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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Dec 28. 2017

사라져버린 시간을 찾아서

특정한 삶의 방식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나를 슬프게 했다.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 (…) 이제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들과 스완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 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권에서 프랑스 전통 과자인 마들렌을 먹은 화자는 콩브레라는 시골 마을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추억해 낸다. 권태와 우울로 짓눌린 그에게 콩브레에서의 시간은 몇몇 어둡고 슬픈 장면의 반복으로 남아있었다. 캄캄한 방안에서 어머니와 떨어져 홀로 고통스럽게 잠들던 기억이었다. 그러나 과자 한 조각의 맛이 순식간에 암흑을 걷어냈고, 심연 속에 묻혀 있던 찬란한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온 마을의 풍경이 반 바퀴만 돌리면 전혀 다른 배경으로 변하는 무대 장치처럼 단숨에 조립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깊은 바닥에 버려졌던 기억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되살아나는 데는 거창한 조건이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시적이면서도 무려 여섯 페이지에 걸쳐 기억의 환기 과정을 묘사하는 초입부를 종종 다시 읽고는 한다. 마들렌이 언급되는 이 유명한 대목이 문학만이 보여줄 수 있는 손놀림으로 기억의 원리를 파헤치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작중 화자처럼 사소한 단서 - 색, 형태, 냄새, 소리, 감촉과 빛 - 하나에 훌쩍 과거로 넘어갈 때가 있고, 더러는 그 여정의 신비로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기도 한다. 추억이 빗질을 하고 지나간 자리는 현재의 고통도 덜하다. 마취제를 도포한 것처럼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리고 루앙프라방에 도착한 첫날, 비가 오면 나무문 틈 사이로 빗물이 흘러들던 식민지 시대의 건물 안에서 나 또한 그런 행운의 주인공이 되어있었다.



 프랑스 과자에 비하면 촌스러운 소재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마들렌 대신 메추리알을 입안에 넣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메콩강을 떠다녔던 나와 D는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소설의 화자가 마들렌을 먹기 전까지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던 것처럼 나 역시 메추리알을 입에 넣기 전까지 우울한 상태였다. 무기력함, 당혹스러움, 긴 뱃길을 따라오며 호기심이나 열정 따위를 조금씩 잃어버렸다는 분노가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하지만 메추리알을 한 알 입에 넣을 때마다 기분이 나아지고, 옛 생각들이 부드럽게 떠오르며, 내일 아침만 되면 모든 일이 잘 풀리리라는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매다 발견한 어느 유원지 앞에서 이 메추리알을 사 왔다. 하얀 전등을 켜 놓고 큰 솥에 메추리알을 삶던 노점상 아주머니는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 두 명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우리가 라오스 사람들도 메추리알을 삶아 먹는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여겼듯이 노점상 아주머니도 이국의 여행자들이 메추리알을 먹겠다고 나서는 상황이 신선했을지 모른다. 인심 좋게 담긴 메추리알 한 봉지를 받아들던 우리의 눈빛은 유원지의 조명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이름이 같아도 다른 맛이 나곤 하던 라오스의 여타 음식과 달리 메추리알의 맛은 내가 알던 그대로였다(어떻게 삶은 메추리알 맛이 다를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화자에게는 마들렌이 그러했듯 나에게는 메추리알이 어릴 적 즐겨 먹던 간식이었다. 나는 이 맛이 무척 반가웠다.


