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ㅇㅅㄷㅅ

퇴사일기

퇴사하는 마음, 1년 후

by Theatre Romance

작년 초, ‘퇴사하는 마음’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입사 후 몇 해 되지 않는 동안 10명이 넘는 팀원을 떠나보내며, 누가 떠나도 담담해지고 그저 그 업무가 나에게 넘어오지 않기만을 바라는 건조한 마음을 기록한 글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 그 누가에서 누가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 또한 그곳을 떠나기로 했고 오늘은 퇴사한 지 2주 차의 한가로운 주말이다. 퇴사를 결심한 내 마음을 기록해 보고자 정말 오랜만에 브런치에 들어왔는데, 발행하지 못한 메모처럼 남겨둔 서랍 속 글들을 보니 ‘그간 나 정말 힘들었구나, 나를 정말 하나도 돌보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담담했던 마음 한 편에는 ‘나도 떠나고 싶다’라는 마음이 늘 있었던 건 아닐까.


퇴사를 결심하게 된 이유들..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결정적인 계기는 한 사람이었지만, 찬찬히 돌이켜보면 그것만은 아니었다. 감당해 내야 했던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 밤낮없이 울려대던 카톡, 남들 쉴 때도 일했던 나날들, 그에 비해 주어지지 않던 보상, 혼자의 외로움, 속절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무례함, 권한은 없지만 책임은 다 져야 했던 상황들, 공공기관이라는 이유로 개인과 회사가 일치해야 했던 순간들…. 너무 열심히 일했는데도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함까지. 아마도 그 모든 작은 일들이 켜켜이 쌓여 결국 퇴사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어젯밤, 침대에 누워 남편에게 문득 이런 말을 했다.

‘오빠, 나 퇴사하기 잘한 것 같아. 삶을 되찾은 느낌이야.’


퇴사한 지 불과 2주,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얼굴 표정이 달라졌다. 미간의 주름이 펴지고,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 예전엔 집에 돌아오면 도파민에 그저 절여져서 침대에 눕는 것밖에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는 여유가 생겨 운동하고 싶은 마음이 솟는다. 필라테스를 등록했고 러닝도 다시 시작했다. 무엇보다 나를 오래 괴롭히던 불안 증세가 많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심장이 계속 뛰고 식은땀이 조금씩 날 만큼 계속해서 불안증세에 시달려 종종 숨을 크게 들이쉬어야 했고, 이러다가는 공황으로 다시 번질까 무서워 병원도 찾았더랬다. 물론, 15년 가까이 연극이라는 한 장르 안에서 살아온 내가 완전히 미련 없이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아까운 마음도 있고, 정말 그렇게까지 힘들었나 스스로 의심도 든다. 혹시 내가 너무 나약했던 건 아닐까. 그럼에도 지금으로서는 퇴사가 좋은 선택이었다고 확신한다.


새로운 직장에서 또 어떤 스펙터클한 일들이 벌어질지,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써 변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역시 잘한 선택이었고, 퇴사가 최선이었으며 이 결정을 내려서 다행이다’라는 생각만 든다. 너무 작은 세계 안에서 10년 넘게 매몰되어 있었던 건 아닐까. 오랜 기간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나 역시도) “어딜 가든 다 똑같아. 차라리 여기가 낫지”라는 말을 자주 했다. 공공기관에서라면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긴 공노비의 시간을 끝내고 사노비가 되어보기로 했다. 아주 살짝만 빠져나왔을 뿐인데도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 같다. (물론, 그 안에서 여전히 열정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큰 존경심을 갖고 있으며, 오히려 온갖 핑계를 대며 내 길을 펼치지 못했던 나 자신을 반성할 뿐.)


나는 여전히 극장을 사랑한다. 어쩌면 새로운 세계에 금세 싫증을 내고, 드라마만이, 무대 위의 세계만이 줄 수 있는 유일한 감동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내 선택에 믿음과 안도를 갖고,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언제든 ‘지금 나는 괜찮은가’를 스스로 돌아보며 살고 싶다. 떠나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수 있음을. 시작이 아니더라도 떠나는 것 또한 용기였고, 그 용기를 낸 나 자신에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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