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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May 18. 2017

신혼여행은 누구에게나 달콤하게

우리는 오키나와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신혼여행은 남국으로 가는 루트가 정석인 모양이었다. 나는 남국이라는 말이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사시사철 기온이 30도를 웃돌고 바쁘게 돌아다녀야 할 정도로 볼거리가 많지는 않으며 석양이 아주 길게 지는 곳이 아닐까 싶을 뿐이다. 아, 무엇보다 바다, 바다가 보이는 곳.


 그런 곳을 신혼여행지로 선택하는 일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수개월의 결혼 준비부터 그 절정인 결혼식까지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알리는 세리모니를 진행하는 덴 적잖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객이 떠나고 마지막으로 양가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공항으로 떠나는 두 사람에게는 필시 숟가락 들 힘조차 남아있지 않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신혼여행은 쉬는 게 최고야. 터질 듯한 햇볕 아래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이 삶에 최선을 다하는 셈인 곳. 어디선가 들려오는 라이브 음악이 티셔츠와 반바지 속을 휘젓고 다니는 통에 내 몸 안에서 소리가 난다고 믿어지는 곳. 바람이 멈출 때마다 살갗 위로 솟는 땀, 얇은 옷과 수영복에서 피어오르는 성적 긴장감 등이 이제 막 부부가 된 두 사람에게 약이 되는 바로 그런 곳.



 하지만 우리 부부가 가려던 곳은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였다. 독일 뮌헨으로 들어가 차를 타고 오스트리아까지 가서 산간 마을에 묵는다는 단순 자명한 계획이었다. 당시 결혼 예정일이 9월 중순이었으니 얼마나 두꺼운 옷을 가져가야 하나 고민하면 고민했지 절대로 남국의 분위기와 가까운 동네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아내가 임신을 했고, 결혼 날짜가 당겨졌다. 신혼여행도 바로 떠날 수 없었다. 이제 막 착상을 끝내고 한숨 돌리고 있을 아기가 이착륙의 중력 변화에 놀라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결혼식을 올리고 이 개월 후에 신혼여행을 가기로 했다. 어쩌다 보니 신혼여행은 태교여행이 되었다. 검색창에 태교여행을 넣자마자 따라붙는 여행지는 ‘괌’이었다. 그러니까 괌은 죽어도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생떼를 부리는 데도 한계는 있었다. 남국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서울보다 남쪽에 있는 도시나 섬들로, 그것도 비행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곳으로 범위를 좁힐 수밖에 없었다.


 다낭이 좋겠어, 다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마침 동남아시아 지역에 태아의 소두증을 유발한다는 지카 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이 청정 지역의 지위를 유지할 것이냐 말 것이냐 매일 뉴스 페이지를 업데이트하다가 결국 그곳에 가기를 포기했다. 이성적으로는 별일 없으리라 믿었지만, 부모 좋자고 1%의 위험을 감수하는 일은 아이에게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더 컸다.





 신혼여행과 태교여행 사이에는, 예컨대 자유여행과 단체여행만큼의 차이가 있다. 신혼여행은 두 당사자에게 있어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여행이다. 태교여행은 시간과 돈이 허락하는 한 특정한 임신 주기 동안 몇 번이고 가도 무방한데 말이다. 게다가 신혼여행은 가능한 길게, 가능한 화려하게가 모토이며, 심지어 여행지 자체보다 두 사람이 얼마나 딱지처럼 붙어서 두고두고 기억할 시간을 보냈느냐가 중요한, 꽤 특수한 성질의 여행이다. 신혼여행은 불순물을 허락하지 않는다. 불완전함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런 고상한 지위에 ‘신행 겸 태교여행’이라는 라벨이 붙어버렸으니 이것을 신혼여행이라 불러도 될 것인가, 자신이 없었다.



 처음에 아내는 오키나와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곳의 분위기 있는 카페와 식당 사진을 보고는 마음을 돌렸다. 차도 빌릴 수 없었다. 내가 운전을 못할 때였고, 임신한 아내가 차선이 반대인 섬에서 새로운 운전 경력을 쌓을 수도 없었다. 버스, 모노레일, 택시에 의지하거나 마냥 걸어 다녀야 할 여행이었다. 남부의 해변을 보러 갈 수도 없었고, 북부의 멋진 수족관에서 고래상어를 만나볼 수도 없었다. 그 섬의 교통은 참 불편하다고 들었다. 그나마 비행시간이 짧다는 점만 위안이었다.


 일본 내 여행자가 많아 국제선 청사보다 국내선 청사가 더 큰 나하 국제공항에 내렸을 때, 남국의 상징인 야자수를 보았다. 3월 초라 그리 더운 날씨가 아니었어도 남국의 분위기가 얇게 썬 치즈처럼 덮여있었다. 천천히 녹아내리는 치즈가 냄새를 피워 올리며 저의 존재를 알리는, 그런 순간이었다. 태교여행을 겸한다는 성급함도 부족해 신혼여행을 오키나와에 데려간다는 비루함까지 겹쳐 내내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김 서린 듯한 이 섬의 냄새가 마음에 들었다. 아내의 표정도 밝아 보였다. 아내가 그녀의 이유를 찾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아직 겨울이 가시지 않은 한국에 비해 충분히 이국적으로 보이는 오키나와는 그렇게 우리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지금까지도 우리는 오키나와가 얼마나 좋았는지 떠들고는 한다. 나는 아예 한술 더 떠서 그동안 교토와 오사카에서 차를 몰아 보았으니 아이를 데리고 다시 가자고 조르기도 한다. 남부에 봐 둔 에어비앤비를 빌려 매일 바다를 보러 나가고 하루는 섬 북쪽까지 드라이브를 하자고. 우리가 갔던 카페와 식당에 다시 가 보자고. 항상 새로운 곳을 찾는 아내는 아직 우리가 가야 할 곳의 리스트가 마트 영수증처럼 남아있다며 내 제안을 거절하고는 한다. 하지만 아내 역시 오키나와에 다시 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오키나와에서 섭렵한 곳이라고는 나하 시내와 섬 중부의 차탄 지역,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 미나토가와港川 밖에 없다. 4박 5일 동안 2박 3일 단체 여행에서 보는 것보다도 적게 본 셈인데, 도대체 오키나와의 무엇이 그리 좋았는지는 확실히 답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신혼여행이었기 때문인 걸까. 누구에게나 신혼여행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기 마련이니까?





