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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Jun 08. 2017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일상이다

사람보다 방이 많은 것 같은 한적한 숙소에 밤이 내리고

 태국의 북서쪽 국경을 향해 세 시간 넘게 달렸다. 풍경이 극적으로 바뀌지는 않았으나 점점 현대 문명의 축복(또는 지배)에서 멀어진다는 인상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병충해와 홍수를 피하기 위해 티크 같은 나무로 축대를 세워 땅보다 높이 집을 지은 태국 전통가옥이 그러했다. 주차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지층에 기둥만 세운 불안한 빌라보다는 이곳의 전통가옥이 더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렇게 도착한 치앙콩은 한국으로 치면 이里 수준의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을 찾는 이방인 대부분은 다음 날 국경을 넘어 라오스로 들어가는 여행자들이었다. 밴은 그나마 번화한 거리에서도 제법 떨어진 숙소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식민지풍 건물이 디귿자 형태로 마당 삼면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늑함과 세월의 덧없는 기운 같은 것이 혼재된 느낌이었다. 지어진 지 오래되진 않았으나 애초부터 값싼 재료로 건물을 지은 탓에 세월보다 빨리 늙어버린 모양새였다.


 족구를 해도 충분할 만큼 넓은 마당에서 내가 가없는 향수를 느끼는 동안, 밴에 타고 있던 일행 대부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중 태국 여인 똠과 프랑스 연인 브아송이 가장 빨리 적응했고, 칠레 여자와 영국 여자는 잠깐이지만 속았다는 낭패감을 표정에 드러냈다. 방이 배정됐다. 몸이 불편해 보이는 초로의 남자가 나타나 정말 느린 손길로 키를 나눠주었다. 그리고 거의 알아듣기 힘든 말투로 내일 오전 일곱 시 반에 아침 식사를 한 다음 국경을 넘어 라오스의 훼이싸이로 이동한다고 공지했다. 그동안 밴을 몰고 온 운전사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모든 이의 짐을 내렸다. 그는 순식간에 담배 한 대와 맥주 한 병을 해치우곤 치앙마이로 돌아가 버렸다.





 우리 방은 이 층이었다. 자물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자마자 어릴 적 우리 집에도 비슷한 것이 있던 살이 두껍고 간격이 넓은 선풍기가 보였다. 공교롭게도 나와 D 모두 집에 에어컨이 없기 때문에 여행만 오면 에어컨을 향한 부단한 집착을 보이고는 했다. 이번엔 우리가 낭패감을 드러낼 차례였지만, 한낮의 열기가 식어서 그런지 선풍기를 돌리자 견딜 만한 온도가 되었다. 실상 한밤중에는 기온이 많이 떨어져 그마저도 꺼야 했을 정도였다. 그 외에도 방안엔 브라운관 텔레비전 한 대, 도대체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숱한 서랍장, 표면이 해진 이불이 놓인 딱딱한 침대 두 채가 있었다.


 벽지는 풀빛이 감도는 연누런색이었다. 화장실 문을 열자 오랜만에 바가지로 물을 퍼부어 내리는 변기가 있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확실히 북쪽으로 올라오면서 향수를 자극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화장실에서 경계 비행을 하는 모기 몇 마리만 귀찮을 뿐이었다. 우리는 화장실은 물론 방안에도 모기향을 피움으로써 피가 난무하는 한밤의 전투를 미연에 방지하기로 했다. 모기향 냄새조차도 내가 시골이라 부르던, 아버지의 고향으로 나를 데려가 주기에 나는 만족스러웠다.