 무엇보다 이 비닐봉지 안에는 위로가 들어있었다. 한 알에는 방과 후 뛰어다니던 낡은 골목이 들어있고, 다른 한 알에는 바퀴가 크고 항상 녹슬어 있던 자전거가 들어있고, 또 다른 한 알에는 아이들을 몰고 다니던 ‘방귀차’와 온 동네에 울리던 확성기 소리가 나란히 들어있었다. 라오스 국경을 넘어온 지 이제 갓 사흘이 지났을 뿐이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조금 더 촌스럽고 조금 더 한적했던 나의 유년시절을 추억하게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메추리알을 먹기 또 하루 전, 그러니까 루앙프라방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우리는 빡벵이라는 작은 마을에 있었다. 우리가 탔던 슬로 보트의 동력으로는 훼이싸이에서 루앙프라방까지 단번에 내려올 수 없기 때문에 중간에 있는 빡벵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다리 길이를 시험하며 선착장에 내리면 가파른 언덕이 올려다보였고, 그 너머로는 온통 산이고 숲이었다. 뭍으로 올라온 여행자들은 피난민이나 다를 바 없는 행색이었으나 다들 웃는 얼굴이었다. 다음 날 한 번 더 배를 타고 루앙프라방까지 가야 한다는 숙명은 잊은 채 당장 배에서 벗어났음을 기뻐했기 때문이었다.


 마을 초입에는 어딘지도 모를 숙소의 사진을 들고 호객을 하는 젊은이들이 어슬렁거렸다. 곧장 흥정을 마친 이들이 털털거리는 픽업트럭에 실려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호객꾼들을 믿지 못하는 나머지는 잘 곳을 직접 찾기 위해 줄줄이 언덕을 올랐다. 힘에 부치진 않았다. 산에서부터 부드럽게 밀려드는 맑고 촉촉한 공기 덕분이었다. 배를 타고 오다가 정체 모를 부두에 내린 라오스인들 또한 이와 비슷한 마을로 향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비탈길 양옆 식당들은 거리에 숯불 통을 내어놓고 닭고기나 돼지고기를 굽고 있었다. 연기가 제사상을 찾은 영혼처럼 길 위를 떠돌아다녔다. 사이사이 매점, 빵집, 잡화점도 있었다. 진열대 위 술병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고, 냉장 기능이 없는 쇼케이스 안에는 사람 얼굴만 한 크루아상이 이름표를 달고 누워 있었다. 전파사 안에는 고무 버튼이 달린 플라스틱 손전등, 안테나로 등도 긁을 수 있을 모노 라디오, 배가 볼록한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 세대에 걸쳐 팔고도 남은 재고는 다음 세대까지 든든하게 그 자리를 지킬 것 같았다.


 나와 D는 여행자로 그득한 식당 대신 동네 젊은이들이 당구를 치고 주인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곳을 택했다. 마을 사람들의 오붓한 저녁 식사 자리에 슬쩍 끼어들고 싶었다. 식당 앞에서 굽고 있는 고기는 손님을 위한 게 아니었다. 주인은 우리가 자리를 잡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메뉴판을 가져다주더니 지금은 되는 요리가 하나도 없고 숯불에 오리를 굽고 있는데 그거나 한 접시 먹겠느냐고 물었다. 뭐라도 팔고 얼른 술자리로 돌아갈 생각밖에 없어 보였다.



 성마른 그의 손에 들려 오리고기가 등장했다. 몇 조각 되지도 않는데다가 생전에 다이어트를 열심히 한 녀석인지 살점도 별로 없었다. 심지어 부리(로 보이는 길쭉한 부위)도 있었다. 접시를 비워도 애피타이저 한 접시를 나눠 먹은 듯 속이 허했다.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실은 왁자지껄한 식당 안을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렸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어느 중년 여인의 미소는 소녀처럼 화사했고, 그의 모든 세상이 당구대 위에 펼쳐진 청년은 십 년 전의 얼굴과 십 년 후의 얼굴을 동시에 품고 살고 있었다. 아무도 우리 존재를 의식하지 않아 더 좋았다. 식당 안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우리를 위한 게 아니었으나 우리는 귀를 쫑긋하며 그 뜨끈한 정을 한 국자 나누어 마셨다. 우리에게 줄 오리고기는 부족했을지 몰라도 그 감정만큼은 차고 넘쳤다.