 해가 지면 햇볕의 기운이 쏙 빠진 바람이 불어와 야자수 잎을 흔들었다. 이 서늘함에 질렸는지 누렇게 색이 바랜 이파리도 많이 보였다. 사람들은 적당히 들뜬, 그러니까 체면은 차릴 줄 아는 표정으로 거리를 돌아다녔다. 지나치게 친절하지 않아 더 좋았던 단골 카페의 – 그래 봤자 두 번 갔을 뿐이지만 – 주인은 가계부를 쓰기 위해 영수증을 요구한 나를 위해 전표에 손수 금액을 적어 주었다. 서점에는 유난히 꽃과 요리 서적이 많아 아내를 즐겁게 했고, 머리 위로 지나다니는 모노레일은 보도블록 한 점까지 낡아서 좋았던 이 도시에 미래의 이미지를 튀지 않게 덧칠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정류장에 조용히 들어섰다 떠나는 버스들, 인적이 드물어 누군가의 기억만 돌아다니는 것 같은 골목들, 해가 뜨는 곳에 핀 초여름의 꽃들과 해가 지는 곳에서 흔들리는 갈대들, 조각상처럼 가게 앞에 멈춘 자전거들, 채도를 잔뜩 올린 철판요리 사진이 붙은 입간판들, 땡볕 아래 커다란 배낭을 지고 땀을 흘리는 서양인들, 우리랑 다를 바 없이 밝은 얼굴로 사진을 찍는 본토 일본인들, 히피 차림으로 모여 소리 없이 재미있는 일을 꾸미는 이 섬의 젊은이들, 그리고 자주 걸음을 멈춰 눈을 마주치게 만드는 나의 사랑하는 가족, 아니, 가족들.



 걷기 좋아하는 아내는 점점 무거워지는 몸 때문에 평소 실력을 뽐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참 많이 걸어 다녔다. 출렁출렁 뱃속의 아기가 어지럽지는 않았을까. 이젠 세상 밖으로 나와서 저 혼자 걷기 직전까지 자란 아이에게 물어봐도 녀석은 “압빠”라는,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어휘만 반복할 뿐이다. 그때 엄마가 먹었던 소바의 맛을 기억하니. 어떤 이모가 즉석에서 구워준 철판요리는 어땠니. 그건 전부 환상적인 맛이었단다. 그래, 초밥 빼고 다 맛있었던 오키나와의 음식들이 그곳을 좋은 기억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지친 몸을 위탁했던 카페도 참 많았다. 도대체 무슨 뇌구조를 가졌기에 이렇게 가지고 싶은 인테리어를 꾸밀 수 있는지 궁금한 장소들이었다. 들어가자마자 한두 시간 후 다시 그곳을 나서야 한다는 결말이 아쉬워지는 곳들, 커피도 참 훌륭했던 그곳들. 그때 엄마가 한 모금 마셨던 카페인과 말차 라떼의 맛을 기억하니. 그것도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단다. 너는 잠이 확 달아나 몇 시간 씩 수영을 되풀이했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이는 다시 “압빠”라고 반복하다가 뭔가가 성에 안 차는지 온몸에 힘을 준다. 너도 그 기운을 기억한다는 이야기지. 그래, 오키나와에서 갔던 카페들이 그곳을 좋은 기억으로 치장했을지 모른다.



 사실 오키나와에 가기 전에는 그곳이 낡았다기보단 늙었으리라고 예상했었다. 일본 특유의 아기자기함도 없고, 그렇다고 휴양지 특유의 망각을 유발하는 공기도 없는 어중간한 곳으로 짐작했었다. 실제로 오키나와에서 본 문명의 흔적 대부분은 낡았다. 바닷바람에 너무 일찍 주름이 팬 사람처럼 섬의 시계가 일이십 년 전에 멈춰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늙었으리라는 예상은 착각이었다. 금이 가고 칠이 떨어지고 어딘가 기우뚱하게 기운 것 같은 구석구석에 나보다도 젊어 보이는 이들이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적도에 가까워진 만큼 시간이 느려진 이곳에서 그들은 남보다 긴 청춘을 즐기는 중이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독립 서점, 작은 공방, 로컬 카페와 동네 맛집 들을 섬 곳곳에서 운영하면서. 그래, 그런 잔잔한 활기가 이곳을 좋은 기억으로 완성했음이 분명하다.



 이것이 나와 아내가 처음으로 함께 한 여행은 아니었다. 최소한 우리가 본 이 섬의 일부는 신혼여행지로도 그리 어울리지 않았다. 태교여행이라고 하기에도 우리는 너무 무리해서 돌아다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행에서 빚을 진 나는, 모자란 남편 하나만 바라봐 준 아내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함께 느낀다. 아들에게는, 네가 두 눈으로 보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너무 일찍 가버렸다고 위로를 전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실패한 신혼여행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좋은 기억을 안고 그곳에 다시 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남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다. 휴양지도 아니고 유적지도 아니다. 그곳은 오키나와다. 우리는 오키나와로, 신혼여행답지 않아서 더 신혼여행다웠던, 그런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매거진 BRICKS Trip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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