 피로도 풀고 밤마을도 나가기 위해 차례대로 씻었다. D가 졸졸거리며 떨어지는 물로 어떻게 어떻게 샤워를 해 나가는 동안, 나는 밖으로 나와 숙소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 쿨럭거리며 멀어지는 모터 소리,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절대 끊이는 법 없는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어서 잔잔하고, 나지막해서 아련한 소리들이었다. 서울을 떠나 방콕, 치앙마이를 거쳐 이곳까지 오는 동안 세상은 점점 조용해졌다. 문명의 이기도 하나씩, 새로운 것부터 사라져 갔다. 대신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생겼다. 서쪽 하늘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주황색 구멍이 뚫려있고 동쪽으로는 짙은 땅거미가 밀려 내려오는 풍경 따위가 그러했다. 얼마간 온화한 빛을 맞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태국에 다시 온다면, 그건 이 석양을 보기 위해서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간식거리와 술이라도 살 요량으로 숙소를 나서려는 데 숙소 식당 앞에서 맥주를 마시던 남자가 우리를 불렀다. 환갑은 족히 넘었을 법한 히피 같은 백인 남자였다. 그는 우리더러 어디서 왔느냐고 묻더니 한국에서 왔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여기로 와서 앉으라고 청했다. 아마 우리가 미국인이었어도, 일본인이었어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왔다 해도 합석을 권했을 터였다. 이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을 만큼 그는 취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대니였다. 벨기에 출신이었다. 눈은 풀려있었지만, 친근한 남자였다. 물론 우리에게 연신 공짜 맥주를 따라줬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는 시내에서 ‘린 바Rin Bar’라는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고, 이 숙소의 매니저와 두터운 친분이 있어 여기에 자주 온다고 했다.


 “매니저를 소개해 주지.”


 대니가 큰 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식당 안에서 사십 대 정도의 태국 남자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방 열쇠를 나눠주던 노인이 이곳을 관리하는 줄 알았는데, 이 사십 대 남자가 숙소 운영을 맡은 매니저였다. 완(또는 왕이었을까)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한눈에 호감이 가는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자주 웃는 얼굴에 새겨지는 온화한 곡선이 눈매와 입가를 잇고 있었다.



 매니저 완 씨는 대니가 또 투숙객을 붙잡고 술을 마시고 있구나, 오늘은 좀 자제를 해야 할 텐데,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대니를 향한 애정도 묻어있었다. 완 씨는 우리에게 따로 인사를 건네며 곧 저녁 식사가 준비될 거라고 일러주더니 대니가 주문한 차가운 맥주 몇 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와 D는 나이도 국적도 다른 두 친구와의 만남에 어리둥절했으나 잔을 비우면 저절로 공짜 맥주가 차오르는 자리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 외진 곳에서 여행자를 대상으로 숙소나 술집을 운영하는 삶은 우리에게 있어 일종의 로망이었다.


 순식간에 두 잔째가 되어버린 맥주를 반 정도 비우며 나는 대니에게 물었다.


 “태국에서는 얼마나 사셨어요?”

 “5년. 난 태국이 정말 좋아. 결혼도 태국 여자랑 했지. 그녀는 마사지를 해.”

 “자식은요?”

 “나한텐 없고, 마누라한테 아들 두 명이 있어. 열아홉 살, 열네 살.” 대니가 덧붙였다. “난 걔네를 정말 사랑해.”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가 운영한다는 ‘린’이라는 술집 이름도 부인의 이름이 아니었을까 싶다.


 “유럽 놈들은 말이야, 여기 와서 여자랑 놀아나다가 애가 생기면 나 몰라라 도망가곤 해. 완전 불한당이야. 망할 놈들이지.” 여기서 불한당이라고 옮긴 단어는 실제로는 훨씬 더 과격했음을 밝힌다. 그렇게 대니는 십여 분 정도 책임감 없는 남자들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어떤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고, 어떤 말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참 열변을 토하던 그가 볼일이 급해져 자리를 비우자 매니저 완 씨가 다시 나타났다. 손님들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도 유리 없는 창문 너머로 계속 우리를 지켜봤던 모양이었다.


“실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지금은 취해서 저러는 거니까 이해하세요. 한번은 돈 없는 여행자들이 온 적이 있는데, 숙박비를 전부 내주고 술도 사 줬어요. 정말 좋은 사람이죠.”  대니가 우리를 불편하게 할까 봐 걱정을 하는 것과 우리가 대니를 불편하게 여길까 봐 걱정하는 것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완 씨의 우려는 물론 후자였다. 그가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어떤 온기를 느낀 우리는 대니는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답하며 그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사실 완 씨야말로 깊은 인상을 받을 만큼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말투와 행동에는 그가 여행자를 좋아한다는, 아니,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출 수 없는 진심이 배어있었다. 그는 우리는 물론이거니와 식당 앞을 지나다니는 투숙객 하나하나를 배려했다. 식사 시간을 알려주고, 길을 일러주며, 필요한 걸 챙겨주었다. 그는 유머 감각이 있었고, 이 동네와 라오스로 넘어가는 길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누구의 말이라도 경청할 줄 알았다.