 다음 날, 배를 타기 위해 새벽 일찍 눈을 떴다. 이 층에 있는 방을 나서 회랑 난간에 기대자 고개 너머 우듬지도, 흙 무지의 강기슭과 안개에 쌓인 메콩강도 한눈에 들어왔다. 심정적으로는 밀림 한복판에 있는 기분인데 바로 밑 언덕길에선 부릉거리는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세속의 소음에 깜짝 놀라 내려다보니 교복을 입은 두 학생이 스쿠터를 타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좀 더 얌전하게 자전거로 통학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유독 눈에 띄는 그들을 커브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한참 지켜보았다. 라오스는 스쿠터를 몰 수 있는 연령 제한이 아주 낮거나 아예 규제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집과 학교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지도 상상해 보았다. 십 리 밖으로 걸어서 통학했다는 아버지, 또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이야기가 이곳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굽이치는 강줄기는 이들의 터전을 외부로부터 얼마간 떨어트려 놓았다. 실제로 이 마을을 제외하면 눈앞에 펼쳐진 자연 그 어디에도 인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자생력을 갖춘 외딴 섬이나 다름없었고, 어쩐지 이곳을 이상향이라 불러야 할 것만 같았다.





 반면 루앙프라방에 도착하고 나서부터는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종일 배를 타다가 내리자마자 도심으로 들어가는 송태우를 타려면 한 사람 당 이만 낍을 내야 한다는 낭보를 전해 들었다. 당시 우리에게 남은 돈은 사만 낍이 채 되지 않았다. 도저히 걸어갈 힘은 없었기에 결국 찻값 일부를 달러로 계산하기로 했다. 턱없이 낮은 환율이라 거의 잔돈이 생기지 않을 만큼만 지불했다. 문을 연 환전소를 찾지 못하면 밥을 먹을(술을 마실) 돈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를 불안하게 했던 건 송태우를 타고 가면서 본 루앙프라방의 거리 풍경이었다. 길바닥에 깔린 카레 분말 같은 누런 흙더미, 그래서 차가 지나갈 때마다 뿌옇게 떠오르는 먼지, 나를 앞질러 간 오토바이 엔진에서 쏟아져 나온 굉음, 철물점마다 내놓고 파는 위성 접시가 상징하는 욕망, 이방인이 느끼는 기분 좋은 거리감을 넘어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서글퍼질 만큼 무심한 저녁 일상의 단편들. 우기를 앞두고 있어서 그럴까, 도시 전체가 바싹 말라 보였다. 나는 빡벵에서 느꼈던 정감을 앞으로 두 번 다시 누릴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우울해졌다.



 물론 라오스의 도시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빡벵과 루앙프라방을 비교할 수는 없다. 최근 이삼십 년 동안 루앙프라방을 찾는 여행자는 꾸준히 늘었다. 외부의 자극은 멈춰있던 시계의 태엽을 감았고,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시곗바늘은 서구와의 시차를 따라잡기 위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순수한 자연, 영혼을 지탱하는 종교, 몸과 마음을 느긋하게 풀어도 좋은 일상이 여전히 이 도시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하더라도 변화는 불가피했다. 루앙프라방의 철물점에서 가장 많이 보였던 것이 위성 접시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미디어는 국경 너머에서 온 여행자보다 더 빨리 이곳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라오스 인도 아닌 내게는 가타부타할 어떤 자격도 없겠지만, 특정한 삶의 방식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나를 슬프게 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두세 시간 동안 루앙프라방의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사위가 어두워 모든 길이 비슷해 보였다. 그러다가 당도한 곳이 농사팡 유원지였다. 실은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돌고 돌아 가는 바람에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넓은 공터에 두 대의 관람차와 범퍼카, 회전목마와 궤도열차 등이 들어선 광경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시끄러운 음악의 진원지도 바로 이곳이었다. 유심히 귀를 기울이자 새된 목소리의 디제이가 사이사이 추임새도 넣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방인은 보이지 않았다. 전부 이 동네 사람들이었다. 무거운 어둠 속에서 놀이기구에 달린 네온 조명과 새하얀 형광등이 신기루처럼 빛났다. 있을 만하지 않은 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실수였다.


