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가 받았던 배웅을 기만한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너무 오랜만에 올리는 글이라 전편의 링크를 붙여봅니다. :D
https://brunch.co.kr/@bergotte/60
루앙프라방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도착한 곳은 라오스 보케오주의 주도이자 항구도시인 훼이싸이였다. 많은 여행자들이 라오스의 주요 도시에 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이곳은 지도상으로 라오스 북서쪽 끄트머리다. 메콩 강을 사이에 두고 태국의 치앙콩과 마주 보고 있으며, 2013년에는 치앙콩과 훼이싸이 사이에 네 번째 '타이-라오스 우정의 다리'가 놓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루앙프라방으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VIP 버스(에어컨이 나오기 때문에 VIP로 불리는 모양이다) 또는 미니 밴을 타고 굽이굽이 산길을 달리거나 우리처럼 배를 타고 메콩강을 따라가거나. 확실한 건 그 어떤 루트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이후 우리도 절감하게 될 라오스의 열악한 도로 상태나 속도는 빠르지만 흉흉한 소문이 도는 스피드 보트보다는 그나마 우리가 선택한 느린 배편(슬로 보트slow boat라 불렸다)이 안전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편하기까지 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도 책 제목으로 삼았을 만큼 누구나 라오스란 나라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나 역시 머릿속에 제대로 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었다. 막연한 상상만 천방지축 아이들처럼 뛰어놀 뿐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모든 상상들이 여기 선착장에 닻을 내리고 현실의 뭍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머리를 빡빡 깎고 돌아다니는 아이들, 뙤약볕 아래 느른한 걸음으로 돌아다니는 개들, 무리를 지어 흙길을 방황하는 암탉들, 도랑 주변에 모여 어미와 호기심 사이에서 방황하는 병아리들,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작은 집들, 그 집의 마당에서 뻗어 나온 무성한 나뭇가지, 이파리, 산홋빛 꽃 들.
금이 간 황토색 땅에선 여름 기운이 끓어올랐다. 저만치 앞, 언덕 아래 흐르는 메콩강도 이 더위를 해결해 줄 의지는 없었다. 그저 어떻게 보면 누렇고 어떻게 보면 등 푸른 생선의 비늘 같은 색으로 빛나며 소리 없이 흐를 뿐이었다. 부두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먹이를 쫓는 물고기 떼처럼 정박해 있었다. 뭍과 강의 경계선에는 수없이 많은 나비가 날아다녔다. 이 풍경만으로 나라 전체를 파악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첫인상으로 삼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나는 어느새 이 땅을 조금도 알 수 없는 곳이라 정의하고 있었다.
배에 오르기 전에 신발을 벗어야 했다. 선원이라는 표현도, 승무원이라는 표현도 어색한 젊은 뱃사람이 비닐봉지를 나눠주며 거기에 신발을 넣으라 했다. 짐칸은 선체 아래에 있었고, 승객들의 가방을 넣고 넣고 또 넣다가 결국 공간이 부족해 그 위에 차곡차곡 피라미드 형태로 쌓기에 이르렀다.
집배houseboat의 일종인 슬로 보트는 선체가 아주 길었다. 좌석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대략 80명 정원이라고 하나 100여 명이 타는 일도 허다하다고 했다. (그때부터 위험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는 으시으시한 설명도 빠지지 않았다.) 삼 열 또는 사 열로 쭉 이어진 좌석은 앞뒤 간격이 절박할 정도로 좁았다. 배 가장자리를 둘러싼 외벽도 없었다. 지붕과 기둥이 햇빛과 혹시 모를 호우를 애처롭게 막아줄 뿐이었다. 처음엔 강 위를 달리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겠구나 내심 기뻐했었다. 성급한 판단이었다.
나와 D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일찍 탄 덕에 짐도 짐칸 안에 넣을 수 있었고 원하는 뒷자리에 앉을 수도 있었다. 건네받은 티켓엔 좌석 번호가 쓰여 있었지만, 그 번호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일단 좌석 자체에 번호가 붙어 있지 않았다. 누군가 일일이 손으로 숫자를 써넣은 종이가 자리마다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사람이 지나다니고 바람이 부는 통에 바닥에 굴러 떨어지고 나면, 좌석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고 누구의 것도 될 수 있었다. 누가 먼저 엉덩이를 시트에 붙이느냐만 중요했다.
때로는 먼저 자리를 차지한 사람과 반드시 제 좌석 번호에 앉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미리 정해진 자리를 고집하는 자가 즉석 재판에서 이기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숫자는 아무 의미 없어. 그냥 앉고 싶은 데 앉아. 다 그렇게 앉아 있거든.”
