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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Sep 26. 2017

라오스 국경을 넘어 마주친

살면서 부지불식간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을 수 있을지

너무 오랜만에 올리는 글이라 전편의 링크를 붙여봅니다. :D


https://brunch.co.kr/@bergotte/54




 길쭉한 테이블 위에는 태국과 라오스 지폐, 소유자의 국적마다 색깔이 다른 여권, 라오스 도착비자가 필요한 여행자들의 증명사진이 올려져있었다. 매니저 완 씨는 이제부터 어떻게 국경을 넘고, 어떻게 라오스로 입국하며, 어떻게 훼이싸이까지 가서 슬로우 보트를 타게 되는지 상세히 설명해 주려 애쓰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나 삼촌의 심정으로 모두의 앞에 서 있었다.


 나와 D를 포함한 대부분의 팀원이 루앙프라방까지 가는 여정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치앙마이의 여행사에서부터 시작해 이곳 치앙콩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전체 여정을 설명하거나 이끌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인도하기는 하는데 그것도 잠시일 뿐, 각자 맡은 지역까지 소임을 다하고 나면 다음 안내자에게 우리를 인계해 버리고 알아차리기도 전에 종적을 감추고는 했다. 이를테면 우리는 계주 경기의 배턴과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어쩌다 보니 함께 라오스까지 넘어가게 된 다른 여행자들도 프로그램의 허점을 깨닫고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평소와 다르게, 피곤한데 아침 여섯시 반에 깨워 밥을 먹이고 한곳에 줄을 세우더니 어쩐지 복잡해 보이는 출입국 절차를 한 번에 외우게 만들어서 날카로워졌기에, 완 씨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선한 완 씨가 무슨 잘못인가? 이미 그를 완전히 신뢰하게 된 나와 D는 어떤 의문이나 의심도 없이 그의 조언을 기억하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그의 말을 전부 알아듣지 못하여 가보면 알겠거니, 그런 심정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국경 앞에서 일이 틀어져 이곳에 돌아오게 된다 해도 기뻐할 사람들이었다.


 여행을 시작한 후로 가장 일찍 일어난 날이었으나 그다지 피곤하진 않았다. 신선한 이슬을 포화상태까지 끌어안은 아침 공기 덕분이었다. 「무진기행」의 화자가 신선한 햇볕과 서늘한 공기, 바닷바람에 실린 소금기를 섞어 강력한 수면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상상했듯이 태국 북부에선 물기 어린 아침 공기만으로 강력한 강장제를 만들 수 있을지 몰랐다. 게다가 이것은 한동안 내가 다시 맡지 못할 태국이란 땅의 마지막 호흡이었다. 첫날 방콕에 도착해 푸른 새벽을 보며 잠들던 순간이 엊그제 같건만 벌써 여행의 한 단락이 끝나가고 있었다.



 여행 준비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놓아둔 배낭으로 마당은 아웃도어 용품 전시장 분위기였다. 설명회가 끝난 후 완 씨와 두 딸은 사람들의 서류 작성을 대행해 주고 있었다. 완 씨와 두 딸은 매일 아침 하는 일답게 기계적일 만큼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었다. 도착비자가 필요 없는 나와 D(대한민국 국민은 라오스에서 보름 간 무비자로 체류할 수 있다. 경신도 어렵지 않다)는 기다리는 동안 한가하게 마당을 어슬렁거렸다.


 못 보던 얼굴이 늘어 있었다. 우리가 완 씨와 술을 마시고 들어간 후, 심야에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그중 스위스에서 온 남자와 영국에서 온 여자가 초면이라는 상당한 제약을 무시하고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붙임성 좋고 배우처럼 잘 생긴 스위스 남자는 무려 칠 개월 동안 아시아를 여행한다고 했다. (스위스 국민도 라오스에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또한 한가롭게 마당을 돌다가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하는 묵직한 여행이 내 어깨에도 걸쳐진다면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었다.


 밴에 짐을 실었다. 완 씨는 잠시 모두를 불러 세우더니 콤팩트카메라를 꺼내 우리의 사진을 찍었다. 열 명 조금 넘는 인원 중 그와 친분을 쌓은 이는 얼마 되지 않아 그 사진이 숙소의 한쪽 벽이나 테이블 위에 진열될 리는 없었다. 메모리카드에 오래오래 남아 가끔 그나 그의 가족이 우리의 얼굴을 확대하고 기억을 더듬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차례대로 밴에 오르는 여행자에게 완 씨네 가족은 일회용 도시락이 든 비닐봉지를 하나씩 쥐어주었다. 우리가 지불한 요금에 포함된 점심이지만, 그들은 마치 먼 길 떠나는 가족을 배웅하는 표정으로 그걸 건넸다. 도시락을 손으로 받치자 따뜻한 기운이 전해졌다. 막 지은 밥의 온기, 그 밥을 지은 정성의 온기였다.


