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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반 Nov 22. 2023

슈비네의 구도자 에르베(1)

첫 번째 Workaway

4월 2일 일요일 오후, 테제에서 1주일간의 공동체생활을 마치고 리용 근처에 있는 슈비네(chevinay)를 향해 여정을 시작했다. 이제부터 연달아서 Workaway와 WWOOF가 진행되는 것이다. 멀지 않은 거리지만 열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한다. 마콩 빌(Macon Ville) 역을 출발하여 생 제르맹 오 몽 도르(Saint-Germain-au-Mont-d’Or)라는 긴 이름의 역과 아르브렐(Arbresle) 역을 거쳐 생벨(sain-bel) 역까지 가는 여정이다. 비가 부슬부슬 쉬지 않고 내렸다. 혼자서 낯선 열차를 타고 이국 땅을 여행할 때면 문득문득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나는 이들을 아예 친구들로 명명하고 인생을 동반하기로 한 지 오래되었다. 이름하여 김고독, 박허무, 최불안이다. 사람 하나 없고 역무원조차 보이지 않는 아르브렐(Arbresle)에서 갈아탈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이슬비 속으로 김고독이 찾아왔다. 늦은 오후, 인적이 없는 낯선 간이역은 쓸쓸한 감정을 넘어서 언뜻언뜻 이유 없는 슬픔의 감정을 자아낸다.


에르베(Hervé)는 1분도 틀리지 않게 정확한 시간에 생밸역 주차장에 하얀색 르노 조에(Zoe)를 타고 나타냈다. 60이 조금 넘어 보이는 얼굴에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그는 머리를 뒤로 묶고 있었다. 무척 점잖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는 아무 말없이 엷은 미소를 띠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간단한 인사말로 짧게 응수했다. 보통의 프랑스 사람과는 달리 말 수가 적었으며 목소리는 들릴까 말까 할 정도로 조용했고 표현은 간결했다. 초면이었지만 우리는 마치 긴 말이 필요치 않은 오래된 관계처럼 별다른 소개도 탐색도 없이 그저 날씨에 대한 몇 마디 얘기만을 나눌 뿐이었다.


그의 집은 생벨역에서 멀지 않았다. 과수원들 속에 드문드문 늘어선 몇 채의 농가들을 지나 좁은 길을 따라 완만한 오르막길을 올라가자, 야트마한 언덕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 그의 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주변은 온통 체리 꽃이 하얗게 만발했다. 오래돼 보였지만 대여섯 채의 건물이 이어져 있는 꽤 큰 저택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범상치 않은 느낌이었다. 돌바닥이 깔려 있는 마당 가운데에는 석조 분수대가 설치돼 있었고, 본체 현관문 앞에는 등나무 그늘 아래 놓여져 있는 야외 식탁 옆으로 꽤 오래돼 보이는 올리브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집은 깨끗하게 잘 정돈돼 있었다. 문고리 하나, 벽면 하나마다 미술적인 치장을 한 것으로 보아 그가 미술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쓸 방을 안내했다. 그의 딸 에바가 쓰던 방이었다. 벽에 붙은 사진, 장롱에 정리된 옷가지이며 책꽂이에 꽂혀 있는 노트와 책, 문방구에 이르기까지 마치 어제까지 딸이 쓰고 있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두개의 침대가 있는 방은 아늑했고 편안했다.

 

<에르베의 집과 농장, 지뜨 Gites도 운영한다. 자동차로 리용 근처를 지나가는 여행자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https://giteles7fontaines.fr/>
<하얀 체리꽃이 만발한 슈비네의 에르베네 집>
<에르베네 집의 안 뜰>

내가 짐을 풀고 샤워를 하는 동안 에르베는 혼자서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그는 혼자서 산다. 아내와는 몇 년 전에 이혼했다. 어쨌든 나로서는 오랜만에 프랑스 가정식을 먹어보는 셈이다. 2층에서 아들 마티유와 그의 여자친구 엠마가 내려와서 같이 식탁에 앉았다. 마티유는 스물일곱 살의 준수한 청년이었다. 외부 사람과의 접촉에 익숙해서 그런지 초면임에도 격의 없고 친절한 태도로 나를 대해주었다. 뉴질랜드에서 온 엠마 역시 상냥했다. 남자친구인 마티유를 만나러 프랑스에 여행을 온 모양이었다. 그녀가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식탁에서는 영어와 불어가 마구 뒤섞였다. 엠마는 나 때문에 오늘 저녁식사가 더 풍성해졌다고 좋아했다.

이른 저녁식사가 끝나고, 에르베는 내가 내일 해야 할 일을 일러주겠다며 과수원 위쪽에 위치한 채소밭으로 데려갔다.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었는데 딱 한 번의 시범을 보여주었다. 나중에 보니 그의 이런 시간표는 내가 이 집을 떠나올 때까지 정확하게 반복되었다. 이어서 그는 자기 집을 구경시켜 주었다. 내 방이 있는 본채는 돌과 흙으로 쌓아 올린 2층 건물이었는데 넓은 거실과 여러 개의 방이 잘 정돈돼 있었다. 마당을 지나 계단을 내려가면 두 개의 별채가 있는데 실내 수영장, 명상하는 방, 요가수련장 등으로 꾸며져 있고 손님을 맞이하는 스튀디오(Studio, 원룸가구)가 있었다. 그는 이 스튀디오와 본채의 방들을 이용하여 ‘일곱 연못‘( Les 7 Fontaines)이라는 이름으로 지뜨(Gite, 프랑스 농가 숙박)를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에르베가 혼자서 이 넓은 농장과 집, 그리고 지뜨를 동시에 운영한다는 것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처음 해보는 Workaway 첫날은 이렇게 날이 저물었다. 긴장했던 바와는 달리 마음이 편안했다. 에르베의 차분한 환대가 나를 안심시켰기 때문이다. 조용한 목소리,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심스러운 걸음걸이, 온화한 미소...... 나는 그의 귀족적인 풍모가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지만, 간혹 보이는 그의 꾸밈없는 웃음 속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마음이 통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편안함과 안도감속에서 숙면을 취했다.

<에르베의 딸 엠마의 방. 그는 내게 이 방을 내주었다.>
<별채에 마련된 수영장>
<요가 수련실>
<다목적 명상수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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