누구보다 빠르게 좌석 선점 시스템을 이해한 여행자들은 꽉 찬 영화관에 온 것처럼 구는 동료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 나라에선 미리 부여된 좌석 번호는 무의미하며, 이곳을 여행하려면 그런 무질서를 누구보다 열렬히 추종해야 한다는 듯이.
배가 처음보다 한 뼘 넘게 수면 아래로 가라 앉으며 승선이 끝났다. 배를 선착장에서 떼어내기 위해 갓 스무 살이나 됐나 싶은 남자가 장대로 강바닥을 밀었다. 이 많은 사람과 짐을 실은 배가 그의 힘 하나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떠나려는 배와 정박한 배가 부딪쳤다. 지붕에 달린 타이어가 쿠션 역할을 했지만, 쿵, 하고 선체가 요동칠 때마다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요란한 출항식이 이 순간부터 모든 것을 체념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노하우를 가장 빠르게 퍼트리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곧 방향이 잡히고 굉음과 함께 모터가 돌아가며 우리는 메콩강 위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멀어지는 훼이싸이의 풍경을 담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이 배를 타고 움직인다는 자체가 신기한 나머지 어떤 식으로든 이 체험을 생생하게 간직하겠다는 일념이었다. 훗날 수평도 맞지 않은 사진을 보고 당시의 감정을 되살릴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 우리에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최초의 흥분과 달리 슬로 보트를 타고 메콩강을 내려가는 여정은 느리고 끔찍했다. 일단 너무 더웠다. 차가운 바람과 뜨거운 바람이 번갈아 불어왔고, 때로는 대류가 멈춰 온실에 갇힌 듯한 비참함을 느끼기도 했다. 의자는 딱딱하고 표면이 까슬까슬했는데, 그것보다 더 괴로웠던 건 바닥에 고정이 되지 않아 누군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흔들린다는 점이었다. 뒤에 앉았더니 모터 소리도 무진장 크게 들렸다. 소리만으로 가늠하자면 우리는 지금 시속 백 킬로미터 정도로는 달리고 있어야 했다. 그나마 고물에서 마음껏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자유는 위로가 되었다.
피로와 지루함은 순식간에 배 전체로 전염되었다. 여행자들은 의자에 드러눕고, 발을 난간에 올리고, 책을 읽거나 잠을 청하고, 끊임없이 차가운 맥주를 사 마시고, 친구들과 카드 게임을 하고, 창고 같은 고물로 자리를 옮겨 라오스 뱃사람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다. 메콩강의 풍경은 기대만큼 압도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강물은 흐리멍덩하게 비슷비슷한 계곡 사이로 흘러갔다. 강가에 자리 잡은 촌락과 그곳에 거주하는 라오스 인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게 즐거움의 전부였다. 딱 한 번 산등성이에 불이 난 걸 보았다. 화전을 만들려는 것 같았다. 산불을 끄려고 날아다니는 헬리콥터는커녕 물통을 든 주민 한 명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불은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거나 숲에 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저 불길이 세상을 집어삼킬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불조차도 어딘가 맥이 빠져있었다. 한 조각씩 파괴되는 산림과 라오스 화전민들의 삶을 동시에 상상했다.
해가 기운을 잃고 시원한 바람이 좀 더 자주 불어오자 그나마 여유가 생겼다. 그즈음 나 역시 고물에 눌러앉아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이곳에선 헤비 드렁커에 헤비 스모커인 오스트리아 출신 두 남자를 주축으로 예닐곱 명의 여행자와 라오스 인들이 맥주판을 벌이고 있었다. 작은 화로에 찌고 있는 밥에선 하얀 김이 올라왔고, 아이스박스는 근사한 술상이 되었으며, 배 뒤로 긴 꼬리처럼 늘어진 포말은 우리가 멈춰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라오스인 중 자신을 ‘끽’이라 밝힌 친구가 유난히 친절했는데, 한국 사람이 반갑다며 끊임없이 내게 술과 담배를 권했다. 맥주잔은 비워지기 무섭게 채워졌고, 빈 병이 쌓여갔다. 우리는 오스트리아어, 프랑스어, 그리고 라오스어와 한국어로 “건배”를 배운 후 2초에 한 번씩 언어를 바꿔가며 건배를 했다. 나이도 많고 털이 북실북실한 남자들이 서로의 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껄껄거리다가 다정하게 사진을 찍기도 했다. 어지럽고 즐거웠다. 뱃전에 빨랫감처럼 걸쳐지는 한이 있더라도 처음부터 이렇게 마셨다면 얼마나 좋았을지를 안타까워 했다. 아마 메콩강이 천국의 강처럼 보였을 것이고, 일곱 시간은 낙원에서의 한때처럼 삽시간에 흘러가 버렸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둘째 날은 더 힘들었다. 이날은 첫날 정박지였던 빡벵에서 루앙프라방으로 내려가는 여정이었다. 아침엔 쌀쌀하더니 정오쯤엔 겉옷을 벗어야 했고, 오후 두 시에 이르러서는 더위 먹은 개처럼 헥헥거려야 했다. 바람도 전날보다 더 게을렀다. 하루 타봤으니 적응이 됐을 거라는 기대도 결국엔 무너졌다. 글을 쓰다가 곧 포기하고, 책을 읽다가 곧 포기했다. 작은 배로 바뀌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물에 모일 공간도 없었다. 오늘은 이 배를 몇 시간 동안이나 타야 할까. 여덟 시간? 아홉 시간? 확실한 건 전날보다는 길다는 사실이었고, 그게 우리를 좌절케 했다. 마음으로라도 노를 젓고 싶었다. 조금이나마 더 빨리 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기분이었다.