 완 씨와 그의 가족이 이곳에서 함께 일한다는 점도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한몫했다. 미모가 빼어난 그의 아내는 요리 솜씨가 뛰어났다. 두 딸은 초등학생 정도로 보였는데, 낯가림은 있었지만 귀엽고 착한 아이들이었다. 부모님의 심부름을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따르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지금껏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삭막한 서비스에 익숙해졌던 마음이 비로소 기댈 곳을 찾은 기분이었다. 한 나라의 국경에 인접한, 자동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벽지에서, 디귿자 모양의 건물을 등지고 이런 환대를 받을 수 있을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숙소 곳곳에는 이곳을 스쳐 간 여행자들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개중에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얼굴도 있었다. 집을 오래 떠나 있었던 것처럼 그 얼굴이 반가웠다. 이 기념물은 전부 완 씨가 찍은 사진으로 손님들이 떠날 때마다 매번 그런다고 했다. 그는 삶을 즐기는 방법을 남보다 한두 가지는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방콕에서 아주 적은 돈을 받으며 바텐더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지금은 어엿한 국경 마을의 호텔(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매니저가 되었다. 변방에 있는 데다가 턱없이 작고 누추한 곳이라도 그가 자신의 인연을 잣는 덴 충분한 둥지였다.



 “그러고 보니 저도 한국인 친구를 한 명 알고 있어요.”


 완 씨는 우리에게 잠시 기다려 보라고 하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콕 호텔에서 일할 때 알게 된 한국인 친구라 했다. 상대방과 몇 마디 인사말을 나눈 그는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람의 전화를 바꿔주는 것처럼 나에게 전화기를 건넸다. 치앙마이에서 가이드를 하고 있다는 완 씨의 친구는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동료의 전화에 의아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완 씨에게는 이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한국인 손님이 와서 반가웠고, 그러다 옛친구 생각이 났고, 그래서 서로 인사라도 하라고 권한 것이다.


 얼떨결에 시작한 통화였다. 나와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완 씨가 아니었다면 서로 존재를 알 이유도 없을 사이였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에는 어색함이 없었다. 어떻게 완을 만났나요, 저희도 막 치앙마이를 떠나왔어요, 태국은 어떠세요, 네, 정말 좋은 곳이네요, 반가웠습니다, 잘 지내세요. 나와 D, 그리고 치앙마이에서 가이드를 한다는 남자 사이에는 두 가지 사소한 공통점이 있었다. 한국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완 씨와 인연을 맺었다는 것. 나는 그런 헐거운 공통점만으로도 인연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배웠다.





 사람보다 방이 많은 것 같은 한적한 숙소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건 차라리 이 땅에서 조용히, 천천히, 겹겹이 쌓여온 세월이었다. 빈 맥주병이 늘어났다. 태국 가정식으로 삶아 낸 생선도 식탁에 올랐다. 현지인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기분이었다. 숙소에 기거하는 고양이 몇 마리도 어느새 경계심을 풀고 내 다리 사이를 돌아다녔다. 부드러운 털이 스칠 때마다 화들짝 놀라는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고양이 한 마리는 내처 테이블 위로 올라와 우리가 먹다 남긴 생선에 코를 박았다. 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서는 안 되는지, 깨끗하게 살이 발라진 생선 뼈를 보고 알았다. 대니는 그 사이에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커다란 하얀 개를 뒷좌석에 앉히고 돌아왔다.


 “나한테는 아들이나 다름없는 녀석이지.”


 대니가 턱을 만져주자 개는 한없이 얌전한 표정을 짓더니 가만히 앉아 골목 너머를 바라보았다. 고양이가 옆을 지나다녀도 슬쩍 쳐다만 볼 뿐이었다. 고양이 역시 이미 안면이 있는지 하얀 덩치를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다. “세상사 그냥 뒤섞여 사는 거지.” 녀석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움직임조차 어떤 의미가 있어 보였다.