 밴이 마당을 빠져나갔다. 완 씨가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물론이거니와 완 씨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아마 왜 절로 그리 되는지도 모른 채, 커브를 돌아 완 씨의 가족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손을 흔들었다.





 국경까지는 금방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간단한 출국 심사를 받고 걸어서 태국을 벗어났다. 여섯 시간 정도의 비행 끝에 방콕에 도착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허무할 정도로 빠른 작별이었다. 아직 라오스로의 입국 허가를 받은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중립 지대, 무국적 지대에 서 있는 셈이었고, 여기에 눌러 앉는다면 나 또한 무정부주의자가 되는 것인가 되도 않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버스에 타라는 신호가 떨어졌다. 이렇게 심약한 아나키스트도 없으리라는 심정으로 냉큼 버스에 올랐다.


 이 구간은 정말 누구도 안내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잠깐의 혼란이 빚어졌음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태국의 출입국 사무소에서 라오스의 출입국 사무소로 가기 위해선 버스를 타야 했는데, 진짜 이 버스를 돈 주고 타는 게 맞는 것인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이 버스의 푯값이 당시 태국 돈으로 20밧이었다. 걸어갈 거리는 아니었고 이대로 되돌아갈 수도 없기 때문에 흡사 공기를 마셨으니 세금을 내라고 요구 받은 기분이었다. 다행히 이 정체 모를 프로그램 안에는 버스비도 포함되어 있었고, 우리 모두는 완 씨가 아침 브리핑을 하며 일일이 챙겨 준 20밧을 갖고 있었다. 아까 그 돈으로 이 버스를 타면 돼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네덜란드에서 온 제니퍼 로렌스는 뭔가 의심스러우면서도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어디 한번 믿어보자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 우리가 잘못 안 거라면 한 대 맞지는 않을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녀의 친구가 말려 주리라 믿었다.) 역시 나는 최악으로 심약한 아나키스트였던 것이다. 다행히 돈을 주고 버스를 타는 건 옳은 선택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앞자리에 내려뜨려진 머리받이천이 나를 환영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더 잘 모시겠습니다. 쓰레기를 봉지에 넣어 잘 처리해 관광문화인의 긍지를 가집시다.”


 물론 천에 쓰인 캠페인은 한글이었고, 이 머리받이천을 제작한 업체의 전화번호까지 적혀 있었다. 지역번호로 보아 소재지는 부산이었다. 차 맨 앞에도 “금연구역”이란 우리말 경고문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바다를 건너온, 아마 원조받기도 하고 연식이 오래된 차량을 싼값에 수입하기도 했을 한국산 버스였다. 앞으로도 이런 한국산 버스를 자주 보게 된다. 한국이 아무 대가 없이 라오스와 무비자 협정을 맺을 수 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의외의 순간에 고향의 흔적과 맞닥트리자 곧 당도할 라오스란 나라를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처음으로 제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라오스에 가겠다며 이 여행을 떠나왔으나 라오스가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이 나라를 수식하는 말들만 연기처럼 머릿속을 떠다닐 뿐이었다. 걷기에 좋고, 걸어야 좋은 곳. 느려질 수밖에 없어서 마침내 느려질 수 있는 곳. 혹자에겐 청춘을 확인하는 곳. 때로는 서양인을 주축으로 한 (광란의) 파티를 맛볼 수도 있는 곳. 라오스에 대한 그 모든 말들이 물기가 남아 있는 찰흙 한 덩어리처럼 내 앞에 놓여있었다.


 나도 여기선 느려질 수 있을지, 살면서 부지불식간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때 묻지 않은 자연과 라오인들 사이에서 되찾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마치 기적처럼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는 욕심도, 그렇다, 분명 내 안에 있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한글을 보고, 어릴 적 할머니 댁에 내려갈 때 탔을 법한 구식 고속버스의 두 번째 인생과 마주칠 줄이야.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분명 향수에 가까웠다. 어딘가 비릿한 가짜 가죽의 냄새와 경유의 어질어질한 향기와 손잡이에 올린 팔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이물감이 나를 이곳과 정반대편에 있는 집, 과거, 추억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고향의 흔적은 변화나 일탈에의 욕구와는 무관하게 나의 뿌리가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게 땅 속에 박혀있음을 암시했다. 내 앞에 놓인 찰흙 덩어리가 그 어떤 모양도 갖추지 못한 채 미분화 상태 그대로 굳어버릴지 모른다는 예감을 나는 조금은 하고 말았다.





 간단한 출입국 서류를 작성하는데 자그마한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는 나와 D를 한번 슥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출국 카드는 나중에 쓰고 일단 들어가세요.”


 처음엔 이곳 직원인가 했는데 그러기엔 너무 어려 보였고 제복도 입고 있지 않았다. 지나가던 오지랖 넓고 마음씨 좋은 라오인인 걸까? 우리가 그러겠노라고 하자 그녀는 다른 일행에게 가서 뭔가를 참견하기를 반복했다.


