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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Jan 05. 2017

어느 오래된 호텔의 밤

스위스 그린델발트에서

 모녀는 질색한 얼굴이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것도 너무 무서워요. 잠이 오지 않을 거 같아요.” 직원은 미안하긴 하지만 선택의 여지를 줄 생각은 없는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방을 바꿔드려야 할 거 같아요”


 나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답했다. 출장 중이었고, 어쨌든 모녀는 건너 건너 나의 고객이기도 했다. 싱글 침대 하나 겨우 들어가는 내 방에 두 사람이 잘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모녀는 상관없다고, 정말 고마울 따름이라고 진심으로 말했다. 지금 심정으로는 서로 꼭 껴안고 잘 수 있는 좁은 침대가 더 낫다는 말을 굳이 귀로 듣지 않아도 이미 들은 기분이었다.



 사실 나로서도 좋은 제안이었다. 모녀의 방은 호텔의 맨 꼭대기 층 가장 큰 방, 그것도 복층 구조의 방이었다. 호텔은 지어진 지 한 세기는 족히 지났을 법한 곳이었다. 가방을 끌고 털털거리는 4인용 승강기에 올라 5층에 내렸다. 복도 끝으로 향하며 횡재라는 생각도 감감, 나는 모녀가 왜 그렇게 두려워했는지 금세 알게 되었다. 아마 예전엔 저택이었을 이 호텔의 옛 주인들이 복도 벽에 얼굴을 들이밀고, 반드시 그러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캄캄한 어둠, 잿빛으로 빛나는 초상화, 그리고 바닥의 널빤지가 아주 조금씩 쪼개지는 소리. 방문을 열어도 상황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침실은 다락방 같은 복층 위에 있었고, 욕실은 아래층에 있었다. 텅 빈 침실엔 납작한 침대와 고풍스러운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계단 중간에 서서 난간 사이로 침실을 보고 있으면, 솔직한 심정으로 다시 내려갔다 올라왔을 때, 이곳에 지금껏 보지 못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액운을 쫓는 기분으로 부러 가방을 의자 옆에 놓아두었다. 물질세계의 산물인 그 검은색 24인치 캐리어가 내 유일한 아군처럼 느껴졌다.


 아래층에서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다가 이유도 없이 깜짝 놀랐다. 이유를 모르니까 그렇게 밖엔 쓸 문장이 없다. 욕실 전등이 밝혀준 거울을 보다가 그랬다는 것만 기억한다. 채광을 위해 지붕 결을 따라 비스듬히 낸 창문 너머로는 별도 보이지 않았다. 인터라켄 전역을 덮고 있던 안개가 밤새 물러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다시 계단을 올라왔을 때 예상과 달리 내 가방만 덩그러니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데 안심한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잠들 수 있었다. 아래층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열어두거나 한두 번 방 한쪽 구석에 세워진 의자와 새카만 계단참을 흘끗거리긴 했지만, 속삭임이나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 따위가 주인도 없이 들려오는 일은 결코 없었다.



 아침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 다들 전망대에 오르는 열차를 타러 일찌감치 호텔을 빠져나갔기 때문에 사람들과 밤새 안녕하셨냐는 인사치레를 할 필요도 없었다. 호텔은 조용했다. 식사 시간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천장에 달린 창문으로 별이 보이지 않았던 건 서리가 낀 것처럼 불투명한 유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햇빛은 그런 뿌연 표면쯤 전혀 무방하다는 듯 방 안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밤새 누가 날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나, 혼자는커녕 둘도 마뜩잖을 복층 방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가운을 입고 히터 기운을 받으며 종일 나가지 않고 책이나 읽으면 좋을,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운동을 하고 그러다가 종종 창밖으로 ‘알프스 산맥’이라든가 ‘샬레’라든가 여행안내서에 큰 글씨로 인쇄되곤 하는 문구를 맨눈으로 직접 보면서 기분 전환도 할 수 있을, 그런 곳이었다. 그렇다, 지금은. 해가 뜬, 하루의 반대편에는. 아마 나에게 이 방을 넘겨준 모녀도 악몽 같은 밤만 버티고 났다면 퍽 감탄하며 이 방의 모습과 이 방에서 보이는 풍경에 두세 겹의 밑줄을 그었을 게 분명했다.





 갑자기, 문득, 그 반전 같았던 스위스에서의 아침이 떠오른 건 글에 관한 생각을 하던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날 아침에 관해 쓰다 보면 내가 오늘 아침에 무슨 결론 같은 거라도 내리지 않았나 되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까지 행방은 묘연하지만. 그 방에서 몸집 큰 묘지기 같았던 장식장은 환한 곳에서 다시 보니 책상도 겸하는 기특한 가구일 뿐이었다. 누군가 열심히 내 흉내를 내는 것 같았던 욕실 거울도 환한 곳에서 다시 보니 호텔의 고급스러운 취향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 사이로 몇 개의 시선을 느꼈던 계단 난간도 환한 곳에서 다시 보면 나침반을 닮은 멋들어진 나무 조각품일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 최근에 극본 하나를 쓰며 지나왔던 그 어두컴컴하고 비명 새어 나오는 시절이 끝나고, 잠깐의 유예일 뿐이지만 마음 홀가분한 날이 돌아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느새 다시 그 터널로 들어가고 있는 기분이라 그럴까. 뭐가 될지 모를 다음 작품을 위한 분위기 훈련 차, 무시무시했던 복도와 방을 묘사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실 진짜 쓰고 싶었던 건 그날 아침 방을 나와 했던 짧은 산책은 아니었을까. 그 호텔은 여전히, 쉽게 감동 받는 사람들의 감탄과 심장 약한 사람들의 불만을 번갈아 얻어맞으며 낮과 밤을 반복하고 있을 텐데, 아, 그것으로 뭔가를 비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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