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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반 Dec 15. 2023

Giettaz의 빵가게

 카트린느는 약속시간보다 15분이나 늦게 플뤼\메(Flumet)의 버스정류장에 나타났다. 뿔테 안경에 검게 그을린 얼굴, 관리되지 않은 희끗희끗한 머리, 작업복장에 장화까지 신고 온 그녀는 그야말로 방금 밭에서 일하다가 뛰어나온 촌부의 거친 모습이었다. 늦어서 미안하다며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는 그녀는 순박해 보였다. 내가 불어를 못하는 줄 알았던지 내가 불어로 대답하자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그녀의 맑은 웃음 속에서 그녀가 정말 꾸밈없는 사람이란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뜨사부아에 있는 호스트를 검색하던 중, 마침 빵가게를 운영한다는 호스트를 발견하고 이거다 싶어 신청을 했는데 다행히 O.K. 였다. 리용에 있는 에르베의 어머니, 니꼴이 말한 바로 그 집이다. Woofer들이 쓴 후기의 평가도 매우 좋았고, 무엇보다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내용이 맘에 들었다. 매일 아침 빵을 구울테니 내가 좋아하는 따끈따끈한 바게뜨 빵을 아침마다 먹을 수 있을 것이고, 식료잡화점까지 겸하고 있으니 잘 먹게 되는 것은 당연하렸다!


지에뜨(Giettaz)는 플뤼메(Flumet)에서 아라비 재(Col des Aravis)를 넘어 안시(Annecy)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오뜨사부아의 작은 마을이다. 아라비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 쳐진 심산유곡이라서 버스조차 다니지 않는다. 그 유명한 프랑스 자전거 경주 ‘뚜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가 이 마을을 지나간다. 동네 한가운데에 13세기에 지어진 성당이 기품 있게 서 있고, 아라비 재로 넘어가는 산비탈에 드문드문 집들이 널려 있는 평화롭고 아늑한 동네였다. 지에뜨도 스키장 동네로 분류되지만 지근거리에 므제브(Megeve)와 클뤼자(Clusaz)와 같은 유명한 스키장 동네들이 있어, 스키를 즐기는 프랑스인들의 대표적인 겨울 휴양지에 속한다. 그동안 두 번 있었던 프랑스의 동계올림픽 개최지, 샤모니와 알베르빌의 중간쯤 되는 위치인데 양쪽 다 자동차로 40여분 걸린다.

<Giettaz의 전경, https://www.valdarly-montblanc.com>
아라비 재에서 찍은 지에뜨 동네의 파노라마. 주변 산세가 제법 험하다.
동네 뒤쪽 아라비 재에서 들리는 워낭소리

나는 까트린느(Catherine)의 집에서 20일을 지내기로 했다. 까트린느는 집 위쪽에 있는 목초지 가운데에 밭을 일구어 놓고 채소 농사를 짓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은 채소를 가꾸고 밭을 일구는 일이었다.

까뜨린느는 매우 영리하고 사리가 바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리용에서 학교를 다녔고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남편 앙드레를 만나 이곳으로 내려왔다. 3대째 동네 빵가게를 하고 있는 셈이다. 딸 하나와 아들 넷을 두었는데, 까트린느를 닮아서 그런지 다들 신앙심이 깊었고, 한결같이 영리해서 프랑스 유수의 그랑제꼴을 졸업하거나 재학 중이다. 까트린느는 새벽 5시부터 해가 질 때까지 눈코 뜰 새 없이 일을 한다. 남편 앙드레와 함께 새벽부터 빵을 굽고, 알베르빌에 가서 식료품가게에서 팔 채소와 물건들을 사 오고, 가게의 고관리와 회계업무, 잡다한 집안 일과 식사를 준비하는 일, 채소밭 가꾸는 일, 시어머니 돌보는 일까지…… 그러나 언제나 밝고 웃음이 가득하다. 어떻게 그렇게 바쁜 가운데서도 불평 한 번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게 자기의 천성이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분명하고 소신 있는 전형적인 프랑스 여자다. 첫날 저녁에, 자기 집에서는 우퍼들에게 하루 4시간 일할 것을 요청한다는 것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 식사시간과 생활 규칙 등을 일목요연하고도 분명하게 말해주었다.

