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조건이다. 시간도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만큼 주머니 사정도 탄탄하다. 돌봐야 할 가족이나, 반려견, 식물, 일도 일주일 동안은 해결되었고, 거칠 것이 없다.
가장 빠른 국적기 표를 예약하여, 독일 베를린으로 날아간다. 졸업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생각날 때마다 순간이동 하게 하는 그곳.
20대 가장 빛나는 시절을 보낸 베를린, 모국에 대한 향수를 참으며, 김치찌개에 김치를 충분히 넣어 먹는 게 소원이었던. 미래를 위해 외로움과 그리움을 달랬던 유학 시절.
잠시라도 외국 생활 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머물렀던 그곳이 제2의 고향이 되어있다는 것을.
베를린 대한민국 대사관 옆 Pestana Berlin Tiergarten 호텔에 일주일 예약을 한다.
인천공항에서 베를린까지는 직항이 없다. 그러니 남쪽에 있는 뮌헨보다는 북쪽에 있는 베를린과 가까운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을 경유하는 비행기를 고른다.
아침 비행기를 타면 당일 저녁 무렵 베를린에 도착할 것이다.
베를린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해 짐을 푼다.
그리고 티어가르텐 공원(Tiergarten) 근처 근사한 노천카페에 간다. 주중이라 사람이 많진 않다. 거품이 풍성한 라떼 마끼아또를 한 잔 주문한다.
택시 기사에게처럼 식당 점원에게 기분 좋게 약간의 트링켄겔드(Trinkengeld; 팁)를 준다.
바쁜 한국 생활에서 누릴 수 없었던 파울렌쩬 (faulenzen;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게을러 보는 것)을 맘껏 즐긴다.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슈프레강에서 오리들이 유유자적하게 헤엄을 치고 있다. 밤에 피어오르는 베를린의 생기를 흡입한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니, 오늘은 뽀송뽀송한 호텔 침대 속에서 편안한 단잠을 잔다. 좋아하는 하얗고 깨끗한 시트 냄새를 맡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창밖을 보니, 티어가르텐 공원을 가득 채운 숲이 바람에 따라 푸른 물결을 만든다.
다음날, 보고 싶었던 친구들과 점심 약속이 있다.
환경공학을 전공했던 니콜과 그의 남자친구 카이를 만난다. 지난번 베를린 출장 시, 맛있는 점심을 대접받았기에, 내가 밥을 산다.
“너희는 언제 결혼할 거니?”
“우리 결혼은 굳이 안 해도 돼. 결혼하지 않아도 서로를 충분히 믿고 있고 사랑하는 만큼 책임질 수 있어”
“아, 그래?”
니콜과 카이는 대학 때부터 이야기한 결혼관이 바뀌지 않은 듯 보인다.
그리스 식당에 간다. 메뉴에서 그릭 요구르트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양고기 스테이크를 주문한다. 베를린 전통 맥주 필스너도 주문한다. 양고기의 느끼함을 잡아줄 쌉쌀한 맥주 한 모금이 입안을 휘감는다.
“너무 반가워!”
좋은 친구들을 만나면 10년 만이든 5년 만이든 시간은 함께였던 과거로 돌아간다.
반제 호수(Wansee)에서 알몸 수영했던 이야기를 꺼낸다. 그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렸다고 하니, 독일어로 번역해 달라고 한다.
“그건 언제가 될지 몰라. ㅎㅎ ”
친구들과 격의 없는 농담을 나누다 보니 벌써 저녁때가 되었다.
저녁엔 예전에 함께 일했던 마틴과 만나기로 했다
베를린 필하모니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좋은 좌석이기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연주자를 볼 수 있다.
웅장한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귀로 듣고, 연주자의 얼굴을 보며 눈으로 한번 다시 느낀다.
온몸이 노곤한 상태로 이튿날엔 베를린의 최고급 마사지 샵에 들린다. 아로마오일에 코를 맡기고 시차는 잊은 채 눈을 감고 스르르 잠이 든다.
오후에는 프리드리히 거리에 들러 쇼핑을 한다. 독일사람들이 옷 못 입는다고 누가 했던가. 한국과 다른 심플하면서 자연스러운 라인이 멋있는 힙한 옷을 구경한다.
Karl Lagerfield, Esprit 등 좋아하는 브랜드에서 유럽풍 옷을 사 입는다.
다른 날은 뮤지엄 인젤(박물관 모여있는 곳)에 가서 미술관 투어를 한다.
우주의 광활함과 심연의 고요함을 나타낸 것 같은 현대 미술부터 미술 교과서에서 봤던 중세 르네상스 낭만파, 그림들, 조각들이 눈을 호강시켜 준다.
다음날은 포츠다머 광장에 위치한, 슈타비(국립중앙도서관)에 간다.
유학시절,혼자 와서 공부했던 곳, 남편과 함께 와본다.
”이곳에서 공부했었어? “
남편은 별로 궁금해하는 것 같지 않지만, 웅장한 내부와 고급스러운 카펫 그리고 책의 규모에 놀란 듯하다.
도서관을 나와, 저녁엔 가장 친했던 사회학과 친구들과 비어가르텐(Biergarten;펍)에서 만나기로 한다.
슈바이너 학센, 슈니첼, 그리고 바이젠 비어 (독일 효모 맥주)를 앞에 두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공부했던 학교에 가본다. 졸업 논문을 지도했던 슐츠 교수님을 만나기로 했다.
지난번 독일 출장 때 못 뵌 것이 아쉬웠다.
학교가 위치한 에른스트 로이터 플라츠(Ernst-Reuter-Platz)의 이탈리아 식당에서 교수님과 만난다. 맛있는 파스타를 먹으며 그간의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에 연구차 오면 연락한다고, 나를 응원한다며 강한 긍정의 에너지를 받아온다. 예전 학교에서 뵀던 모습 그대로이다.
이제 이틀이 남았다. 2월 말이라 아직 좀 쌀쌀하다. 빗방울이 흩트려 내리지만 젠다광장(Gendarmenmarkt)의 고풍스러운 중세 분위기와 어울려 운치 있다.
가장 친한 친구 마리나도 남부 도시 카를스루에에서 나를 보기 위해 와있다. 5살 된 딸 한나와 초등학생 아들 아담 사진을 보여준다. 남편이 모로코 출신이라 종교가 이슬람인데, 아이들 이름은 다 성경에 나온 인물이다. 너무 귀엽다. 마리나는 BTS 팬인데, 모두 군대에 갔다고 이야기하니 아쉬워한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무색하게 산책하고 수다 떨고 맛있는 것을 먹다 보니 이틀의 시간이 흘렀다 기차로 한 시간 정도 타고 포츠담에 살고 있는 친구 클라우디아를 만난다. 지역 내 유명한 요리사인 그녀만의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먹는다. 나에게 아보카도의 비밀스러운 맛을 일깨워 준 친구다. 고양이 클레오는 여전히 손에 닿지 않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있다. 고고한 모습 그대로이다.
내일은 하키셔 광장(Hackersher markt)에 가서 슈퍼맨을 만날 예정이다. 베를린 슈퍼맨은 미국 슈퍼맨과 다르게 서로 힘을 모아서 타인을 도와준다.
연대와 협동이 무언지 보여주는 그들을 만나서 뜻깊은 베를린에서의 방학을 마무리할 예정이다!