, 휴대폰의 오작동으로 인해 이미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가진 관계였다.


우리는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왔던 사람들처럼 격의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런데 앞으로 나의 여정에 대해 얘기하던 중, 우리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내가 마지막으로 Workaway를 하게 될 곳이 알프스의 지에뜨에 있는 카트린느네 집인데, 니꼴이 깜짝 놀라며 그 집을 자기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에 여름휴가를 바로 그 집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니꼴은 카트린느네 식구들과 그 마을의 이모저모를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때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세상이 좁다는 말도 있지만 이것은 또 무슨 우연인가?

<Nicole이 초대한 저녁식사>

이틀 후에 Nicole은 나를 자기 집으로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었다.

그녀의 집은 리용 시가지가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 있었다. 에르베네 집으로부터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그녀는 올해 84세이다. 남편과는 젊은 나이에 이혼했다. 그 후 그녀는 아들 에르베의 도움을 받으며 혼자서 이 집을 지었다고 한다. 작고 아담한 집이었다. 거기에는 세르비아에서 Workaway를 하러 온 Serge라는 스물다섯 살의 젊은 청년이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Workawayer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여행을 갈 때도 Workawayer를 데리고 간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호스트였다. 우리 모두는 그날 그녀가 준비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함께 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집에 돌아와 보니 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그 이후로 내가 에르베의 집을 떠나, 오뜨사부아에서 WWOOF를 계속하는 동안, 그녀는 혼자 코르시카 섬으로 달간의 여행을 떠났다. 이번이 혼자 떠나는 마지막 여행이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녀는 90을 바라보는 고령인데다가 목디스크를 앓고 있어서 운전마저 여의치 않은데도 그 먼 곳까지 차를 몰고 여행을 감행했다. 에르베도 혀를 내둘렀다. 그녀의 열정과 삶의 태도는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나이 들면서 스스로 위축된다. 그러나 행동반경을 좁혀가며 고립되고 칩거하는 보통의 노인들과 달리, 니꼴은 노후의 삶을 활력 있게 경영해 가는 자기만의 방법을 실천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마음에 품고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나이든 사람이 젊은이들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었다. 대개 나이든 사람들은 자신이 자기 자식 이외의 타인에게 매우 인색하다는 사실조차도 잘 모른다. 니꼴은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대접하고 보살핌으로써, 풍성하고 활기찬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에르베와 마찬가지로,  절제되고 품격 있는 매너를 자연스럽게 가르쳐주었다. 얘기 중에 드러나는 나의 미숙한 불어 표현을 가끔씩 교정해 주면서도 그녀는 내가 실수를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나의 WWOOF 여행이 끝날 무렵에 프랑스에 오기로 되어있던 나의 아내를, 이번 여행 때문에 맞아주지 못하게 되었다고 몇 번이나 문자로 아쉬움을 전해왔다.


나는 존경심과 함께 여러 가지가 궁금했다. 이제 90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리 넉넉지 않은 살림과 건강에도 불구하고, 외국의 젊은이들을 맞이하여 삶을 나누고 베푸는 그 따뜻하고 자애로운 마음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나이 들어서도 저토록 활력 있게 자신의 삶을 경영해 가는 방법을 어떻게 터득하였을까. 격의 없이 친근하면서도, 과하지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균형감각은 타고나야 하는 것일까. 실수와 우연으로 시작된 이 관계는 우연일까 인연일까.......  

우리는 삶에서 부딪히는 일들 모두를 다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런 것들에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해능력 너머의 것이다.우리가 숭배하는 과학이란 것은 그런 것들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무기력해서, 리는 다만 한가지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우연으로 치부하든지 인연으로 이해하든지,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여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또 다른 길, 즉 섭리라고 하는 또 다른 차원의 이해방식이 있다. 그것은 신앙에서 발원하는 의지적인 시각이다. 나는 이 우연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는 메신저로 자주 안부를 물었다.

어느 날 코르시카 섬으로부터 몇 장의 사진과 함께 긴 글이 날아왔다. 그토록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생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는 반가운 내용이었다. 글의 말미에는 그녀다운 유머가 달려 있었다. 나와 그 문자사건 이후, 그녀는 데졸레(désolé, 미안한) 라는 단어 대신에 나브레(navré, 애석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나는 오늘도 그녀의 건강을 염려한다. 다시 건강한 얼굴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다.


<6월 초, 코르시카에서 그녀가 보내온 사진. 남쪽 섬의 풍경답게 색상이 화사하다.>
< 그녀는 이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새로운 힘을 되찾았다고 썼다. 물가가 많이 올랐다. 감성돔 1kg에 2만 8000원.>
<코르시카 특산 치즈들>
<내가 소세지를 좋아하더라며 시장에서 이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멧돼지고기로 만든 소세지가 1kg에 4만 7000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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