까트린느네 가게. 동네의 유일한 빵가게다
채소발에서 일하는 필자. 구름에 가려있는 뒷 산이 아라비산 체인이다. 구름보다 산이 높아 아주 맑은 날이 아니면 산 정상을 볼 수 없다.
동네 뒤에 있는 기도실. 눈사태로 파손된 것을 앙드레와 동네주민들이 1988년에 다시 세웠다. 저녁 산책 때 앉아 있다 오곤 했다.
맑게 갠 날의 까트린느네 채소밭
내가 좋아하는  라끌렛뜨  La racclette. 이 지방에서는 Le reblochon,  Le beaufort 등 주민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고급 치즈들이 생산된다.

기대했던 바와 같이, 나는 매일 아침 앙드레가 가져온 갓 구운 바게뜨 빵으로 맛있는 식사를 했다. 점심과 저녁에는 손 빠른 까트린느가 준비한 알프스의 갖가지 요리들을 만끽했다. 내가 좋아하는 라끌레뜨를 실컷 먹을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나는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까트린느가 지시하는 채소밭 가꾸는 일에 전념했다. 200여 평 되어보이는 까뜨린느네 채소밭은 그림 같은 아라비산을 배경으로 집 위쪽으로 펼쳐진 비탈진 목초지 옆에 있었다. 감자, 양파, 딸기, 호박, 민트, 양상추 등을 심어 놓았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 올라오는  잡초를 뽑아내고 서너 평의 목초지를 개간하여 민트를 비롯한 몇 가지 허브를 심었다. 처음에는 농기구를 들고 비탈진 목초지를 걸어 올라가 밭에까지 가는 것만 해도 숨이 찼다. 하지만 이 그림 같은 알프스 산중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육체노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더없이 행복한 일이었다. 혼자서 밭을 일구고 있으면 어느샌가 소떼들이 몰려와 낭랑한 워낭소리로 황홀한 합주를 들려주었고, 동네의 할아버지인 니꼴은 매일같이 찾아와서 말동무를 해주었다. 나는 그가 마치 옛날 내 고향 시골 동네사람처럼 느껴졌다.

채소밭 위로 나 있는 도로 위로는 가끔씩 유치원 아이들이 줄을 서서 지나갔는데, 아이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한 사람씩 내게 인사를 건넸다. 인솔하는 선생님은 지나갈 때마다 그것을 어김없이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에르베네 밭에서 일할 때에도 지나가는 차들이 속도를 줄이고 창문을 열고 내게 인사를 건넸었다. 노동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일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사회교육이었다. 정오를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들리면 농기구를 정리하여 창고에 들여놓고 시냇가 옆으로 나 있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걸어 내려왔다. 땀 흘리는 육체노동 후에 먹는 점심 식사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오전 일이 끝나면 나는 동네를 산책하거나 주변의 산을 올랐다. 알프스 한가운데 있는 마을인지라 사방이 산이었고, 사방이 등산로였으며 사방이 그림이었다. 아라비 재(Col des Aravis)를 세 번 올랐고, Tete du Toraz(1,930m)를 두 번 올랐으며, Croisse Baulet(2,236m)를 한 번 올랐다. 눈 덮인 산에서 건너다 보이는 몽블랑 체인과 아라비 체인의 산들은 꿈속의 풍경처럼 아름다운 파노라마였다. 지금 내가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복부비만이 사라지고 근력이 길러지다 보니 내가 오를 수 있는 고도가 점점 높아졌다. 몸이 건강해지니 마음도 함께 풍요로워졌다.

                    

 Aravis 재. Tour de France가 저 길을 넘는다.
어느 날 오후의 단독 산행. Tête du Torraz(1,930m)에서 건너다본 몽블랑 체인
몽블랑 체인
La Croisse Baulet를 오르던 중 한 컷. 소피아가 찍었다.
La Croisse Baulet 정상에서 바라본  Chaine des Aravis  

나는 여기서 프랑스 시골의 사람 사는 냄새와 관용, 그리고 배려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다.

