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토론 좋아하네
오랜만에 재미있어 보이는 예능을 발견했다. 채널 웨이브에서 제작한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라는 프로그램이다. 극과 극의 가치관을 가진 출연자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이념 서바이벌 예능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이 프로그램은 말 그대로 다양한 이념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출연해 여러 가지 다채로운 게임과 챌린지들을 하며 살아남은 사람들이 상금을 가져가는 서바이벌식 예능이다. 예능과 이념, 사상이라는 단어는 그다지 예능에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지만, 없는 주제를 찾기가 더 어려운 요즘 방송 시장에서 정치쇼라고 못할 건 없다.
프로그램 참여자는 커뮤니티에 입소할 때 테스트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확인한다. 사상 검증은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 4가지로 나뉘는데, 참여자들은 커뮤니티 안에서 자신의 사상을 숨긴 채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자신의 사상을 숨기는 것이 초반의 미션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상 테스트 점수를 다른 참여자가 알아채고 사상을 검증당하게 되면 탈락하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참여자들은 본인이 실제 가진 사상이나 배경과는 다소 다르게, 혹은 숨기며 대화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가진 반대의 정치적 성향이나 젠더성향, 계급, 개방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거나 혹은 침묵하게 되는 상황들이 생기게 되는데 그때 참여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때가 있었다. 시청자로서 그런 부분들을 볼 때 묘한 즐거움이 있었고, 또 실제 나와 반대되는 성향들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왜 저런 성향을 가지게 되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정치를 좋아하지는 않지만(이라고 쓰고 잘 알지도 못한다라고 읽는다) 정치적인 논쟁은 좋아라 하는 편이다. 나와 다른 이념이나 사상, 생각, 관념을 가진 사람들과 논쟁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는 편인데, 그 사람을 싸워서 이겨버려 그 입을 다물게 하리라-라는 쪽의 즐김보다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언어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랄까. 일상적인 언어보다 논쟁적인 주제에 대한 언어의 발화를 들으면 그 사람이 평소에 쌓아온 교양이나 지식들을 엿볼 수 있고, 그런 부분에서 나는 배우는 게 많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니 논쟁보다는 토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더 낫겠다.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는 이런 재미가 있는 예능이었다. 똑똑하고 지혜롭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모여 수준 높은 대화와 토론을 보여주는. 물론 예능이라는 틀 안에서 당연히 그 안에서도 빌런은 있다. 자신의 언어적 능력이나 논리 부족으로 상대방과의 논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이 느껴지면 화를 내거나 욕부터 내뱉는 류의 사람들 말이다.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을 배제한 채로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논쟁에 감정이 들어오면 주된 주제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논쟁에서 감정을 배제시키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마는데 그렇게 되는 주된 이유는 아마 상대가 말꼬투리를 잡거나 비꼬는 말투로 조롱하며 상대방을 살살 긁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현명하거나 논리적이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를 숨기기 위해 조롱이라는 편협하고 엇나간 방식을 선택한다.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방식이란 것도 모른 채 “그것도 모르냐”, “세상이 너만의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아 “, ”어떻게 세상을 살아왔냐 “ 등의 말을 뱉으며 자신의 무논리를 증명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논쟁에서 이기거나 지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논쟁에서 이기는 것은 그 자리에서의 잠깐의 유희 말고는 특별히 얻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하나의 논쟁에서 어떤 주제가 이기는지에 대해 집착하기보다는 상대와의 의견 차이를 줄여 합의점에 도달하는 과정을 갖거나 혹은 의견차이를 줄이지 못하더라도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고 저런 의견도 있구나, 를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상대방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어떠한 이유로 상대방이 그런 사상과 생각, 개념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은 지능의 영역이고, 그런 과정을 이끄는 것도 각자의 언어적, 윤리적, 이성적, 논리적 능력에 달렸다. 그래서 논쟁은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서로에 대해 동의하지는 못하더라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상대를 이해시키는 것이야 말로 결국엔 이기는 것이 아닐까-.
방송 자체는 뒤로 갈수록 구성 그 자체나 게임의 규칙 등이 힘을 잃고 약간 노잼으로 가긴 했지만, 나와 비슷한 사람들, 혹은 나와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 적극적으로 중도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 등 다채로운 사람들의 지적인 대화를 엿볼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열심히 다른 사람들에게 홍보하고 다녔지만 결국 시청한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해서 조금은 서글프지만 혹시 온갖 막장과 폭력, 비방, 유희만 있는 뇌 빼고 보는 방송들에 질린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을 챙겨봐도 좋겠다. 책을 읽거나 토론 프로그램은 못 볼지언정 나는 솔로보다는 조금 건설적일 것이니까. (앗, 쓰고 보니 나는 솔로에서 인생을 배운 것 같기도 했는데(?) 깔깔 >.<)
혹 자신의 사상을 검증해보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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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최종 결말이자 다 보고 난 후기를 안쓴것 같아서 살짝 수정. 세상은 절대 아름다울 수 없고 우리는 절대 완벽하게 타인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며 좌파와 우파가 화합하는 날은 절대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끗! (?)
암튼 세상과 정치판은 안바뀐다. 절대. 보고나면 내말이 무슨말인지 알것임. 궁금하면 보등가! 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