어찌어찌 라오스로 넘어오는 동안 좋은 인연을 맺었다. 독특하고 놀라운 것, 생경하면서도 정겨운 것들을 많이 보았다. 친구 D와 매일 가진 술자리도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슬로 보트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가며 조금씩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심 배 위에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며, 이것이 우리 여행의 변곡점이 되리라 기대했었다. 조금씩 변해가는 풍경에서 영감을 얻고, 느림에 적응하며, 두세 시간 푹 빠져 독서를 하고, 운이 좋으면 여행 이후 내 삶을 새로 지을 어떤 설계도를 그릴 수 있을지 모른다고 믿었다. 그러나 뭍 위로 아른거리는 아지랑이처럼 그 모든 희망은 헛된 춤을 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이 배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 무기력은 내가 삶이라는 항해에서도 비슷한 처지일 것이란 진실을 은연중에 속삭이고 있었다.
그때, 내게 다가온 건 멍하니 바라보던 강변에 갑자기 나타나던 크고 작은 촌락들이었다. 거기엔 그 실체를 상상할 수 없는 삶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배는 때때로 어딘가에 정박해 사람들을 싣고 내렸다. 과연 주변에 사람 사는 마을이 있을까 싶은 간이 선착장에 내려 산을 오르는 라오스 인들을 보면, 저 우듬지 너머에 어떤 식으로든 삶의 터전이 자리 잡고 있음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보따리를 지고 신발을 벗은 그들의 뒷모습에서 집에 가까워졌다는 편안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저 깊이 모를 산속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하지만 저런 곳에서야말로 더 겸허하게, 더 만족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가보지 않으면 모를 길 앞에선 그저 질문만 꼬리에 꼬리를 물 뿐이었다.
반대로 마을에서 내려와 우리가 탄 배에 오르는 이들도 있었다. 한 어머니는 손으로 강물을 떠서 배를 타려는 아이들의 머리를 씻겨주며 안전을 기원하기도 했다. 나는 그 토속적인 의식 앞에서 가슴이 아팠다. 치앙콩을 떠나는 우리의 손에 도시락을 들려주던 완 씨의 얼굴이 떠올랐고, 시간을 거슬러 방콕에서 치앙마이로 올라가던 기차 안에서 먼저 내리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던 어느 승려가 떠올랐고, 다시 시간을 거슬러 방콕에서 숙소를 옮길 때 택시 기사에게 우리가 갈 주소를 몇 번이고 확인시켜 주던 호텔 직원이 떠올랐고, 다시 시간을 거슬러 인천 공항에서 보안 심사를 받으러 들어가는 우리를 바라보던 친구 Y의 눈빛이 떠올랐고, 다시 시간을 거슬러 먼 길을 떠나는 내게 꽃 바구니를 만들어 건네주던 여자 친구가 떠올랐고,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배낭을 내리는 나를 지켜보던 어머니의 옆모습과 오른손이 떠올랐다. 행위는 다를지언정 마음과 눈빛과 손짓은 누구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배에 올라 더위에 널브러진 이방인들 사이로 걸어오는 아이들은 조금 겁먹은 표정이었다. 문득 나를 포함해 이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여행자들이 방만하고 무례하게 느껴졌다. 지칠 대로 지친, 마음조차 열에 익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우리는 우리가 받았던 배웅을 기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시 배가 출발해 몇 분이 흐르면, 순식간에 그 모든 것을 잊고 한숨으로 시간이 흐르기만을 바라는 것이었다.
해 질 녘 루앙프라방에 도착했을 때 슬로 보트에서 내린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난 이미 배 위에서 뭔가를 잃어버렸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한참이나 메우지 못한 채 결핍을 느끼며 이 여행을 계속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