우리나라도 시골 인심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내가 본 프랑스의 시골인심 또한 이에 못지않았다. 이 낯선 이국인이 동네 담배가게를 다녀오는 길에도, 일단 마주치게 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인사와 얘기를 나눈다. 한국 사람이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나를 구경하러 찾아온 두 노파는 내게 김정은을 직접 본 적이 있는지를 물었다. 특이한 것을 좋아하는 프랑스의 남녀노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한국 인물은 북한의 김정은일 것이다. 이 시골 동네에서 만큼은 내가 두 번째로 유명한 한국인이 되었다. 보자마자 그날밤 자기 집에서 하는 Chaplet(묵주기도) 모임에 와 달라고 초청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독일에서 온 스물 한 살의 처녀 소피아와 함께 아라비 재에 있는 산에 올랐던 때이다. 아침에만 해도 그렇게 맑던 날씨가 오후들어 하산을 시작할 때부터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재에 내려왔을 때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까트린느네 집에까지는 한 시간 정도 도로를  걸어 내려가야 했다. 알프스 산악지대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늘 이렇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인 데다가 비바람까지 불어서 감기에 걸릴까 걱정스러웠다. 소피아는 불안했는지 잠바를 꺼내 입더니 비를 맞고서라도 빨리 뛰어내려가자고 말했다. 그는 육상선수였다. 나는 그녀를 제지했다. 내가 집에 갈 교통수단을 5분 안에 만들어 낼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근거도 없는 장담을 했다. 다행히도, 내가 왼손으로 엄지를 치켜든 채 도로 옆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를  5분이 되지 않아 지나가던 차가 우리 앞에서 멈췄다. 나를 허풍쟁이가 되지 않도록 해준 사람은 점잖은 육칠십 대의 아주머니였다. 이른바 오토스톱(Auto-stop, hitch hiking)이란 것이다. 소피아는 이런 방법도 있었느냐는 듯 어리둥절해 하면서 싱글벙글했다. 집에 돌아와서 소피아에게 물었다. 독일에서 히치하이킹을 해본 적이 없느냐고. 그녀는 처음이라고 했다. 독일에서는 그런 것이 쉽지 않다고 했다. 아마 프랑크푸르트라는 대도시에 살아서 그럴 것이다. 옆에서 얘기를 듣던 카트린느가 웃으며, 언젠가 자기 집에 왔던 일본인 우퍼는 오로지 히치하이킹만으로 프랑스를 여행하더라고 말했다.


나는 프랑스에서 Auto-stop를 자주 했는데,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테제에 있던 동안 클뤼니를 다녀올 때이다. 비가 떨어지는데 두 시간마다 있는 버스를 기다리기가 싫어서 도로 옆에 엄지를 쳐들고 서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빈 차로 지나가면서도 차들이 나를 태워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 프랑스도 인심이 변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15분정도 지났을까, 이윽고 어떤 아주머니가 차를 멈췄다. 내가 차에 오르며 테제에 간다고 말했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이유는 내가 서있는 위치로부터 500m 앞에 로터리가 있어서,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모를 것이기 때문에 거기 서 있으면 차들이 잘 태워주지 않을 거라는 얘기였다. 그 천사는 친절하게도 로터리를 지나 테제방향으로 접어든 후에 나를 내려주었다. 이제 여기를 지나는 차들은 다 테제 방향으로 갈 테니 차를 잡기가 쉬울 것이라고 말하고 차를 돌려 되돌아갔다.

까트린느의 집을 떠나기 전 날, 나는 카트린느의 막내아들 프랑수아에게 알베르빌까지 가는 교통편을 물었다. 버스도 다니지 않은 시골 마을이었기 때문에 난감했다. 프랑수아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히치하이킹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녀석은 클뤼니에 있는 공과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가끔 휴일에 집에 왔다. 클뤼니에 오갈 때 기차를 타려면 알베르빌을 거쳐야 할 텐데, 너는 거기까지 어떻게 가느냐고 재차 물었다. 프랑수아의 대답은 또다시 엄지 손가락이었다. 그는 항상 히치하이킹으로 오간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프랑스의 시골에서는 히치하이킹이란 것이 불가피한 상황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교통수단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마침 카트린느가 알베르빌에 갈 일이 있어서 나를 알베르빌까지 배웅해 주기로 했는데 그녀는 동네 어귀를 지나면서 길 옆에 서 있는 동네 노인 두 사람을 태웠다. 그리고는 알베르빌로 가는 도중에 있는 플뤼메의 병원 앞에 그들을 내려주었다. 나는 노인들을 부축해서 병원 안에까지 모셔다 드리고 다시 차에 올랐다. 그 노인들은 다시 히치하이킹을 해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옆에 서 있으면 누군가가 태워 줄 테니까. 

상드린느는 나랑 Pont d'Arc에 다녀오면서 두 번이나 길가던 사람들을 태웠었다. 얼마나 흐뭇한 세상인가.

