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관한 세 개의 말들
밤은 관능인가 안식인가 아니면 낭만인가.
내가 앉은 비스트로에선 절은 기름 냄새가 났다. 바닥에 눌어붙어 있던 홉이 밤기운에 취해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런 냄새가 났다. 선배들과 몰려가 밤새 연극 이야기를 했던 오래된 호프집과 비슷한 공기였고, 그래서 편안했다. 실내엔 한두 일질 전에 유행했던 가벼운 록 음악이 흘렀다. 바와 테이블에 앉은 손님 대부분이 오십 대는 됐을 법했고, 그나마 젊은 남녀가 둘 정도 있었지만 슬롯머신 비슷한 비디오 로터리 앞에 앉아 번쩍이는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장을 진하게 한 홀 매니저는 꼬투리 땅콩을 가득 채운 컵과 빈 컵 하나씩을 가져다주었다. 누구도 투박한 땅콩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누구나 땅콩을 까먹는 데 열중이었다. 테이블 위에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모래시계처럼 두 컵의 수위가 역전됐다. 꼬투리 채 소금물에 삶은 듯 짭짤했던 땅콩은 한 번 열면 멈출 수 없다는 감자 칩보다 매력적이었다.
내 자리에서 칸막이 사이로 보이는 바에는 천천히 황혼으로 걸어가고 있는 연인이 부드러운 스킨십을 나누고 있었다. 젊음의 열정은 식었을지언정 관능만큼은 긴 세월에 지지 않았다. 변함없는 맥박과 뭉툭한 압력으로 서로를 누르고 있었다. 그중 한 노인이 내가 사랑하는 작가와 닮아 보여서 절로 그의 작품이 떠올랐다. 나이가 든 토마시와 테레자가 호텔 지하의 바에서 춤을 추던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들의 춤은 이곳에도 어울릴 것 같았다. 밤이 더 깊어지면 여기 앉은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두 주인공처럼 스테이지 위에 오를지 몰랐다. 손은 절로 제일 익숙한 부위를 덮고 스텝은 자연스레 서로를 끌어당길 것이다. 수백 번의 리허설을 마친 관능의 춤을 출 것이다.
거리에 어느 여자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불어였고, 영화 나래이션 같은 말투였다. 십수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관객의 발밑에는 그곳을 조준하지 않은 조명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거리 공연이었다. 배우들이 건물 외벽에 세운 비계를 오르내리며 뭔가를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우리도 구경꾼 속으로 합류했으나 밤공기가 몹시 차다는 점만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전부인 구시가지에서 공연팀이 설치한 조명은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가 지금 배우의 마임을 보고 있는 건가?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공연의 주제가 빛이며, 배우들은 조명 앞을 지나다니며 이런저런 그림자를 만드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몸짓으로 탐구하고자 했던 것은 철근이 빛에 물드는 방식, 오래된 벽돌에 빛이 스며드는 절차, 렌즈 안에서 굴절된 빛이 사진에 고스트를 만드는 공정이었다.
몬트리올에서든 퀘벡 시티에서든 나는 밤보다 낮을 더 좋아했다. 빛이 나뭇잎을 통과하며 만들어내는 색채에는 야경을 퍽 좋아하는 나로서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던가. 빛은 아우성을 치고, 어둠은 의기양양하게 지배하며, 그림자는 약삭빠르게 강자의 품 안에 숨는다. 태양은 공정하지만 사람이 만든 빛은 그렇지 않다. 현실과 다른 모습을 덧씌우고 각도와 거리에 따라 예상을 넘어선 조정을 가한다. 거리에서 펼쳐지는 몽환적인 공연처럼 저가 보고 싶고 저가 볼 수 있는 것만 보게 한다. 밤은 불완전함이 득세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는 밤이 되면 서로를 더 가까이 보려고 애를 쓴다. 익숙한 결점과 장점이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면이 드러나는 과정에 중독된다. 낭만적이지 않은가, 밤에 미혹되는 일은. 그래서 우리는 밤을 아름답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리자 관광지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누군가의 거실 창문으로 피로에 눅눅해진 밤을 다독이는 편안한 빛이 새어 나왔다. 아직 십여 분을 더 걸어야 했지만 집에 온 듯 마음이 놓였다. 생판 모르는 동네인데도 고향 같은 면이 있었다. 숙소로의 귀환이 아닌 집으로 가는 길, 엄연한 귀갓길이었다.
낮에도 올랐던 어느 성직자의 이름을 딴 긴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우리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낮보다 턱없이 적은 면적만 보였지만, 그 속에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는 훨씬 많았다. 불빛은 어떤 메시지를 담은 신호처럼 흔들렸다. 이미 잠든 사람들의 꿈, 아직 잠들지 않은 사람들의 대화, 결국 잠들지 못할 사람들의 나지막한 한숨. 따뜻한 이불이 떠올랐다. 불을 끄고 이불을 덮을 때 느껴지는 공기의 저항과 솜의 무게와 발끝을 스치는 천의 실루엣이 실은 어둠을 덮는 느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포근한 중력이었다. 그러니 밤은 또한 안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