 완 씨와 대니는 투숙객들에게 쉬지 않고 맥주와 대화를 권했다. 어쩌다 보니 나와 D도 덩달아 손님을 대접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온 두 젊은 여자는 이웃한 벨기에 출신의 대니를 반갑게 여겼다. (아니면 대니만 그들을 반갑게 여긴지도 모르겠다.) 세 사람은 영어와 그들의 공용어인 네덜란드어를 번갈아 썼다.


 두 네덜란드 여자는 아주 대조적인 성격이었다. 배우 제니퍼 로렌스를 닮은 여자는 까칠하며 직설적이었고(“암스테르담에서 왔지만, 전 약 같은 거 안 해요.”, “대니, 당신이 하는 네덜란드 말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콜라가 먹고 싶은데 콜라 없어요? 왜 없어요?”), 얼굴이 하얀 친구는 조용하고 친구 말에 고분고분한 성격이었다(“…….”). 서로 잘 맞는 성격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유럽 친구가 방으로 돌아간 후에는 처음 밴을 탔을 때부터 인상적이었던 브라질에서 온 남자(후에 그는 ‘앤더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스쳐 지나가는 인연 이상의 인물이 된다)와 칠레에서 온 여자도 합석했다. 남자는 약간 길쭉한 얼굴형에 눈이 깊은 멋진 외모를 지녔고, 여자는 어딘가 되통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얼굴이 조막만 하고 귀여운 상이었다. 둘을 나란히 두고 보니 제법 잘 어울렸다. 처음엔 같은 일행인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은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그들이 같은 남미 대륙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자 두 사람은 금세 친해졌다. 그들은 그날 밤 늦게까지 마당을 빙빙 돌며 이야기를 나눴고, 이후로 루앙프라방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 내내 함께 다녔다. 언뜻 듣기에 남자 쪽이 여자의 고민 상담을 해주는 것도 같았지만, 그냥 둘 사이에 로맨스가 싹트고 있다고 믿기로 했다. 우리만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닌지 루앙프라방까지 가는 동안 일행 중 누구도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사람이 앉았다 떠난 자리엔 결국 나와 D, 완 씨와 대니만 남았다. 완 씨의 두 딸은 스마트폰에 열중해 있었고, 부인은 설거지를 했다. 대니는 만취의 끝에서 가까스로 귀환하더니 이젠 집에 가야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술집 ‘린’과 아내인 ‘린’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음주운전이라며 나와 D, 완 씨가 만류를 했지만, 이런 한가한 동네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을 피력하며 그는 스쿠터에 올랐다. 그의 자식이나 다름없는 하얀 개도 올 때처럼 뒷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며 대니와 인사했다. 앞으로 그를 다시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헛헛해졌다. 그러면서도 침착한 표정으로 오토바이 뒷자리에 실려 멀어지는 개를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왔다.





 이곳에서는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우린 짧은 시간 동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마음을 더 많이 여는 것인지도 몰랐다. 헤어짐은 아쉽지만, 곧 새로운 인연을 만나리라는 걸 알기에 마음 한구석이 시린 정도는 감당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아마 완 씨는 매번 시큰해지는 코끝을 감추기 위해 그들의, 우리의 사진을 찍는 것일 테고 말이다.


 완 씨가 한국의 가요를 찾아 틀었다. 노트북에 연결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었지만, 밤기운에 젖자 FM 라디오처럼 운치가 더해졌다. 그가 좋아한다는, 꽤 오래전 곡이었다. 모기떼가 물러갔다. 마침내 별이 보였다. 작고 어두운 마을은 방콕이나 치앙마이와는 전혀 다른 공기 속에 있었다. 누군가 밭은 기침을 했고, 누군가는 남은 맥주를 잔에 따랐다. 이상하게도 나는 취해서 웃다가 문득 고마운 마음에 울고 싶어졌다. 밤이 깊었다. 나는 핀으로 꽂아둔 완 씨의 사진처럼 우리의 여행이 여기서 멈춰버리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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