이것이 프랑스의 Auto-stop이다! 빈 차로 가면서 길 옆에서 태워 달라는 사람을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너무 인색한 것 아닌가. 그 정도는 타인을 위해 배려하며 살아도 되지 않겠는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양심, 이것이 진정한 매너인 것이다! 프랑스라고 해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교통수단이 여의치 않은 시골에서만은 그렇다. 그가 노인이건 외국인이건 간에.


얼마 전에 강원도를 다녀오는 길에, 6번 국도를 지나가다가 짐을 들고서 길 옆을 걸어가는 어떤 아주머니를 발견했다. 차를 멈춘 다음 창문을 열고 태워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나를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대꾸조차 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갔다. 나는 집에 와서 거울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혹시 얼굴 인상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지.


앙드레에게는 91세의 어머니가 있다. 3년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부터 어머니는 혼자 지내게 되었다. 어머니는 같은 마을에 살고 있어서 자주 아들 앙드레의 집에 들러 먹을 것을 얻어가곤 했다. 앙드레와 까뜨린느는 효자 효부다.

얼마 전 어머니가 코로나에 걸렸을 때, 며느리인 까트린느는 환자에게 접근하면 안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3주간 동안 매일 시어머니를 직접 찾아 돌보면서 코로나를 함께 이겨냈다. 까뜨린느는 전직 간호사였고 코로나에 대한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이 죽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격리됨으로써 제대로 돌보지 않아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몇 가지의 기본적인 측정자료에 기초해서 돌보기만 해도 코로나를 이겨낼 수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산소 수치가 낮아지면 산소를 공급해 주면 되는데 돌보지 않고 격리시킴으로써 산소부족이 다른 장기의 손상을 유발해서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산소통을 직접 사 왔다. 또한 사망자의 10%는 격리로 인한 좌절감 때문이라고 정부 정책을 비난하며 열변을 토했다. 전문가가 아닌 나는 그녀의 말이 맞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는 프랑스 여성의 결기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죽는 순간까지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하는 것이 자기의 도리라는 것이었다.


앙드레의 어머니는 집에 들를 때마다 나를 정중하게 대해 주었고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내가 스무 살 때 결혼을 했으니까 70년 전 일이구만. 그때는 식구들이 아주 많았어요. 식사 때마다 11명이 앉아서 먹었지. 그래도 아버님이 빵가게를 하고 있어서 우린 배고프게 살진 않았어. 동네사람들 모두가 그땐 지금보다 훨씬 어렵게 살았지.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내가 이 빵가게를 물려받아서 40년을 먹고살았어.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하도 까다로워서 빵가게를 하는 것도 쉽지가 않아. 어제는 파리에서 온 어떤 젊은 여자가 산딸기 타르트를 주문해서 앙드레가 만들어 줬는데, 아 글쎄 빵이 좀 딱딱하다며 반품을 했다지 뭐야. 요즘 젊은 사람들 비위 맞추며 장사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야!”


“옛날에는 지금보다 눈이 더 많이 왔겠네요?”

“많이 왔고 말고! 한 해 언제는 눈이 7일 동안 쉬지 않고 내렸어. 아이들 키만큼 쌓였는데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학교에 갔는지 알아? 글쎄 우리 아부지가 말 두 마리를 끌고 와서 커다란 통나무를 매일 학교까지 끌게 했어. 그 통나무가 지나간 길로 나막신을 신고 겨우 학교에 갈 수 있었지.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거의 눈이 안 오는 거나 다름없어.  아이고, 내가 오늘 말을 너무 많이 했네.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프랑스의 할머니라고 해서 우리네 여느 할머니의 얘기와 별 다를 바 없다. 삶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앙드레의 어머니는 떠나기 전날 저녁 무렵에도 나를 찾아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깔끔한 옷매무새였다. 주름진 얼굴에 거동이 느렸지만 기품을 잃지 않은 인자한 모습이었다.

“아들한테 들었는데 당신이 내일 떠난다고?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어서 왔어. 그동안 내 얘기 많이 들어줘서 고마워.” 그녀는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은 채 나를 쳐다보며 아직도 할 얘기들이 많이 남았는데 아쉽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서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좋은 여행하길 바래요.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녀의 작별 인사말은 말끝이 흐렸다. 혼자 사는 집을 향해 언덕길을 걸어 올라 길 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녀는 가끔씩 돌아서서 내게 손을 흔들었다.


몽블랑 체인과 아라비 체인의 파노라마. Tete du Torraz에서 360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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