 그리고 마침내 노점상에서 메추리알 봉지를 받아드는 순간, 이 유원지가 어릴 적 동네에 나타나던 이동식 관람차를, 아이들이 미친 듯이 점프를 하다가 넘어져서 엉엉 울기도 하던 이동식 트램펄린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수룩한 아저씨가 묵묵히 끌고 다니던 그런 놀이기구들도 어디서부터 나타나고 어디로 사라지는지 모를 신기루 같기만 했다. 당시는 서울에 논밭이 남아있던 고릿적도 아니었고, 모두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21세기도 아니었다. 이차 산업에서 삼차 산업 중심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촌스러움과 세련됨의 중간 지대, 대학생의 과업이 학생 운동에서 스펙 쌓기로 변하기 직전의 시대였다. 어쩐지 어중간한 날들이었고, 특징이 거의 없다는 게 특징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나를 만들어 가던 시절, 사라졌기에 더 그리운 시절이기도 했다.



 이날 먹은 메추리알은 그렇게 유독 오래된 기억들과 연결돼 버렸다. 메추리알 맛이 익숙해진 시기가 꽤 오래전이라는 사실을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동식 관람차나 트램펄린을 따라다닐 때부터 이 작은 알을 먹었고, 갑자기 현재와 유년 시절 사이에 다리가 놓여버린 것이다. 어제 빡벵에서 뗐던 나의 걸음은 여기 루앙프라방의 거리까지 이어진 셈이었다. 세월의 흐름 같은 그 발자국을 따라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기억의 다리가 생겨났음을 나는 깨달았다.


 정확히 어떤 이미지가 추억을 되살렸는지는 알지 못한다. 흙먼지가 날리는 비포장도로 때문일 수도 있고, 펑퍼짐하고 무늬가 많은 현지인들의 의복 때문일 수도 있고, 둘레가 짧은 전신주나 중고 자동차 때문일 수도 있다. 대문 앞에 서서 친구의 이름을 부르면 그에게 들릴 만큼 담이 낮은 집 때문일 수도 있고, 시멘트 블록으로 대충 가려 놓은 도랑에 물이 졸졸 흐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거리에 가로등이 별로 없거나 식당 간판이 형편없이 녹슬고 조악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누군가는 최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피시를 들고 다니고, 누군가는 번쩍이는 스쿠터에 몸을 싣고, 누군가는 유행하는 헤어스타일로 변신하기 위해 모델 사진을 걸어둔 미용실로 들어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곳은 유예된 시공간이었다. 내가 빡벵에 홀리고 천천히 루앙프라방에 물들 수 있던 것은 근대와 현대의 교차점, 변화와 정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는 어중된 시기로 돌아온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와 나의 도시 역시 그 어딘가를 막 지나왔기 때문이었다. 프루스트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긴 회상을 끝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알았던 현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 어떤 이미지에 대한 추억은 어느 한 순간에 대한 그리움일 뿐이다.”


 어쩌면 라오스의 인상과 이미지들이 아직 따뜻한 메추리알에 간을 뿌리듯 그리움을 얹었고, 나는 지금 그 맛을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평생 골목길 사진을 찍었던 고故 김기찬 사진작가의 후기 작품 중엔 이젠 사라진 달동네와 급격히 성장하는 서울 중심부가 한 프레임에 들어간 사진이 많다. 나는 그 대비에서 따스하고 아련하다가 이내 서글퍼지는 무언가를 느낀다. 한 시대가 천천히 풍화하는 과정이 그 안에 붙들려 있어서다. 나에게도 주머니에 든 동전으로 떡꼬치를 먹을지 달고나를 먹을지 고민하던 시간이 있었다. 나에게도 불운한 쥐가 숨어든 쓰레기 봉지를 빙빙 돌리며 뛰어다니던 동네 형을 두려움에 떨며 쫓던 시간이 있었다. 나에게도 열린 대문 안에 뭐가 있는지 흘끗거리다 주인아주머니에게 등짝을 얻어맞고 엉엉 울던 시간이 있었다. 아마 루앙프라방의 노인들, 장년들, 청년들, 아이들 역시 머잖아 사라져 버릴 지금 이 순간을 각자의 관점에서 기억할 것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손님으로 잠시 이곳에 머물며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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