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쉴레 - 2
1990년대 후반 한국을 뒤흔들었던 탈옥수 신창원을 기억하시나요?
907일간 잡히지 않다가 1999년 더운 여름 한 시민의 제보로 극적으로 잡혔었죠. '신창원이 기부를 했다' '신창원은 부자들의 집만 턴다더라' 이런 소문들이 있어 홍길동과 비교되기도 했었고요. 신창원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탈옥과 도주과정은 큰 화제였습니다. 심지어 신창원이 체포될 당시에 입었던 짝퉁 명품 티셔츠가 유행이었을 정도였으니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알 수 있죠.
한 방송에서 표창원교수가 신창원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나 또한 신창원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 비슷한 삶을 살아왔다. 나도 그처럼 어머니의 지갑에 손을 대기도 했고, 친구들과 싸움도 많이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버지가 엄하게 혼내셨고, 훈육 후에는 따뜻한 말로 너를 믿고 있고, 너는 정의감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며 사랑으로 보듬어주셨다.
신창원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그가 어렸을 적 동네 수박서리를 하다 주인에게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수박밭주인이 아버지에게 와서 항의를 하자 아버지는 어린 신창원을 데리고 경찰서로 직접 갔습니다. 그 일로 소년원에 들어가게 되고 동네에서 소년원 다녀온 아이로 낙인이 찍혀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한 예로 신창원의 책 내용에서도 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방식을 엿볼 수 있는데요.
"5학년 때 선생님이 'XX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 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 하고 소리쳤는데 그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 만약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 하고 머리 한 번만 쓸어주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신창원의 어린 시절이 어려웠다고 그의 범죄들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또한 어린 시절에 힘들었다고 다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지요. 오히려 그 상황을 지렛대 삼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겠죠. 하지만 표창원 교수와 신창원이 달랐던 점은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 주는 따뜻한 어른들이 있었느냐 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에곤 쉴레에게는 클림트가 있었습니다. 둘은 거의 30살이라는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멘토관계 또는 예술가 동료로서 평생을 친구로 지냅니다. 한때 클림트가 공부했던 비엔나 예술학교에 진학한 쉴레는 그렇게 원하던 그림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쉴레가 생각했던 학교와 현실은 거리가 멀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의 엄격하고 보수적인 스타일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쉴레는 마음이 맞던 동기들과 신예술 모임(New Art Group)을 만들고, 교수가 학생들의 창의성을 억누르고 오스트리아 문화발전을 방해한다는 편지를 적어 학교에 항의합니다. 결국 쉴레는 동기들과 학교를 그만두게 됩니다.
그의 스승 클림트가 같은 보수적인 학교에 적응하고, 우수하게 졸업한 것에 비하면 파격적이면서도 리더십이 있고, 아주 능동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쉴레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없던 파격적인 면이 보여서였을까요? 클림트는 쉴레에 대해 처음부터 호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07년 에곤 쉴레가 처음 클림프를 찾았을 때 자신의 그림과 교환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도 하였고, 모델을 제공하거나 주변 갤러리스트들 예술가들에게 쉴레를 소개합니다.
그 때문인지 1907년에서 1909년 사이 에곤 쉴레의 작품들은 클림트의 아방가르드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색감이나 인물의 표정, 패턴까지 비슷한 요소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죠. 클림트는 애제자 쉴레를 1909년 비엔나에 초대해 작품의 전시를 도왔습니다. 그곳에서 반 고흐, 뭉크 등의 작품을 만나며 쉴레의 작품세계는 넓어집니다. 드디어 그동안 쉴레가 마음속 깊이 꿈꾸어왔던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엔나 전시 이후 쉴레는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910년 이후 누드로 실험하기 시작했고, 우리가 에곤 쉴레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결정적인 작품들을 완성하게 됩니다.
동경하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 클림트는 쉴레에게 스승 그 이상의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가족 중 유일한 남자아이인 쉴레는 아버지와 동일시하며 남성상을 키워왔습니다. 동경하던 아버지가 성병으로 병약하게 죽어가는 모습은 쉴레에겐 마치 완벽한 남성상의 죽음이자 건강한 성 가치관의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클림트와의 건강하고 지지적인 관계를 경험하며 쉴레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느꼈던 실망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성적 욕구와 그 욕구를 느끼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묻어 두었던 쉴레는 클림트를 만난 후 그림을 통해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합니다. 클림트는 스승이자 불완전한 아버지상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또한 쉴레가 눌러 두었던 감정들을 그림을 통해 해소할 수 있도록 도왔던 든든한 지지자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쉴레의 자화상의 변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화상을 살펴보면 마치 한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 같기도 합니다. 탈락된 신체와 마르고 혈색 없는 몸에 점점 살이 붙고 혈색도 돌며 눈빛도 조금 편해 보입니다.
1차 대전 징집 이후 1918년 비엔나에서 열린 분리파의 40번째 전시회에 에곤 쉴레의 그림 50점이 초대되고 메인홀에 걸립니다. 쉴레는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고, 에디트와 결혼을 하면서 아름다운 가정을 꿈꿨던 것 같습니다. The Family라는 그림을 보면 쉴레와 그의 아내 에디트 그리고 뱃속의 아이까지 따뜻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1918년 2월 스페인독감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클림트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투병소식을 들은 쉴레는 곧바로 달려가 그의 임종을 기록합니다. 눈도 움푹 파이고 머리카락도 얼마 남지 않은 모습이지만 평온해 보입니다. 죽어가는 클림트를 그리며 쉴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클림트가 떠난 그해 가을 임신 6개월이었던 에디트가 죽고, 3일 후 쉴레도 세상을 떠납니다. 28살이라는 너무나도 젊고도 아까운 나이였죠. 그가 살아있었다면 어떤 파격적인 작품을 더 남겼을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10대를 남성관의 죽음, 성욕과 죄책감 사이에서의 갈등으로 보냈다면, 20대 마음속 깊은 곳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그림을 통해 얽힌 실을 풀어낸 쉴레는 결국 모두가 포르노라고 치부했던 그림을 예술의 한 영역으로 확립합니다. 주변에서 모두 아니라고 할 때에도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주장해 온 쉴레의 끊기와 열정이 그림을 통해서도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인생의 어떤 부분에서 나는 이리 열정적으로 살아봤을까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