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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Feb 14. 2017

오키나와, 기억

유통기한이 지난 필름 사진들은 필시 기억을 닮았다.

 서랍을 열어 필름을 꺼냈다. 유통기한이 십 년이나 지나 있었다. 아내가 쓰던 방, 서랍 안에 들어 있던 필름이었다. 필름 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이에선 그런 말이 있다. 유통기한이 지난 필름에선 의외의 결과물이 나오곤 한다고. 그건 출시된 지 십 년이 넘은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달리 매력적이라고. 구식 디지털카메라가 구식 기술의 한계를 증명할 때, 유통기한이 지난 필름은 기억의 한계를 암시한다. 뭉개진 윤곽, 빛바랜 색깔,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화상. 이런 사진들은 필시 기억을 닮았다. 우리는 실제를 왜곡하여 머릿속에 저장하곤 하니까.

 아내와 함께 오키나와에 갔을 당시 운전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 넓은 섬에서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나하 시내를 벗어나 섬 북부의 수족관이나 코끼리를 닮은 절벽을 볼 수 있는 만자모라도 갈라치면 고속버스를 타야만 했다. 정확하기로 명망 높은 일본 기차와는 다르게 확정된 시간표도 없고 배차 간격도 짧지 않은 교통수단이었다. 그나마 자주 오는 일반 버스를 타고 갈 만한 곳은 끽해야 섬 중부의 차탄 지역 정도였다. 오키나와까지 가서 제대로 된 바다를 보지 못한다는 건 퍽 아쉬운 일이었다. 제방을 따라 걸으며 해변도 없는 바다를 보기는 했는데, 그것도 마침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우리는 같은 길을 몇 번이고 다시 걸음으로써 더 멀리 가지 못하는 한을 풀었다. 그렇게 하면 더 많이 기억하진 못해도 더 생생하게 기억할 순 있을 줄 알았다.


 나하 시내의 국제거리를 떠올리면 야자수의 굵은 가지 위로 나부끼는 깃발이 보이곤 한다. 실제로 깃발은 없었다. 단지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 잎이 거리의 조명에 물들어 그렇게 기억됐을 뿐이다. 아직 3월 초였기 때문에 해가 지면 사람들은 가을에 어울릴 만한 옷을 걸치고 거리로 나왔다. 그 길고 얇은 외투가 야자수와 퍽 대조적이었음도 기억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바로 그 때문에 국제거리는 항시 축제 중인 것처럼 들떠 보였다. 식당은 철판에 고기를 구워 먹으라고 유혹하는 반짝이는 입간판을 앞세웠고, 기념품 가게의 유전자를 더 많이 물려받은 키덜트 숍은 거의 실물 크기의 다스베이더와 스톰트루퍼 모형을 척후병으로 삼았다. 거리의 나머지는 자색고구마와 오키나와 전설 속 동물인 시사シ-サ-가 채우고 있던 것 같다. 둘 다 아주 다양한 버전으로 팔리고 있었는데, 시사 인형이나 열쇠고리만큼은 몇 번이고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피겨figure든 인형이든 이차원의 캐릭터를 삼차원으로 실체화하는 데 발군인 일본에서 만들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느 것 하나 귀여운 놈이 없었다. 시사 자석 하나만 사 왔더라도 오키나와를 다녀왔다는 확실한 증거를 남겼을 텐데. 지금 우리 집 냉장고에 붙어 있는 건 그 섬에서 가져온 카페 명함이나 엽서 형태의 팸플릿이 전부다. 필름으로 찍은 사진 몇 장을 포함해서.


 유통기한이 십 년이나 지난 필름으로 오키나와를 찍자 그곳은 십 년 전,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시절로 돌아가 버렸다. 십 년, 이십 년, 또는 삼십 년 전으로. 내가 오키나와라는 섬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던 시절로. 필름으로 찍은 사진은 그저 크기만 줄여주면 그만이었다. 더는 손댈 곳이 없었다. 아니, 황토색 페이드가 껴서 손을 댈 수도 없었다. 처음 오키나와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하늘은 파랗고 또 파랬는데, 사진 속에선 어쩐지 곧 눈이 내릴 것만 같았다. 사박 오일을 오키나와에 있었고,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쨍한 사진도 수백 장은 남았다. 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 시간이 뿌옇게 그려진다는 점에선 오히려 필름 사진이 더 사실적이었다. 사람이 뭔가를 기억하는 방식은 정말 유통기한이 지난 필름의 결과물과 비슷한지 모른다. 적당히 가리고, 어떤 건 유난히 도드라지게 만들면서 끝내 지울 수 없는 최소한을 남기는 과정이 그렇다.


 지금도 그 사진들을 보면 우리가 아주 오래전에 오키나와를 다녀왔다는 착각이 들고는 한다. 필름은 십 년 동안 아내의 책상 안에서 감광 유제를 조금씩 덜어내 왔고, 우리는 그 시간만큼 그곳을 기억 속에 현상해 왔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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