 심사는 간단했다. 최소한 나와 D에겐 그랬다. 여권을 내밀고, 날 한번 슥 올려다보는 심사원에게 선한 미소를 지어주고, 태국 입출국 도장을 확인한 후 그 아래 도장을 찍는 우직한 손을 지켜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아, 주말이라는 이유로 만 낍(라오스의 화폐 단위. 만 낍은 한화로 약 1,400원)의 추가 비용을 내는 것까지. 단체비자를 발급 받아야 하는 남미, 유럽 출신 친구들은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스위스 청년도 그냥 넘어올 수 있었을 테지만, 함께 숙소까지 왔던 친구를 에스코트하느라 늦게 나오는 모양이었다.


 Welcome to LAOS.


 저만치 보이는 나지막한 산등성이에 커다란 글씨로 그런 문구가 박혀있었다. 만만치 않은 사이즈의 환영이었다. 황량한 평원을 훑어보았다. 산, 깃발, 낡은 자동차 몇 대도 그 엄청난 공간을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불교 사원을 연상케 하는 건물도 몇 채 있었다. 지붕도 기둥도 큼지막했으나 섬세한 면은 부족해서 가건물이나 미니어처 같았다. 발밑에 흐르는 도랑엔 담배꽁초가 수도 없이 떨어져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소일거리란 대개 그런 것들이었다.



 먼저 나타난 건 태국 여인 똠이었다. 그녀는 우리를 보자마자 며칠 못 본 사람처럼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드디어 라오스라고, 그녀도 오랜만에 와서 흥분된다고 했다. 국경을 넘자 다들 들뜨고, 그래서 유치해지는 모양이었다. 이십 여 분이 흘러 반가운 얼굴들이 속속 나타났을 때 인사말에 농담을 섞지 않고선 못 배겼기 때문이었다. “라오스에서 보니 더 반가워요.” “이야, 오랜만인데?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드디어 라오스야! 잠깐, 여기 라오스 맞지?”


 그때, 심사대 건너편에서 말을 걸었던 자그마한 여자가 우리 옆을 지나갔다. 작은 테이블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그들이 그녀의 일행인 모양이었다. 그들의 테이블엔 어디서 많이 보던 명판이 세워져 있었다. 'Bo. Sapphire.' 저걸 어디서 봤더라? 맞다, 우리 가슴팍에서 봤구나. 아침에 완 씨가 가슴에 붙이고 있으라며 나눠줬던 스티커에 동일한 회사명이 쓰여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슬로우 보트에 태울 라오스의 여행사 직원이었던 것이다.



 똠은 직원이 입고 있는 바지를 가리키더니 태국 여자들과 라오스 여자들의 전통 바지에 한 가지 차이가 있다고 했다. 라오스 여자들은 발목 위까지 올라오는 칠 부 바지를 즐겨 입는데, 이 나라에선 발목이 중요한 매력의 척도이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걸음걸이도 고양이 걸음으로 걷는다며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흉내를 내기까지 했다. 과연 우리를 안내한 직원은 씰룩씰룩한 걸음걸이를 바쁘든 바쁘지 않든 고수했는데, 그렇게 걸어서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컵라면을 가져와 먹기 시작했다. 미스터리한 땅에 오자마자 그곳 사람들이 컵라면을 먹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똠과 함께 기념사진을 수여 장 찍었음에도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똠은 유난히 오래 걸린다며 투덜거렸다. 한국 사람이 태국에 가면 뭔가 느리게 돌아간다는 느낌에 답답해지듯, 태국 사람인 똠 역시 라오스에 오니까 뭔가 느리게 돌아간다는 느낌에 복장이 터지는 모양이었다.


 “너희는 도착 비자 안 했어?”

 “네, 저흰 보름까진 필요 없어요.”

 “유럽 갈 때도 그래?”


 그렇다고 하자 그녀는 한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자신도 시월에 연인인 브아송을 만나러 파리에 가려고 하는데 태국인이 프랑스에 들어가려면 그 절차가 너무 복잡해서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가난하고 국력이 약한 나라는 아무래도 불리하다고. 그래도 브아송이 어떻게든 자신을 불러줄 거라고.


 누군가에겐 여권만 내밀면 가능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겐 초청장이나 재산 증명서, 복잡한 인터뷰 끝에 받아낼 수 있는 비자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유머를 잃지 않았다. 자신도 라오스에 오면 떵떵거릴 수 있다고. 태국에선 십에서 백 단위로 돈 계산을 하지만, 화폐 가치가 유난히 낮은 라오스에서는 몇 만 몇 십만 단위로 돈 계산을 하니까 마치 백만장자가 된 것 같다고.


 웃어야 할지 위로해야 할지 모를 상황이었으나 그냥 웃기로 했다. 한국만큼 무비자 협정을 많이 맺어놓은 나라가 없지만, 동시에 한국인만큼 긴 휴가를 내서 여행하기 어려운 사회 속에 사는 국민도 드물다고, 나는 그녀에게 이야기해 보려 들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가 무사히 파리에 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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